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둥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능력
누가복음 5:12-16 / 마가복음 9:14-27
사람들은 자주 성경책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목사들이나 신학자들과 같은 전문가들의 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며, 또 마음을 들여 읽고 묵상하면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아닙니다.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들 중 하나는 대조가 되는 내용들을 서로 비교해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대조는 “사단의 행적”과 “예수님의 행적”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14:13-15절은 교만으로 멸망할 사단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반면 빌립보서 2:5-11절은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이로 인해 받으신 영광에 대해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또 성경은 예수님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말씀으로 소개하는 반면 (요한복음 1:14), 사단을 가리켜 “살인한 자요 거짓말쟁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8:44).
오늘 우리가 공부할 말씀은 이렇게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누가복음 5:12-16절에서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구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저를 만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말씀하시고, 곧 문둥병이 떠나갔습니다. 또 다른 본문인 마가복음 9:14-27절에는 귀신들린 아이를 둔 아버지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나아와 말했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이에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며 그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절박한 문제들을 들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또 주님께 나아와 간구함으로써 모두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매우 바람직한” 방법으로 주님께 기도했으며, 다른 한 사람은 “덜 바람직한” 방법으로 기도했습니다. 문둥병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리고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문둥병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음”을, 곧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능력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주님께서 원하시는가,” 곧 “예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주님의 능력을 믿었으며, 자신을 주님의 뜻에 맡겼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원하노라” 화답하시고, 그를 만지시며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아들을 치료해주실 것을 바라고 나와왔지만, 예수님께서 그것을 하실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곧 “주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절박한 것은, 그래서 가장 절대적인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하는 그의 필요였습니다. 그는 “주여 원하시면”이라고 말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나의 필요”보다 더 앞에 둘 여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기에 앞서서 먼저 그가 더 큰 믿음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이 의심받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전능하심을 강조하시며, 이에 대한 우리의 “절대적인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창세기 18장에 아브라함을 방문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생길 것을 말씀하시자 이를 들은 사라가 속으로 웃습니다. 이는 자신들이 이미 아이를 갖기에 너~무 늙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또 자신이 수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들은 처녀 마리아는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반문합니다. 이체 천사가 말합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며, 그 능력이 무한하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믿음의 대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절대적이며 영원히 불변하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티끌만큼의 의심도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늘 마음을 써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가?”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문둥병자는 “주여 원하시면” 하면서, 주님의 뜻을 앞세웠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자신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나의 필요가 아무리 절박하더라도 주님의 뜻이 먼저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런 자격이 없으며, 오직 주님의 긍휼을 의지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시면 어쩌죠?” 정말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제가 생각하는 답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No”라고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대학생일 때 제게 성경을 가르쳐주던 한 선배가 있었는데, 그분이 자주 이런 말을 했습니다. “최선(the best)의 적은 차선(the second best)이다.” 언뜻 생각하면, 최선의 적은 그 반대인 최악(the worst)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최선에 대항하고 이를 거슬리는 것은 최악이 아니라 차선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자주 겪는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 사이의 갈등에 잘 적용이 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사라를 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기다리던 아들이 생기지 않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No”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차선책”을 택했습니다. 곧 지금 당장, 자신의 능력으로, 종 하갈을 통해, 육신의 아들 이스마엘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최선(the best)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내 사라를 통해,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들을 기다리는 아브라함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Yes”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최선”을 기다리지 못하고, “나의 차선”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은 “차선”도 아니었습니다. 종 하갈은 사라를 괴롭히고, 이스마엘은 이삭을 핍박했습니다. “최악”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주여 원하시면”이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항상 “최고의 Yes (the best Yes)”를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의 최선”에는 조금의 빠짐도, 조금의 결함도, 조금의 부족함도 결코 없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최선”은 주님의 전능하심만큼이나 완벽하고 완전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에서처럼, 그것이 때로 우리에게는 “No”처럼 들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No”가 “우리의 Yes”보다 더 Yes입니다.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항상 Yes입니다. 사실은 말하자면, 주님의 대답은 우리가 기대했던 Yes보다 훨~씬 더 좋은 Yes입니다. 문둥병자는 다만 주님께서 자신의 문둥병을 치료해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내가 원하노라” 하시며 그 마음을 주셨습니다. 또 그의 더러운 몸에 손을 대셔서 그의 마음을 녹이셨습니다. 그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믿거나 말거나 주님께서 그 아들을 치료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아들을 치료하실 뿐 아니라, 그에게 온전한 믿음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한 번 은혜 받은 자가 하니라, 항상 믿는 자가 되어 영원한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훨~씬 더 좋은 Yes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많은 말씀들을 하고 있지만, 그것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위기 11:45)”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48)”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나 “아버지의 온전하심”은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뜻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거룩해지며 아버지와 같이 온전해진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에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100%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죽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100%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차선책”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최선책”을 누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늘 능력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자신의 뜻”대로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100달러 지폐에 쓰여진 초상의 주인공인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정치가이고 행정가이지만 또한 과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배터리(battery)”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입니다 (‘battery’라는 단어는 이전부터 있었지만, ‘전지’라는 의미로는 프랭클린이 처음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구름 속에 있는 전기에너지를 이용(harness)할 수 없을까 생각한 나머지, 연(kite)을 날려서 그 에너지를 땅에 있는 장치(배터리) 속으로 끌어내리는 실험을 했습니다. 하늘에 있는 에너지를 배터리에 저장해 놓고 필요할 때 쓸 수 있다면 더 없이 편리하겠죠? 우리의 믿음 생활도 때로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내려 언제든 나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까지 끌어올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쓰십니다.
창세기 17:1절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제 아브라함은 나이 99세의 노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아직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주시지 않았으며, 아브라함은 “생물학적으로” 전혀 무능력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에 개의치 않으십니다. 여전히 자신이 “전능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여전히 고집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의 능력”이 아브라함에게 여전히 Yes이심을 주장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Yes 하기를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이라면, 약해짐도 낮아짐도, 감사함으로 Yes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시며, 높이실 것입니다. 우리의 “차선의 계획”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최선의 뜻”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9-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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