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요한복음 3:16)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6. 12. 26. 08:54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요한복음 3:16

 

우리는 흔히 요한복음 3:16절을 성경의 요약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이 말씀이야말로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이야기들과 가르침들이 날실과 씨실로 서로 엮여 증거하는 영원한 진리임을 느끼게 됩니다. 이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는 변할 수 없는 영원한 진리이며, 다른 하나는 이 변할 수 없는 영원한 진리의 기초 위에 이루어질 장래의 소망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장래의 소망이 예수님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이 사랑 안에서만 우리는 산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이 말씀을 묵상하고 우리 삶의 여정을 위한 나침반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십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선은 제 자신이 사랑의 의미를 충분히 알지도 못하거니와,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형용할 수 없이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서, 그것을 형용하려고 애를 쓰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어쨌든 사랑이란 두 혼적인 존재들 (souls) 사이에 일어나는 일종의 케미 (chemistry)”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몇 해 전에 제가 알고 지내던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집 없는 고양이었는데, 주로 제가 살고 있던 집 건물의 바닥과 지표면 사이에 생긴 공간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이 고양이는 절대로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아내는 그를 까칠한 고양이라고 불렀습니다. 제가 처음 그 집으로 이사를 갔을 때, 현관 옆에 고양이용 먹이가 담긴 봉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아마도 누군가가 이 고양이를 위해 갖다 놓은 듯 했습니다. 저는 오가면서 봉지에 담긴 먹이를 조금씩 꺼내어 현관의 베란다 구석에 놓인 조그만 접시에 넣어놓았습니다. 그러면 제가 없는 사이에 까칠한 고양이가 와서 그 먹이를 먹고 갔습니다. 봉지에 있던 고양이 먹이는 곧 떨어졌습니다. 시장에서 쇼핑을 하다가 문득 고양이가 생각이 나서 저는 평생 처음으로 고양이 먹이를 사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계속해서 고양이 밥이 제 쇼핑 목록에 포함되었습니다. 이제 현관 문을 나설 때면 저만치 앉아서 먹이를 기다리는 까칠이를 쉽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자 고양이는 제가 옆에 왔다갔다 하는데도 도망가지 않고 힐끔힐끔 곁눈질을 하면서 계속 먹이를 먹을 만큼 가까워졌습니다. 한 일년쯤 된 것 같습니다. 어느 따스한 봄날, 베란다 기둥에 몸을 기대고 서서 저만치 앉아있는 고양이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까칠이가 일어나 제게 가만이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자기 몸으로 제 다리를 휘감으면서 다리 사이를 미끄러지듯이 지나갔습니다. 저는 제 눈 앞에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 일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좀더 용기가 생기자 고양이는 아예 제 다리를 그 몸으로 감싼 채 가만히 붙어 섰습니다. 제가 살짝 몸에 손을 대자 처음에는 움찔 하였지만 이내 이것도 즐기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로 이것이 저와 까칠이의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고양이의 까칠함을 잘 알고 있는 그 동네 사람들은 이 모습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습니다. 고양이 속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슨 케미가 일어난 것이 분명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처럼은 보통 이렇게 많이곧 정도를 나타내는 부사로 이해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고 높음을 강조하는 말이라 여겨집니다. 성경 원문에 이처럼에 해당하는 단어의 또 다른 일반적인 뜻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in this manner)”입니다. 이 뜻으로 보자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되 하나님의 방식으로사랑하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말을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이게 항상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만을 놓고 보면 이것은 마치 브레이크도 핸들도 없는 엔진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로 어떻게 튈지 예측할 수 없는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물건입니다. 이런 글이 생각이 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밤(night)과 술(alcohol)과 사랑(love)이다.” 참 맞는 말입니다. 그냥 사랑은 자주 밤이나 술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고 혼미하게 만들어 결국은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일으킵니다. “불타는 금요일 밤을 더욱 뜨겁게 태우는 기름과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그냥 많이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사랑하십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0절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켜 진리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자들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잘 받되,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사랑하셨는지를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저와 까칠한 고양이 사이에 미묘한 케미가 생긴 것은 제가 그를 위해 오랫동안 먹이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집 없는 고양이에게 먹을 것보다 더 간절히 필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그렇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제가 믿기에 그것은 은혜와 진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야말로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순전한 은혜와 진리이십니다. 요한복음 1: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4절은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담은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단에 속아서 죄에 빠진 우리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영혼의 양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위해 주신 먹이이십니다.

 

사랑에는 항상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있습니다. 사랑은 받을 자가 그 사랑을 받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떠있는 해가 빛을 발산하지만, 그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물체가 없다면 태양빛은 그저 어둠 속을 달리다가 공허하게 사라질 뿐입니다. 하지만 이 빛이 땅에 닿으면 세상이 밝아지고 그 온기로 인해 온갖 신비로운 생명의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사랑 또한 저를 믿는 자곧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허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떡을 받아 먹는 자에게서 실제로 일어나는 케미입니다. 그리고 이 케미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을 먹을 때만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요? 전혀 없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리가 아닌 것에 속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진리의 사랑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통한 사랑입니다. 오직 이 예수님 안에서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영혼에 전해지며, 역사하며,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합니다. 영생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맺은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가지 선물을 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독생자 예수님이며 다른 하나는 영생입니다. 전자는 구원자이며, 후자는 구원입니다. 하지만 이 선물은 사실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구주 되신 예수님 안에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구원이 아니라 구원자입니다. 그리고 오직 구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만이 주님 안에 있는 구원 곧 영생을 얻게 됩니다.

 

제가 까칠한 고양이를 경험하고 심하게 놀란 것은 그 고양이가 저에 대해 어떤 믿음 같은 것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고양이가 저한테 원했던 것은 단순히 먹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는 제게 다가와서 자기 몸을 비벼대고 저의 손길을 즐겼습니다. 까칠한 고양이가 정말 원했던 것이 내가 주는 먹이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고양이의 눈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그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까칠한 고양이를 만났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 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먹이를 주기 시작한지 1년이 넘어서였습니다.

 

영생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사귄다또는 친해진다는 뜻입니다. 제가 고양이와 사귀게 된 것은 먹이를 통해서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몸을 우리에게 산 떡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매일 먹고 마시다 보면, 문득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신실하게 이 떡을 먹이시는 참 하나님 곧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눈을 들어 이 하나님을 보게 되며, 이 하나님과 눈을 맞추고 교감하며, 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이처럼하시는 사랑, 진리의 사랑, 곧 독생자 예수님을 통한 사랑은 우리를 당연히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참 하나님을 알게 하며, 이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하게 합니다.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의 양식을 매일 먹음으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더 깊이 하나님을 알고 사귀어 영생에 이르는 축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