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여인 라합 – 생명으로 생명을 얻다
여호수아 2장
기독교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구원”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보존한다”기보다는 “생명을 얻는다”에 더 가깝습니다. 물론 이 생명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구원이 나와 전혀 상관이 없이 일어나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 하십니다 (누가복음 17:33). 이 말씀을 생각하면, 구원이란 “생명으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고 대신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목숨”이란 실상은 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우리의 유한한 생명 곧 죄와 죽음 아래 갇혀 있는 생명을 하나님께 포기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 곧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진정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비록 “자기 목숨”이 죽음 아래 갇힌 유한한 생명이지만 여전히 자신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매우 소중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비유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20대 청년의 나이에, 담배를 많이 피우던 때가 있었습니다. 군 시절에 시작된 흡연의 양이 점점 늘어나더니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할 때는 하루 한 갑이 넘게 담배를 피우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중독이 된 거죠. 애연가들은 거의 모든 상황에서 담배를 찾습니다. 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면서, 일을 하면서, 회의를 하면서, 화장실에 있을 때, 친구를 만날 때, 혼자 있을 때, 기쁜 일이 있을 때, 화나는 일이 있을 때…… 곧 애연가에게 담배란 삶의 모든 희로애락을 완성하는 필수적인 “생명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식사를 하고 나서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식사를 한 것 같지 않습니다. 커피를 마셔도 담배를 피우면서 마셔야 제 맛이 납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흡연은 몸에 매우 해롭습니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담배를 끊어야 합니다. 저는 몸도 좋지 않았고, 또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 냄새가 나는 것이 창피해서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담배 없는 삶을 생각하니 참으로 암담했습니다. 그만큼 흡연은 이미 제 생명의 일부가 된 것입니다. 저는 “건강한 삶”을 얻기 위해 이 생명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으로는 전혀 내키지가 않았습니다. 심지어, 담배 없이 건강한 삶을 사느니 차라리 마음껏 피우다 조금 일찍 죽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결국 담배를 끊고 건강한 생활로 돌아왔을 때는, 정말 많은 것이 기대 이상으로 너무나 좋게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그 때는 어떻게 살았을까?” “내가 계속 담배를 피웠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등을 생각하며 몸서리를 칩니다. 말하자면 생명을 버리고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주인공인 라합은 여리고 성에 사는 기생이었습니다. 그녀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잠입한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보호해주고 그들로부터 구원을 약속받았습니다. 이를 통해서 그녀와 그녀의 온 집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런 라합에 대해 히브리서 11:3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라합은 여호수아가 보낸 이스라엘 정탐군들을 평안히 (with peace) 영접하고 또 그들을 보호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입니다. 우선 이 정탐꾼들은 라합의 “적”이었습니다. 이 적들은 곧 자기 땅을 침입하고 자기 사람들을 죽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합은 이들을 “평안히” 영접하였습니다. 또 라합이 살고 있던 여리고 성은 당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고 합니다. 라합의 입장에서 여리고 성은 안전하고 믿을만한 피난처였습니다. 그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목숨을 보전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라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라합에게 여리고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돌무더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녀는 이미 그 성을 포기했습니다. 이러한 라합의 “기이한” 믿음의 행동으로 인해, 여리고 성의 많은 거민들 가운데 오직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합은 어떻게 해서 이런 믿음을 갖게 된 것일까요?
라합의 믿음은 물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의 11절 말씀에, 라합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의 하나님이시니라.” 라합이 아는 여호와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그 능력으로 지으시고 그 뜻대로 다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라합은 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영접하고, 순종했습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은 라합을 “여리고 성의 기생”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정체성(identity)이며 운명(fate)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여리고 성과 함께 살고 여리고 성과 함께 죽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라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라합은 자신의 정체성과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여리고 성”이 아니라 오직 “상천 하지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이해하고,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했습니다. 이것이 라합의 믿음입니다.
라합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선은 그녀의 마음 속에서 동족들을 배신한다는 비난의 목소리들이 들렸을 것입니다. 또 위협적인 적들을 앞에 두고 한참 긴장이 고조되어있는 여리고 성내에서 라합이 적들과 내통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그녀를 가만둘 리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녀와 그 가족들이 모두 돌에 맞아 죽을 것입니다. 그녀의 행동은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위험천만한 짓이었습니다. 하지만 라합은 자신의 생명을 “성 안”에서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을 “성 밖”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성 안”에 있는 생명을 포기하였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돌보는 대신, 정탐꾼들의 생명을 보호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믿음입니다. 저는 심지어 “담배”라는 작은 성벽을 넘어 “건강한 삶의 소망”을 보는데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냥 마음껏 피우다 죽자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라합에게 “여리고 성”은 생명 자체였을 것입니다. 거리를 오가는 낯익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성 안에 있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심지어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하나가 모두 그녀에게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다정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이 성내의 익숙하고 친근한 생명을 포기하고, 저 성 너머에 있는 “낯 선” 사람들과 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연약한 여인네 속에 어떻게 이런 믿음이 생길 수 있는지 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여호와 하나님이 라합에게 전혀 낯선 분은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9-11절에서 라합은 자신이 알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바다 속으로 길을 내신 것과 또 그 길을 막아선 나라들을 멸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미 주신 것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여 마음이 녹아 내리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라합은 이 하나님과 그 분의 뜻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높고 엄위하시며 어느 누구도 그 뜻을 거스를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 하나님을 피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생명의 길은 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의 자비하심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이 길을 걸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만 진리와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과 그 뜻 안에 거하며 거기에 깊이 뿌리를 내려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여리고 성내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쌓은 성벽 안에서 성문을 걸어 잠그고 이 하나님을 대적함으로써 멸망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돌로 쌓은 견고한 여리고 성이 “진리요 생명”이었습니다. 이 강한 성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또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이 성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성벽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무너짐과 함께 무너지고 멸망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생명”이라고 믿고 의지하는 것들이 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견고해 보일지라도 다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릴 것들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한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을 보호하고 무사히 성을 빠져나가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생명의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실 때,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의 생명을 지켜주기로 서약하게 하였습니다. 정탐꾼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걸어 맹세하였습니다. 그리고 라합의 집의 창문에 붉은 줄을 달아 내리도록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이 붉은 줄이 걸린 라합의 집에 머물러 있으면 그 생명을 보전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 붉은 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기 전날 밤 그들의 문설주에 뿌렸던 어린 양의 피를 연상시킵니다. 이 피를 보고 장자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천사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집을 심판하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또 이 붉은 줄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언약의 피를 상징합니다. 장차 주님께서 오실 때, 우리 속에 있는 이 어린 양의 피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붉은 줄이 성 밖으로 난 창에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붉은 줄을 보고 하나님의 군대는 라합을 알아보고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을 보호할 것입니다. 제가 직장 생활 초기에 열심히 즐기던 담배와 술을 어느 날 갑자기 끊자, 끊어지는 것이 술과 담배뿐이 아니었습니다. 이것들을 매개로 해서 맺어졌던 여러 관계들도 함께 끊어졌습니다. 술 한잔 하자고 찾아오던 친구들의 발길도 뜸해지고, 회사의 회식 자리에도 환영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러다가 외톨이가 되는 것이 아닌가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세상의 문이 조금씩 닫히는 동안, 제게 성문 밖으로 난 창이 열렸습니다. 성문 밖에서 생명의 소망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게 중요한 것은 이 창에 붉은 줄이 걸려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을 내 믿음의 집으로 초대하여 살리는 것입니다.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입니다. 이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운명적인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삶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그 이름을 듣기만 해도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는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놀랍게도 라합은 “인자하시고 진실하신 사랑”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리고 성내에 머물며 세상의 생명을 지키고자 몸부림을 치면, 하나님은 다만 두렵고 무서운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마음의 창을 열면 주님께서는 그 자애롭고 친절하신 얼굴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우리에게 놀라운 참 생명과 행복을 선물하십니다.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생명을 드려 생명을 얻는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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