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배 받으실 왕 예수님
마태복음 2:1-12
오늘 말씀은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한 동방의 박사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 말씀의 키워드는 “경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경배하다”라는 말은 엎드려 절하는 것을 말하며, 흔히 “예배”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예배에 관한 목사님들의 설교들을 읽어보면, 올바른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는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한 해결책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예배와 삶을 분리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나 찬양 집회 같은 행사에서만 예배를 드릴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매일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맞는 말씀이지만 사실 이것은 본질적인 해결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예배와 삶의 분리”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과 나의 분리”입니다. 따라서 예배 회복의 본질적인 해결책은 “나의 경배를 받으시는 그 분 곧 하나님을 나로부터 분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나의 삶 전체가 이 아버지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서 동방으로부터 긴 여행을 하여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길고 험난한 여행을 한 목적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아 그에게 경배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는 우리 인생 여정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삶이란 “경배할 분을 찾고 만나서 경배를 드리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배나 예배라는 개념은 단순히 크리스천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아이돌 (idol)”이라는 말이 아주 흔하게 사용됩니다. 이것은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스타들을 신적인 위치로 높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아이돌에 대한 팬들의 열광과 헌신은 신앙인들의 “예배”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연예인들뿐 아니라 트럼프나 푸틴 같은 마초 맨(macho man)들 주변에도 이와 같이 열광적인 추종자들이 많이 모여듭니다. 어떤 모양이든 “경배할 왕”을 발견한 사람들의 삶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삶과는 사뭇 다릅니다. “경배할 왕”이 있다는 자체로 삶이 충분히 즐겁고, 흥분되고,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본래 “예배하는 자”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의 경배를 받으실 왕”으로 주셨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이 죄인 된 우리가 그 죄로부터의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아이돌 곧 우상은 일종의 “허수아비” 또는 “꼭두각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허수아비 뒤에는 누가 있을까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왕이 되어서 나의 정욕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란 이런 나의 욕심을 만족시켜줄 만한 거짓 왕들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3:5절은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하고, 에베소서5:5절은 “탐하는 자”를 “우상 숭배자”라고 부릅니다. 내가 왕이 되어서 나의 탐심대로 살아가는 것이 곧 “우상 숭배”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경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를 위해 먼저 나의 탐욕을 회개하고, 나 자신이 그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목도하듯이 왕의 자리를 포기하고 여기에서 내려오는 것은 “피눈물 나는” 고통을 수반하는 일입니다.
유대에 도착한 박사들은 예루살렘의 헤롯왕에게로 가서 말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아마도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이시니 당연히 왕궁에서 태어나셨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늘의 별을 따라 인도함을 받는 대신, 잠시 자신들의 상식을 따라서 가다가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말을 들은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 사람들이 소동했습니다. 소동했다는 말은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였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의 왕”이란 사실 “다윗의 자손,” “구원자,” “메시아” 등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말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왕이 탄생했다는 소식은 이들에게 기쁘고 반가운 소식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헤롯왕은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이 갑작스러운 소식에 동요했습니다. 이는 이들이 모두 자신이 왕이 되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참 왕 되신 구주를 맞이하고 경배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 대하여 또는 누군가를 위하여 어떤 행위를 합니다. 친구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기도 하고, 동생의 생일을 축하하기도 하며, 훌륭한 분들을 존경하기도 하고, 부모님을 위해 심부름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언뜻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상대하는 여러 대상들 중 한 분이시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우리가 행하는 여러 행위들 중 하나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배” 또는 “예배”는 이런 다른 행위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 다른 점이란 우리의 다른 행위들이 “내 밖에 있는” 이들에 대해 하는 것들인 반면, 예배는 “내 안에 계신” 이에 대한 행위라는 사실입니다. 예배란 “내 안에 있는 분에게 온전히 순복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온전한 예배의 첫째 조건이란, 경배를 받으실 그 분을 내 속의 가장 깊은 곳 또는 높은 곳, 곧 “보좌”에 모시는 것입니다. 경배를 받으실 분을 밖에 세워두고는 결코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경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경배를 받으실 왕으로 내 깊은 속의 보좌에 앉으실 때, 주님은 “나보다 더 나 된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생애의 많은 날들을 전쟁터에서 보낸 군인이었지만 그는 또한 유능하고 부지런한 정치가이며 행정가였습니다.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하고, 학교를 세우고, 산업을 부흥시키고, 도시를 정비하였습니다. 유럽 전역을 지배하는 황제였지만, 궁중 무도회에서 귀부인들과 시시덕거리며 시간을 허비하는 따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잠자는 시간조차 아까워할 정도로 지독하게 일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나폴레옹과 함께 일하는 비서들, 참모들, 장군들은 극심하게 피곤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비서인 메느바르는 나폴레옹의 입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정책들을 구술하고 정리하느라 밤을 새우는 일이 허다하였다고 합니다. 또 랫쁘라는 나폴레옹 휘하의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일을 참고 견디려면 강철과 같은 육체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주위 사람들의 불평에 대해 나폴레옹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인간 중에서 노예보다 더 비참한 사람이다. 나의 주인은 냉혹하고 무정하다. 그리고 이 주인이란 사물 본연의 당연한 도리이다.” 이 말은 나폴레옹이 어떻게 그의 짧은 생애 동안에 그렇게 많은 일들을 했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그의 속에는 “나보다 더 나 된 주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경배하는 자는 주님께 대하여 적어도 나폴레옹 이상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경배 받으시는 예수님의 자리는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는 내 안에 있는 보좌이며, 나보다 더 나 되신 왕이 되셔서 나의 순종과 경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이끌지라도, 여전히 내 안에 계신 주님만을 바라보며 이 주님을 순종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우리를 경배 받으실 아기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에서 동방 박사들을 인도한 것은 하늘의 별과 미가 선지자의 말씀(미가 5:2)입니다. 별은 무엇일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굳이 추론을 해보자면 “깨끗한 양심”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별 자체가 깨끗한 양심을 상징한다기보다는, 동방 박사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만큼 깨끗한 양심 또는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선한 양심만으로는 예수님을 만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합니다. 곧 선한 양심과 말씀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또는 주님을 우리 속에 모셔 들이는 인도자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디모데전서 1:19절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고하며, 3:9절에 감독의 직분을 맡을 사람의 자격으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를 언급합니다. 또 마태복음 5:8절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십니다.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메시아의 별은 항상 하늘에 떠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깨끗하고 선한 양심을 가진 자만이 그 별을 보고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주 예수님을 증거하는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오직 그 말씀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만이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고 경배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서기관들의 말을 들은 동방 박사들은 마침내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다다랐습니다. 10절에는 그들이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서 계신 집으로 들어가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준비한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을 왕으로 경배하는 자들이 누리는 기쁨과 평안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의 기쁨과 평안은 헤롯왕의 두려움과 좋은 대조가 됩니다. 예수님은 경배를 받으실 왕이시지만 어린 아기로 이 땅에 오셔서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또 아기는 장차 세상의 죄를 다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왕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하시고 온유하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렵고 무서운 복종이 아니라,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진정한 경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이며 참된 구원입니다. 평화의 왕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께 경배하는 것이 “행복한 삶”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행복한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행복은 결코 빼앗을 수 없는 행복입니다. 이는 나의 경배를 받으시는 왕께서 다른 곳이 아닌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애는 경배할 왕을 찾아 나선 긴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착하고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말씀의 믿고 의지할 때, 우리 가운데 임하신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예배드리며 그 안에 있는 평강과 기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평강의 왕 예수님께서 내 안에 온전히 거하심으로, 참된 예배가 회복되는 축복된 성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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