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
누가복음 5:1-11
오늘 말씀의 주제는 “부르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및 제자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부르심은 성경의 핵심 주제들 중 하나입니다. 이는 부르심이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정한 사람을 부르심으로써
사람들 속에 임하시며 또 그를 통해서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일을 하시고 뜻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어떤 일의 시작점에서 “부르심”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가장 크게는 성경 자체가 부르심으로 시작됩니다. 곧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을 찾아 부르시는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9). 또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으며,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사무엘을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신앙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우리 각자의 구원 또한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천사가 말합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우리 각자가 평생 동안 기억하며 그 의미를 반추해야 할 기념비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베드로를 만나시고 또 그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퍼져나가는 호숫가에서, 예수님께서 청아한 음성으로 그 앞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며 또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어부들이 그물을 씻는 모습은 마치 한 편의 시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부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고, 그에게 배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배 위에 앉으셔서 계속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묵묵히 예수님 곁에 서서 그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은 아침 햇살처럼 따스하게, 잔잔한 호수처럼 평화롭게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를 매우 잘 아시고 또 오랫동안 그를 만나실 계획을 하셨겠지만, 마치 오늘 처음 만나신 듯 무심히 그의 배에 오르셔서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졸지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곁에 서서 주님의 설교를 돕는 조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마치 이슬이 내리듯 조용히 베드로에게 임하셨습니다. 바람이 얼굴을 감싸듯이 잔잔하게 주님의 음성으로 베드로의 영혼을 감싸셨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등 뒤에 서 있는 베드로를 보시고, 미소를 지으시며, 속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동안 잘 있었느냐?”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이에 베드로는 대답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이 짧은 대화는 “주님의 부르심”에 관한 많은 의미들을 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부르심이 “듣는 자”에게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시자, 베드로의 마음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가 지난 밤에 경험했던 실패였습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새 그물질을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어부였습니다. 베드로는 한마디로 말해서 “실패에 익숙한 전문가”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많이 잡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한가?”에 대한 매우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또 이를 철석같이 믿고 고집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어부도 아니고 목수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베드로는 이런 자신의 “전문가적 경험”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다” 하며 주님의 말씀에 화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 하십니다. 여기서 “깊은 곳”을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라고 할 것입니다. “얕은 곳”에서는 물 속이 빤히 들여다보입니다. 지나가는 물고기를 보고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물이 깊은 곳에서는 고기가 있는지 없는지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음파탐지기 같은 장비를 사용해야 합니다. 영적 세계는 참으로 “깊은 곳”이며 이곳에서 우리를 인도하는 유일한 빛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참으로 믿을만한 안내자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은 자의 첫째 조건은 “말씀을 잘 듣는 자”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라야 깊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거기서 고기를 잡거나 다른 일을 잘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깊은 곳 곧 영적 세계에서는 해박한 전문적 지식이나, 깊은 지혜나, 오랜 경험도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나의 “자랑스러운 성역”을 포기하고, 어린 아이처럼 겸손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간절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이에 순종해야 합니다. 오직 말씀을 듣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으며,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가 있으며, 하나님의 친밀하신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물에 잡힌 고기가 너무 많아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어부인 베드로조차 일생 한 번도 본적도 들은 적도 없었던 성공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 이것은 “전대미문의 기적”이라고 하기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일상”이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 일상을 아주 조금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 신비한 비밀을 살짝 드러내신 것입니다. 사실 “깊은 곳”은 왠지 좀 어두울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투명”해서 내 눈으로 볼 수 있어야 마음이 편하고 밝아집니다. 이런 우리에게 미지의 “영적 세계” 또는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어두운 복도를 걷는 듯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저는 약 30년 전에 당시 서울 용산에 있던 육군본부의 정보참모부에서 사병으로 군 생활을 했습니다. 제가 신병으로서 처음으로 선임병을 따라서 근무할 사무실에 가던 날이었습니다. 그 사무실은 연병장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풍채 좋은 건물 안에 있었습니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초병을 지나서, 방향을 서너 차례 바꾸며 긴 복도를 한참 걸어 들어갔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조명은 침침해지고 이에 따라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제 마음도 착잡해졌습니다. 마침내 막다른 곳에 이르니 또 다른 초병이 지키고 있는 문이 나타났습니다. 선임병이 문 옆에 붙은 번호판에 비밀번호를 누르자 문이 열리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검은색 가죽으로 피복한 육중한 문이 있었는데, 그 문을 밀고 들어가자 갑자기 환한 빛이 쏟아졌습니다. 2층 높이의 밝고 넓은 홀 안에서는 많은 수의 장교들이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으며, 사방의 벽면들은 거대한 크기의 지도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런 깊은 곳에 이렇게 “화려한 비밀 공간”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깊은 곳”은 “화려한 하나님의 세계”가 어둠 속에 숨겨져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바쁘게 일을 하는 곳이며, 온갖 좋은 일들이 끊임없이 계획되고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베드로전서 2: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본래 “어두운 데”에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그의 “기이한 빛” 속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세상에서의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우리를 “예수님 안에 있는 빛” 속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와 영광을 잘 모를 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세상에서 빛을 찾았습니다. 곧 하나님은 어두움이며 세상은 빛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빛을 어두움이라고 부르고, 어두움을 빛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사야 5:20). 하지만 예수님의 부르심 안에서 이것이 조금씩 바뀌는 것입니다. 곧 세상은 점점 어두워지며 하나님은 점점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영광스럽고 신비로운 빛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의 삶은 “절망”의 삶에서 “소망”의 삶으로 바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삶은 쉽게 말하면 “소망으로 시작하여 절망으로 끝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많은 물고기를 기대하며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결국 붕어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황과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절망”이 “소망”으로, 그리고 그 “소망”이 우리의 기대를 벗어나도록 영광스러운 “현실”로 바뀝니다. 이 소망 안에서 우리는 항상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그리고 영원한 미래를 바라보며 가슴 벅찬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수 없이 많은 물고기가 잡힌 그물을 붙들고 씨름을 하던 베드로는 문득 옆에 서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리며 간청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베드로가 발견한 것은 바로 “주 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 앞에서 서 있는 “죄인 된 자신”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이 한 배에 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베드로는 한시바삐 이 상황을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그는 마치 낚시에 걸린 물고기처럼 몸부림을 쳤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예수님 속에 있는 신비한 빛을 보고 베드로는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실상 한 배를 타고 있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모습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하고 축복되고 감격적인 광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 구주를 만난 것입니다. 이것은 어둠이 빛을 만난 것이며, 죽음이 생명을 만난 것이며, 영원한 저주가 영원한 축복을 만난 것입니다. 그것도 단 둘이서, 오갈 데도 없는 배 위에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베드로를 다독거리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예수님께서 “두려워 말라!” 하심은, 주님께서 베드로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며 또 앞으로 영원히 그와 함께 하실 것임을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주님께서 “두려워 말라!” 하심은, 이제 베드로에게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에게는 오직 예수님만 살아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신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생명 구원”입니다. 우리는 자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부르심 또는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참된 부르심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주님이 하고 싶은 일”입니다. 곧 주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고자 나를 부르시고, 빚으시고, 쓰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고기도 잘 잡지 못하는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부르시고 “네가 장차 사람을 취하리라” 말씀하십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십니다 (마태복음 4:19).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시겠다고 하십니다. “물고기도 못 잡는” 자신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부르심이 공허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6). 또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로마서 11:29).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시작하신 일을 그만두시거나 후회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의 때를 따라서 반드시 이루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하나님을 믿고 항상 그 “부르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우리에게 마치 “이름”과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우리의 육체를 따라 주어진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갈릴리 시골 사람”이거나, “실력 없는 어부”이거나, “소망 없는 소시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참 이름은 오직 “예수님의 부르심” 안에서만 발견됩니다. 그 이름은 영광스러운 이름이며, 소망스러운 이름이며,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하시는 이름입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부르심 안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며, 새로운 이름을 가지며, 새로운 사명인의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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