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편 23
성경은 하나님과 그의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은유들(metaphors)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와 양, 나무와 가지, 머리와 몸, 신랑과 신부, 토기장이와 그릇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은유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홀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우리는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으며, 또 한 존재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그 영혼의 시작부터 영원까지, 숨 쉬는 매 순간마다, 그리고 내딛는 매 걸음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이 사실을 누누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감상할 시편 23편도 그 중 하나입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왕이 지은 여러 시들 중 하나입니다. 이 시는 짧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한 개인의 삶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은 자신을 “양”으로,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비유합니다. 그리고 목자 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양으로 사는 삶의 행복함을 노래합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절대적인 존재(two absolute beings)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와 “하나님”입니다. “나” 또는 “내 영혼”은 참으로 신기한 존재입니다. 저는 이따금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그럴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느낍니다. 제가 너무 훌륭해서 자아에 도취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여기에 “생각하고, 말하고, 알고 느끼며, 슬퍼하고 기뻐하는 어떤 살아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나”는 모든 것들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의미 있고 가치가 있다는 것은 “나”에게 의미 있고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꽃이 아름답다”고 함은 그 꽃이 “나”에게 아름답다는 것이고, “음식이 맛있다”고 함은 “나”에게 맛있다는 것입니다. “나”가 없으면, 아름다운 꽃도, 맛있는 음식도 그냥 의미 없는 물질들일 뿐이며, 그것들의 있고 없음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은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상대적인 존재들(relative beings)”일 뿐입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커다란 가마솥에 넣고 보글보글 끓이면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증발해서 없어지고 맨 나중에는 오직 둘만 남습니다. 그것은 “나”와 “하나님”입니다. 이 둘이야말로 “영원히 계속되는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 사이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와 “하나님”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영원한 행복” 또는 “영원한 불행”을 결정하는 유일한 결정자(determinant)입니다. 이 점에서 다윗의 고백은 참으로 진리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은 자신을 행복을 오직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찾았습니다. 이 행복은 “진정한 행복”입니다. 왜냐하면 변하지 않는 영원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맑은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 푸른 초장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곳에 양 한 마리가 누워있고 목자는 긴 지팡이를 들고 곁에 앉아서 양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참으로 평화로운 모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쉼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수식어(modifier)는 아마도 “평화(peaceful)”와 “안식(restful)”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인 “나”는 목자 되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참된 평화와 안식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안식”이야말로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ingredients)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안식”이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검은 색을 흰 색이라고 우기는 것보다 더 억지스러운 것입니다.
제 딸들이 어렸을 때, 저는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뉴욕에 놀러 갔었습니다. 뉴욕에 갈 때 으레 찾는 곳은 한국 음식점들이 많은 맨해튼의 32번가와 맨해튼의 심장부인 Time Square입니다. Time Square에는 Toys”R”Us와 같이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상점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런 상점에 들어가면 아이들은 이곳 저곳을 바쁘게 옮겨 다니면서 진열되어 있는 물건들을 구경하고 만져보며 놉니다. 저는 아이들이 잘 보이는 곳에 서서 그들을 지켜봅니다. 아이들은 장난감들과 인형들에 흠뻑 빠져있다가도 이따금 노는 것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봅니다. 아빠가 어디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때 주위를 살펴보는 아이들의 표정은 인형들을 갖고 놀 때의 즐거운 표정과는 사뭇 다릅니다. 불안하고 긴장된 모습입니다. 무엇인가를 초조하게 찾는 모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저를 볼 수 있도록 이름을 부르고 손을 흔듭니다. 저를 본 아이들의 얼굴이 활짝 펴집니다. 환하게 웃으면서 아이들도 저를 향해 신나게 손을 흔듭니다. 그리고는 다시 인형들과 장난감들 속으로 빠져듭니다. 이렇게 아이들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이들이 즐겁고 행복한 것은 맛있는 한국 음식도, Time Square의 화려한 불빛도, 산 같이 쌓여있는 인형들과 장난감들도 아닙니다.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아빠 때문입니다. 이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아빠를 찾을 때, 거기에 아빠가 없었다면? 정말 상상조차 하기 싫은 상황입니다.
우리에게 “푸른 초장”과 “맑은 물가”는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볼 때, 우리 마음에 있는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 “양”에게 쉴만한 “푸른 초장”과 “맑은 물가”는 전혀 없습니다. 푸른 초장에는 사자나 하이에나와 같은 맹수들이 수풀에 몸을 숨기고 웅크리고 있으며, 물 속에는 악어들이 먹이가 될만한 사냥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한 마디로 정글입니다. 이곳에서 “목자 없는 양”은 “식탁 위에 올려진 고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아빠 없이 맨해튼 밤거리를 헤매는 어린 아이들과 같습니다. 이들에게는 Time Square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도깨비불로 보일 것이며, 예쁜 바비 인형들조차 금발의 귀신들로 보일 것입니다. 오직 목자 되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평화와 안식을 주시는 “푸른 초장과 맑은 물가”가 되십니다. 하나님 안에 우리가 먹을 양식과 우리가 마실 물이 있습니다. 이 양식과 물은 생명의 떡이며 음료입니다. 우리에게 참 만족을 줍니다.
3절에서 다윗은 노래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도다.”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양을 인도하시는 데는 두 가지 중요한 것들이 걸려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양의 생명”입니다. 이 둘은 모두 하나님께 있어서 “극도로” 중대한 것이며, 또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곧 양을 생명 길로 안전하게 그리고 끝까지 인도하시는 것은 목자 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걸린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완전하시며 실패가 없습니다. 전에 뉴질랜드에 살 때 “탑승하시는 순간 고향입니다”라고 쓴 대한항공 광고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비행기를 탑승할 때 한국인 승무원들이 한국 말로 반갑게 인사를 하며 한국 일간신문들을 나눠주면 벌써 한국 땅에 와 있는 듯 푸근하고 뭉클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이와 같습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입니다. 이 서비스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양의 생명”이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완전하며 안전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우리는 영혼이 회복되며 벌써 “하나님 나라”에 와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실 양을 인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양의 이미지는 온순하고 평화로운 동물입니다. 그래서 매우 순종적일 것 같습니다. 온유하시며 겸손하신 예수님도 자주 “어린 양”으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자연 상태”의 양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사야서 53:6절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합니다. 양은 생각처럼 온순하고 순종적인 동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양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한 가지 배운 것은 양들에게는 무리를 짓는 (flocking)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두려움이 많은 초식동물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양의 무리 중 한 마리가 뛰기 시작하면 모두가 따라서 뛴다고 합니다. 왜 뛰는지도 모르고 정신 없이 함께 달리는 것입니다. 양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옛날에 본 Red River(1948)라는 서부영화가 생각이 납니다. 유명한 영화배우 존 웨인(John Wayne)이 주연한 카우보이 영화입니다. 한 그룹의 카우보이들이 거대한 소떼를 몰고 먼 거리를 이동합니다. 이동 중 한 곳에서 야영을 하게 되어, 소떼들은 들판의 적막한 고요함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잠을 잡니다. 그런데 카우보이들 중 하나가 실수로 그릇들을 떨어뜨립니다. 금속으로 만든 그릇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땅에 떨어지자, 어둠 속에서 잠을 자던 소떼들이 고개를 들고 웅성거리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몇 마리의 소가 뛰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소떼의 무시무시한 질주(stampede)가 시작됩니다. 그렇게 순하던 소들이 미친 듯이 달리면서 모든 것들을 파괴하며 심지어 카우보이들 중 하나를 밟아 죽이기도 합니다. 한 양이 그 목자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마치 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소떼 가운데 있는 한 마리의 소가 그 와중에 카우보이의 음성을 듣고, 다른 소들과 함께 달리기를 멈추고, 대신에 그 카우보이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약하고 두려운데, 세상은 어둡고 또 이 깊은 어둠 속에서 우리의 이 약한 마음을 놀라게 하는 두려운 소리들이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동료들, 친구들, 동창들, 이웃들은 매일 끊임없이 어딘가를 향해 달려갑니다. 나도 이들과 함께 달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함께 달리지 않으면 뒤쳐지고, 망하고, 죽을 것 같습니다.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음성은 잘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은 약한 초식 동물의 무리 짓기 (flocking) 습성을 버렸습니다. 그 대신에 “주님의 함께 하심”에서 참된 위로를 받았습니다. 또 세상에서 들려오는 두려운 소리들을 듣기보다,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에 대해 혹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지팡이)와 훈련하심(막대기)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두 개의 나무로 만든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하기도 합니다. 조금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심을 생각하면 전혀 부당한 생각은 아니라 여겨집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실제로 많은 “죽음”같은 시간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렇지만 두려움으로 인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벗어나지 않고, 매 순간 목자 되신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함으로 죽음 같은 시간들을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계속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5절과 6절은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양이 결국에 누리는 축복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원수에 대한 승리가 있으며,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이 있습니다. 또 평생에 걸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누리며, 영원히 하나님의 집에 거하게 됩니다. 영원한 승리와, 영원한 축복과,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나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부족함이 없는 삶입니다. 이 모든 축복은 오직 한 가지 진리에서 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다른 축복들보다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며 나는 주님의 어린 양이 되는, 그리하여 평생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경험하는 이 은혜가 우리 각자의 삶에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메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둥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능력 (누가복음 5:12-16 / 마가복음 9:14-27) (0) | 2016.10.10 |
---|---|
포도원 품군의 비유 (마태복음 20:1-16) (0) | 2016.10.03 |
죄사함의 권세자 예수님 (마가복음 2:1-12) (0) | 2016.09.20 |
열 처녀의 비유 –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 (마태복음 25:1-13) (0) | 2016.09.12 |
요나의 표적 (마태복음 12:38-41) (0) | 2016.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