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히브리서 11:6
신학(theology)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신학은 관찰이나 연구나 토론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knowledge of God)”을 추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옛날에는 하나님이 학문 또는 연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경배의 대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YAHWEH)”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이 거룩한 이름을 자신들의 부정한 입으로 부르기가 두려워서, 대신에 하나님을 “주님(Adonai)”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또 성경을 복제하는 서기관들은 글에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몸을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행한 후에 그 이름을 썼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을 연구하는 오늘날의 신학은 매우 받아들이기 어려운 행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신학자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그 이전의 신학자들과 달랐던 점, 그리고 “진정한 신학자”라고 여겨지는 까닭은 그가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믿음(believing)이 아닌 사유(reasoning)를 통해서, 곧 순수하게 그 사람이 가진 이성만으로 하나님께서 존재하심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사실 성경을 모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보다 쉽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역사에서 나타난 결과는 그 반대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하심”은 논쟁거리가 되고, 진화론이나 빅뱅 이론과 같이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는 거짓 사상들이 범람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신학은 “최고의 진리”로서의 권위를 잃고, “직업 목회자”를 양성하는 변두리 학문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지 또는 어떻게 “신학”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임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오직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나를 즐겁게 맞아주시며 그래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진정한 사랑의 교제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또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과 또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진리는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지탱해주는 두 개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 살아계시며, 전능하시며, 선하십니다. 나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의심하는 이유에 대해,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으시며 또 그들이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봐야 그것이 실재로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창조주 (Creator)”이신 하나님은 “피조물들(creatures)”과는 전혀 다른 존재 양식(mode of existence)을 가지십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계시며, 또 우리의 감각과 지각을 초월하여 계십니다. 이 하나님에 비해 “나의 경험”이란 참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작고 협소합니다. 마치 우주 전체와 티끌만한 먼지를 비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먼지가 우주를 볼 수 없다고 해서 우주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먼지의 “지각과 이해”가 이 우주를 담을 수 없을 뿐입니다. 이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대해서 디모데전서 6:16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또 시편 104:1,2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이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의 시야로부터 “감추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계십니다. 다만 우리의 감각과 지각을 초월하여 계실 뿐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의 얼굴을 빛 속에 감추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빛을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그러니 우리는 비록 “하나님”을 보고 경험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그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18-20절에는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과 나눈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하고 구합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허락하신 것과 금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얼굴”은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와 “일면식”도 없지만, 그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또 하나님의 선하심을 넘치도록 누리고 경험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사람들의 속에는 “지식에 대한 교만한 욕심”이 있습니다. 또 “악한 불신과 호기심”이 있습니다. 이 본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얕은 지식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그 살아계심을 불신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은밀한 비밀들을 캐내려고 합니다. 이런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고, 오히려 영원한 어둠 속에 갇히게 됩니다. 비록 보이지 않으시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름을 부르며, 그 은혜 속에 거해야 합니다. 항상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시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증거는 넘치고 넘칩니다. 로마서 1:20절 말씀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곧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들을 통해서 우리는 질서의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 아름다움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환경학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라고 부릅니다. 지구는 여러가지 면에서 생명들이 살기에 적합하도록 매우 복잡하고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장치들은 그것들 중 어느 하나만 고장이 나도 모든 생명체들이 멸절할 수 있는 매우 “신묘막측”한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지구와 태양의 거리, 지구의 자전과 공전 속도,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 달의 중력, 육지와 바다의 비율, 공기 중 산소와 탄소의 비율, 지구를 둘러싼 대기, 생물종들간의 공생과 섭식 관계 등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이 공중에 떠있는 거대한 땅덩어리가 수많은 생명체들의 살아있는 서식지로 숨을 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몸 또한 하나님의 창조를 선포하는 신비로운 증거들의 보고(treasury)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혼 속에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양심(conscience)”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호소하고 때로는 고소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법을 지키도록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증거는 너무나 많아서 아무도 “몰랐다”고 변명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눈을 가리고 아웅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요즘 대통령 탄핵 문제로 한국이 시끄럽습니다. 대통령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변명하고 우긴다는 기사들을 열어보면 거의 예외 없이 “범죄의 증거들이 차고 넘친다”고 하며 한탄을 하는 댓글들이 많이 올라옵니다. 아무리 증거들이 많아도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보려고도 하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그렇게 작정을 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진실한 증거가 산더미같이 많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증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5:8). 또 요한복음 3:20,2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진리의 빛으로 충만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청결하지 못한 마음이며, 빛 대신 어둠을 사랑하는 죄의 소욕입니다. 이 어둠 속에 갇혀있음으로 우리의 눈이 멀고, 우리의 마음이 둔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다고 떼를 쓰며 자기의 원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악된 사람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는 극복하기 어려운 넓고 깊은 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밝을수록 사람들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피할 수밖에 없으며, 또 사람들의 죄가 깊을수록 하나님께서는 더욱 그 거룩하신 얼굴을 가리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간격에도 불구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가장 “확실하고 은혜로우신 계시”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2). 또 사도 요한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요한1서 1:1,2).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시지만 자신을 겸손과 은혜로 감싸셨습니다. 그래서 죄인들과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죄를 가져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과 진정한 교통과 교제를 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알고 믿는 정도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아버지와 친밀한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속에 임한 예수님의 의로운 피와 거룩한 영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를 위한 일종의 “송수신기(transceiver)”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을 통해서, 그 동안 끊어져있던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에 대한 신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매우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성경을 통해 선포되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 만물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세상 역사를 통해서 증거되는 하나님께 대한 진리를 통해서 내 영혼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우리 속에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은 주님의 더 깊은 비밀을 드러내십니다. 곧 믿으면 하나님께 대해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있는 자는 더 많이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연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믿음과 경배를 받으실 분이십니다.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며, 이를 통해 주님과의 교제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속에 더욱 풍성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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