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죽음의 두려움으로 살 것인가 부활의 소망으로 살 것인가? (마가복음 5:21-43)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6. 8. 29. 01:06

죽음의 두려움으로 살 것인가 부활의 소망으로 살 것인가?

 

마가복음 5:21-43

 

오늘 말씀의 제목은 좀 깁니다. 죽음의 두려움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부활의 소망으로 살 것인가? 삶에는 크게 두 가지 모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에 쫓겨사는 삶과, “부활의 소망을 좇아사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은 있는 힘을 다해서 열심히 달려가는 어떤 사람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달리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두려운 것에 쫓겨 도망가는 것이거나, 아니면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잡기 위해 좇아가는 것입니다. 전자는 두려움에 쫓겨 달리는 것이며, 후자는 소망을 좇아 달리는 것입니다. 물론 바람직한 삶의 모드는 후자입니다. 소망을 좇아 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죽음의 두려움에 쫓겨사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을 좇아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말씀에서는 예수님께 나아온 두 사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야이로라 하는 회당장이며, 다른 한 사람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는 한 여자입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문제를 안고 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방식도 다릅니다. 하지만 이 두 이야기는 모두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이 두 이야기들을 잘 비교해 봄으로써 우리는 믿음과 구원에 관한 중요한 교훈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훈들 중 하나는 우리의 믿음의 뿌리가 죽음의 두려움에 있지 않고, “부활의 소망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년 동안 혈루증(bleeding)을 앓고 있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혈루증은 레위기(Leviticus)에는 유출병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병은 여자의 신체 내부의 이상으로 인해 불규칙적으로 하혈을 하는 만성 질환입니다. 이 여자는 12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 동안 이 병에 시달렸습니다. 이 뿐 아니라 이 병 때문에 많은 의원들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으며, 있는 재산도 모두 허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이 낫기는커녕 도리어 더 악화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 여자의 영혼은 병이 악화된 것보다 더 심하게 손상되었을 것입니다. 이 여자의 상황은 여러모로 매우 절망적입니다. 살아있지만 거의 죽은 자와 같았습니다. 이 불쌍한 여인은 한 줄기의 소망의 빛도 비추지 않는 깊은 어둠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에게 빛이 임했습니다. 예수님께 대해서 들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들을 내어쫓으시고, 문둥병자들을 깨끗하게 하시며,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 손 마른 자를 고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치료의 능력을 들은 여자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12년 동안 병을 앓아온 이 여자는 혈루증이 얼마나 치료하기 어려운 병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서 그녀는 수 없이 많은 의사들을 만났으며, 또 많은 재산을 날렸습니다. 이런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이 병은 여전히 그녀의 몸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심해질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님의 치료의 능력을 생각할 때, 자신의 병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이 12년 묵은 지독한 질병을 치료하는데 충분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여자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예수님의 뒤로 접근하여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그러자 곧 그녀의 몸 속에 있던 혈루 근원이 말라버렸습니다. 병이 나은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병이 나았다는 것을 몸으로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믿음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녀에게 새로운 생명이 임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또 다른 주인공인 회당장 야이로는 이 여자와는 사뭇 다르게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들과 함께 바닷가에 계실 때, 야이로는 예수님께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려 간청했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야이로에게는 열두 살 난 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예수님께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죽기 전에, 아직 숨이 붙어있을 동안에 속히 가서 그 위에 손을 얹어달라고 간절히 구했습니다. 본문 23절에는 많이 간구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죽어가는 딸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절박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뒤로 몰래 와서 옷을 만진 여자와 대조가 됩니다. 이 아버지 야이로는 비록 몸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있지만, 마음은 벌써 딸에게로 달려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딸이 죽기 전에 도착하도록 발걸음을 재촉했을 것입니다. 순간순간이 피가 마르고 손에 땀이 나는 초조함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야이로의 간청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런데 야이로의 다급한 마음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길 가는 도중에 이 혈루증 걸린 여인을 만나 시간을 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딸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딸의 죽음과 함께 야이로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가는 일도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악화된 것이 아니고, 상황이 아예 끝나버린 것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야이로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딸이 죽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믿으라는 것일까? 이 분은 이 끝나버린 상황에서도 무엇인가를 하실 수 있단 말인가? 딸이 죽은 이 마당에 무슨 소망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여러 질문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딸의 죽음으로 인해 야이로에게 임한 깊은 절망과 어두움을 비집고 예수님의 말씀이 밝은 빛으로 강하게 파고들었습니다. 딸의 숨이 붙어있을 때는 오로지 딸을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뿐이었는데, 딸이 죽은 지금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딸이 살아 있을 때는 그 약하게 뛰는 맥박에 애간장을 태우며 그 가느다란 숨소리에 매달렸었는데, 이제는 오직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이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뜻밖에 야이로는 딸의 죽음 앞에서 두려움 없는 참 믿음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혈루증 걸린 여인의 12년 된 고질병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시고 즉시치료하셨습니다. 또 죽은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지신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만물을 지으시고 붙드시는 창조의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믿음에 한계가 있을 뿐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믿음을 제한하는 것입니까? 왜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의 무한하신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는 죽음의 두려움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만, 자주 그 믿음은 죽음을 피하기 위한믿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죽기 전에오셔서 구원해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가 어찌하든 죽음을 모면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이고 구원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실상 두려움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앞에서는 예수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십니다.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으로 나아오는 자들의 기도도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죽음의 두려움에서 생긴 약한 믿음에 머물지 않고, 더욱 강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때로 죽음이 우리를 삼키도록 허락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더 크신 능력, 곧 부활의 능력을 보이시며, 이를 통해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갖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사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통해서 우리에게 증거하신 복음입니다. 고린도후서 13:4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약함을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드러났습니다. 이 능력은 또한 예수님을 통해서 믿는 자들 가운데 역사하는 능력입니다. “부활의 능력입니다.

 

크리스천이란 엄격히 말하면 이미 죽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약함을 입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다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다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부활의 소망이 있을 뿐입니다. 죽음이란 꼭 숨이 끊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할, 고통스러운 죽음의 냄새가 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파산, 실직, 난치병,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불의의 사고, 인간 관계에서의 여러 문제들……. 이와 더불어 매일 일어나는 소소한 문제들까지도 우리를 두렵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찬송을 부르고, 목청을 높여 기도를 하지만 이런 불안이 잘 가시지 않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아직 충분히 죽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죽음의 두려움이 우리의 믿음을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은 죽음의 두려움에 쫓겨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부활의 소망을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사는 삶입니다. 혈루증 걸린 여인은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말했습니다. 세상에 어떤 병이 이렇게 쉽게 나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다못해 감기에 걸려도 약을 먹고 하루는 푹 쉬어야 합니다. 하물며 12년 된 이 고질병이겠습니까? 하지만 이 여자는 예수님의 능력을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의 병이 참으로 사소하게 느껴졌습니다. 병처럼 생각되지도 않았습니다. 겨우 몸에 묻은 먼지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치료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39절에서도 예수님은 죽은 소녀를 보고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우습게 보는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이는 이들이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죽음은 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깨우면 그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큰 선물 곧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주셨습니다. 이 두 선물의 의미는 참으로 깊고 깊어서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비추어 말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에게 나의 능력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라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에 쫓겨 살지 말고, “부활의 소망을 좇아 살아라 하십니다. 주님의 능력의 말씀이 우리 영혼 깊이 스며들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죽음의 두려움을 몰아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세포와 신경과 골수와 뼈마디가 예수님 안에 있는 부활의 소망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