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임마누엘 예수님 (마태복음 1:18-25)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6. 12. 12. 04:54

임마누엘 예수님

 

마태복음 1:18-25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또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호칭은 예수님께 붙여진 여러 이름들 중 하나이며, 또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함께 한다는 것은 아마도 최고의 행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화나 소설이나 시나 노래에서 우리는 자주 연인끼리의 고백을 듣습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나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내일 태양이 뜨지 않는다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내 삶은 아주 단순하고 쉬워질 것입니다등등…….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임마누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너무나 귀한 것이어서,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을 만큼, 그리고 내일 죽는다 해도 아쉬울 것이 없을 만큼 우리의 삶에 복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현실에서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은 로맨스 영화나 소설 속의 그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기쁨과 즐거움도 있지만, 어려움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기도 하지만, 다투기도 많이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다툼이 심해지면 결국 함께 함의 행복을 포기하고, ‘외로운 편안함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함께 하심은 매우 특별합니다. 이는 죄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낮아져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예수님의 함께하심을 잘 표현한 성경 말씀들 중 하나는 마태복음 5:41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2km)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4km)를 동행하라.” 누군가가 나를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한다면 매우 화가 나는 일입니다. 몇 걸음을 끌려갈 수는 있겠지만, 절대로 오리까지 함께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할 수 없이 가야 했다면, 돌아오는 길에 그 사람 또한 오리를 걷도록 해야 직성이 풀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죄인들과 함께 하셨는가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실 뿐 아니라, 거기에 더하여 넘치도록 축복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함께 하심은 오히려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우리 마음에 평화를 줍니다.

 

왜 우리에게 예수님의 함께 하시는 은혜가 그렇게 간절하게 필요한 것일까요? 이는 우리 각자가 외로운 죄인또는 소외된 (alienated)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는 최초의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 죄를 범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실과를 먹었을 때, 그들에게 가장 먼저 생긴 것은 자신에 대한 수치심 곧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의 벗은 몸을 부끄럽게 여기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몸을 가렸습니다. 이것은 자신으로부터 소외(alienation from the self)를 말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대신, 자신을 창피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뿐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 숨었습니다. 이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alienation from God)를 말합니다. 다정한 아빠의 속삭임 같던 하나님의 음성이 이제 무서운 재판장의 호령으로 들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실과를 먹은 아담은 이를 변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하신 여자 그가 그 실과 나무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은 자신이 지은 죄를 하와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그에게 인도하셨을 때, 아담은 그녀를 맞이하며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하였습니다. 아담은 여자를 자신의 몸과 다름이 없이 여겼습니다. “나의 일부였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난 후, 그는 하와를 하나님께서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하신 여자라고 부릅니다. 마치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말합니다. 이제 여자는 남자에게 타인(other)”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소외(alienation from others)를 말합니다. 게다가 사람의 죄로 인해 땅도 저주를 받았습니다. 전에 탐스럽고 맛난 과실을 내던 생명의 땅은 이제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며 결국은 생명을 삼키는 죽음의 땅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땅으로부터의 소외(alienation from earth)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죄로 인해 사람은 소외된 외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위로는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땅으로부터, 좌우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심지어 내면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철저히 고립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고립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은 먼저 이렇게 갇혀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포로가 되어 적진 한가운데 갇혀 있는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서, 그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세상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창조주이시며 죄인들과 함께 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 곧 사람이 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3:15).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육신을 갖고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같이 먹고 마시며 사랑할 수 있는 육체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계획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원한 말씀이시며,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심으로 마침내 성취되었습니다.

 

갈릴리 시골사람 요셉과 마리아는 서로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남녀가 정식 혼인을 하여 동거를 시작하기 전에 약 1년간의 약혼 기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에 마리아가 아기를 가진 것입니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아기를 가진 마리아를 본 요셉은 마리아와의 관계를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19).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로운 사람이란 법을 잘 지키고 또 모든 일을 법에 따라 처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의로운 사람 요셉은 마땅히 마리아의 간음죄를 드러내고, 법에 따라 형벌을 받도록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의로운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로운 사람이란 남의 죄를 드러내지 않고 덮어주는 자입니다. 곧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는 사람을 위해 십리를 함께 가주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해서, 순종하는 처녀 마리아와 의로운 청년 요셉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말씀이 육체가 되셨습니다.

 

요한복음 1:14절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말씀입니다. ‘성육신 (incarnation)’은 기독교 복음의 매주 중요한 핵심 교리들 중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들은 뭔가 영적인 것들이나 초월적인 것들을 추구합니다. “타락한세상과 육체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치며, 어딘가에 있을 보이지 않는 미지(unknown)의 세계를 찾아 헤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복음은 사람들의 이런 종교적인 본능을 거슬립니다. 왜냐하면 가장 영적이시며 가장 초월적인 하나님께서 육체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기독교 역사에서 나타나는 이단들(heresies)의 대부분이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이 성육신의 진리를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Docetism이라는 이단 사상은 예수님의 육체가 단지 우리 눈에 보이는 허상일 뿐이며 실체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함께 하셨음을 부인하는 것은 실상 복음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도 죽음이 아니며,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도 부활이 아닙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을 통해 육신을 가진 아기로 태어나심은 예수님의 희생과 부활을 포함한 기독교 복음의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기초(foundation)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신 것은 육체를 입고 우리 가운데 계셨기 때문입니다. 제 막내딸이 대학에 입학했을 때였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던 딸은 이제 차로 6-7시간을 달려야 하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대학의 기숙사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딸은 처음 얼마 동안 이 낯선 삶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저는 힘들어하는 딸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도움이 될만한 많은 영적인 말들을 해 주었습니다. 또 사랑한다고도 하고 너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는 말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들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딸한테 직접 가기로 했습니다. 좋아하는 음식을 몇 가지 챙기고, 새벽 2시에 집을 출발하여 먼동이 트는 이른 아침에 학교 캠퍼스에 도착했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딸을 만나, 기숙사 카페테리아의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서 아침을 먹었습니다. 함께 학교 이곳 저곳을 구경하고, 오후에는 딸이 일하고 있는 도서관 구석에 앉아서 물끄러미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저녁까지 먹고 30여분 더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떤 뒤에 저는 딸을 껴안아주고 차에 올랐습니다. 이렇게 하루를 몸으로함께 한 것이 딸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많은 영적인 말들보다 더 효과적이었습니다. 더욱 다행스러웠던 것은 딸의 마음이 열리고 여유가 생겨서 영적인 말들까지도 듣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더욱 낮아지셔서, 천대받는 갈릴리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또 사람들마저 싫어하고 외면하는 세리들, 병자들, 귀신들린 자들, 이방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함께 하심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입니다. 공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군자(君子)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小人) 동이불화(同而不和)니라.” 이 말의 뜻은 이러합니다. 군자는 소인들과 다르지만 소인들과 잘 어울리며 함께 합니다. 반면에 소인은 다른 소인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으면서도 서로 잘 어울리지 못하고 늘 다툽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오히려 죄인들과 잘 어울려 지내셨습니다. 그들과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셨습니다. “육체로그들과 함께 하심으로써, 그들의 삶 깊숙히, 그들의 영혼 깊숙히 파고드셨습니다. 그렇게 그들을 용서하시고, 품으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반면에 많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도 실상 다를 바 없는 죄인들이면서, 다른 죄인들을 정죄하고, 멀리하였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이 거룩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사랑이 없는 이기적인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육체로 임하심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육체로 임하사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하신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비밀의 계시이며, 우리에게는 생명의 빛이며 양식이 됩니다. 주님께서 육체로 임하심은 너무나도 중요한 진리라서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요한2 7).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요한1 4:1,2)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주께서 육체로 오신 것이 우리의 신령하고 거룩한 삶의 뿌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체로 임하심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들에게 중요한 삶의 방향을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부터 구별되기 위해 더 높아지고 더 영적인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 겸손히 낮아지고 내 육체의 좋은 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가장 흉악한 죄인들의 자리인 십자가에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찢어 죄인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육신이 되셔서 가장 육적인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영적인사랑입니다. “외로운 죄인과 함께 하시는 주님의 높으신 사랑입니다. 우리 각자가 이 주님의 함께 하신 사랑을 깊이 생각하며, 낮아져 외로운 영혼들과 함께 하며 내 육신의 좋은 것으로 그들을 위로하는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