열 처녀의 비유 –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
마태복음 25:1-13
오늘은 우리가 ‘기다림’에 관해서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데 도움이 되는 말이 있을까 하여 ‘기다림’에 관해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눈길을 끄는 여러 말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면,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이라는 예수회의 사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기다림이란, 우리가 현재 있는 곳과 우리가 있고 싶어하는 곳 사이에 있는 메마른 사막이다.” 기다림의 고통과 지루함을 아는 우리들에게 참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한 목사님은 기다림이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며, 기다림이야말로 주님을 향한 가장 “능동적인 신앙 행위”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그리움’과 ‘기다림’이 서로 쌍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움’이 없는 ‘기다림’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기다림은 그리움의 그림자다.” 우리는 그리워하는 사람을 기다립니다. 그리움이 간절하면 기다림도 짙어집니다. 물론 그리움이 멈추면, 기다림의 그림자도 더 이상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24,25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세상의 끝에 일어날 일들에 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일들을 말씀하시지만, 초점은 한 가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있을 여러 징조들, 주님께서 오실 때에 사람들이 보고 겪게 될 일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오심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등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열 처녀의 비유”도 그 중의 일부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명의 처녀들과 같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들 중 다섯 명은 미련하고, 다섯 명은 지혜로웠습니다. 미련한 다섯 명은 등을 가졌지만 이를 위해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을 따로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신랑이 빨리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들 잠이 든 깊은 밤중에 갑작스럽게 소리가 났습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그 때 비로소 지혜로운 처녀들의 “지혜”가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미리 준비한 기름으로 등을 켜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하지만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이 떨어져 등불이 꺼져감으로 신랑을 맞으러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혼인 잔치에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을 크게 미련한 자들과 지혜로운 자들로 나누십니다. 미련한 자들은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자들이며, 지혜로운 자들은 미래를 준비한 자들입니다. 지혜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올 것을 예비하되 그가 더디 올 것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긴 기다림의 시간 동안 불을 밝히기에 충분한 양의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반면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따로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신랑을 맞이하는 일에 신경을 많이 쓰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다른 바쁜 일들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분의 기름을 따로 준비하는 것이 성가시고 아까웠을 수도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예수님은 이들을 “미련한 처녀들”이라고 부르십니다. 미래를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란 “미래를 내다보고 이를 준비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7). 반면에 노아 시대의 다른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갔습니다” (마태복음 24:38). 노아는 매우 오랫동안 방주 짓는 일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120년 동안이나 방주 짓는 일을 했다고 추측합니다. 먼 장래에 있을 홍수 곧 하나님의 심판에 대비하여 매우 오랫동안 준비를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면서 “오늘”을 즐기는 동안, 노아는 “미래”를 위해 방주를 짓는 수고를 감당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들은 “오늘”을 살고, 노아는 “미래”를 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미리 경고하신 심판의 날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 “미래”를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며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 소망을 따라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꿈”을 꾸면서 오랜 노예 생활의 고난을 견디어냈습니다. 이들은 모두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노아가 미래의 홍수를 대비하여 오늘 방주를 짓듯이, 우리 또한 미래 주님의 오실 날을 대비하여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두 날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만나는 그 날(that day)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사는 바로 오늘(today)입니다. 우리는 그날(that day)를 위해 오늘(today)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를 사는 것이며, 영원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날과 오늘 사이에 있는 ‘사막’ 같이 길고 지루할 수 있는 날들을 ‘소망스러운 설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또 그날을 위해 오늘을 살 때, 우리는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걷는 나그네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 그 날을 위해 오늘을 살 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천국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성령님과 교제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영원한 영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찬송가 53장의 가사처럼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 하는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지혜로운 처녀들이 준비한 기름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경학자들은 이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자의 “착한 행실”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견디는 믿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의견은 “성령님”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 (Do not put out the Spirit’s fire)”고 권고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9). 실상 착한 행실이나, 믿음이나, 성령 충만함이 서로 다른 별개의 것들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모두 아울러서 “깨어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결론으로 예수님께서는 “그런 즉 깨어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하십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특히 오늘날과 같이 바쁘고 복잡한 세상에서, 매우 어렵게 느껴집니다. 정말 세상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들”에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예수님께서 갑자기 오신다면 그 충격이 어떠할지 정말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성경이 묘사하는 예수님 재림의 광경은 참으로 극적입니다.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십니다 (누가복음 21:27).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모두들 잠들어 있는 깊은 밤중에, 갑자기 불이 켜지듯 온 세상이 환해지고 하늘로부터 울리는 나팔 소리와 호령이 천지를 진동합니다. 이것은 “밤”과 “낮”의 거대한 충돌입니다. 하늘의 “빛”이 땅의 “어두움”을 깨뜨리며 순식간에 임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런 와중에 제가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며 맞이할 수 있을지 좀 염려가 됩니다. 부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입니다.
“나를 깨어있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많이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물론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에 충만하면 그것이 깨어있는 삶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뭔가 다른 대답을 찾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찾은 답이 바로 설교의 시작 부분에 잠시 언급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움’입니다. 주님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어하며, 주님의 집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리움’이 없는 ‘기다림’이란 진정한 기다림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냥 온다고 하니까 기다리는 것이겠지요. 설사 기다린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곧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잊어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천국은 “고통이 없는 행복한 상태”가 아닙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천국이란 “어떤 사람”입니다. 우리가 연애하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신랑”입니다.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천국은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리움이 깊으면, 기다림도 간절해집니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자다가 깨어나도 그 분 생각뿐입니다. 이 그리움의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분을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나깨나 기다립니다. 간절히 기다립니다. 주님께 대한 ‘그리움’은 이렇게 나로 깨어서 주님을 기다리게 합니다. 설령 주님의 오심이 더디더라도, 그 시간이 수천 년이라도, 그리움은 그 순간 순간들을 소망과 설렘으로 채웁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제가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양들의 죄를 감당해 주는 것, 말씀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 함께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는 것, 모범을 보이는 것 등 많은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양들을 신랑 되신 예수님의 신부로 예비하는 것이라 믿어집니다. 대학 입학 시험을 위해 아이들을 선생님한테 맡겼는데, 아이들이 시험에 떨어져서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그 선생님을 좋은 선생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목회자가 양들을 지혜로운 처녀로 준비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이로 인해 그들이 예수님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그를 성공한 목회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제가 신랑 되신 예수님을 잘 소개함으로써, 양들의 마음에 주님께 대한 그리움이 간절해지며 그리하여 많은 영혼들이 주님의 정결한 처녀로 준비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 오신 것은 우리를 주님의 신부로 부르시고 예비하시기 위함입니다. “약혼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혼인 예식이 열리고 성대한 혼인 잔치가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하시고 가신지가 벌써 2000년이 지났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참으로 더디 오십니다. 또 밤이 깊었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주님은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를,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을 구별하십니다. 이 깊은 밤에 우리가 더욱 깨어서 주님을 향한 그리움을 불태워야 하겠습니다. 이 그리움으로 주님께서 오실 그날을 위해 오늘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지혜로운 신부가 되며 예수님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메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편 23) (0) | 2016.09.26 |
---|---|
죄사함의 권세자 예수님 (마가복음 2:1-12) (0) | 2016.09.20 |
요나의 표적 (마태복음 12:38-41) (0) | 2016.09.07 |
죽음의 두려움으로 살 것인가 부활의 소망으로 살 것인가? (마가복음 5:21-43) (0) | 2016.08.29 |
영생의 샘물을 주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4:1-26) (0) | 2016.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