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
마가복음 2:23-28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 쓴 왕자와 거지(The Prince and the Pauper)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에드워드(Edward)는 모든 사람들의 축복 가운데 왕자로 태어났지만, 톰(Tom)은 심지어 가족들조차 그 탄생을 달가워하지 않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같은 날 태어난 이 둘은 같은 옷을 입고 있으면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똑 같았습니다. 에드워드는 궁중 밖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톰의 넝마 옷을 입고 궁을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왕자로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에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결국 궁으로 돌아와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왕위에 오릅니다. 한편 왕자 옷을 입은 톰은 궁중에서 왕자로서 생활을 하면서 바깥 세상과는 전혀 다른 궁중의 예식들을 조금씩 익혀나갑니다. 그리고 결국은 왕의 신하가 되어 행복하게 삽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과 나”의 이야기와 흡사합니다. 곧 하늘의 왕자님이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남루한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대신 죄로 더럽혀진 내게는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하얀 의의 예복을 입히셨습니다. 이 예복을 입고 나는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가며, 그 앞에 서며, 그 식탁에서 함께 먹고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화창한 가을날 아침,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늘 먹어도 배가 고픈 예수님의 젊은 제자들은 누렇게 익은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구약의 신명기 23:2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 그러나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 말지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정겹고 따뜻한 배려들로 가득합니다. 곡물을 키우느라 흘린 농부의 땀을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배고픈 이웃에 대해 너그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삭을 자르는 모습을 본 몇 명의 바리새인들은 이를 비난하며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이들이 제자들의 행동을 문제 삼은 것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출애굽기 20:8-11)에 따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법을 매우 엄밀하게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기는 날에는 “가난하고 배고픈” 사정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정없이 정죄의 칼날을 휘둘렀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법”을 사랑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고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예를 들어 제자들을 변호하십니다. 사무엘상 21장의 기록에 따르면, 다윗이 사울왕의 시기와 미움으로 인해 쫓겨다닐 때였습니다. 하루는 다윗이 배가 고픈 나머지 놉(Nob)이라는 곳에 있는 제사장 아비아달을 찾아가 그에게 먹을 것을 구하였습니다. 당장 수중에 먹을 것이 없었던 아비아달은 하나님께 드려졌다가 물린 떡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이 떡은 오직 제사장들 곧 아론의 자손들이 먹도록 규정되었지만 (레위기 24:9), 제사장 아비아달은 먹을 것이 몹시 필요한 다윗과 그의 친구들에게 그 떡을 준 것입니다. 다윗의 이야기를 하시고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당시 유대인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수 없이 많은 세세한 계명들을 만들었습니다. 주로 “해서는 안 될 일들”에 관한 것들인데, 예를 들어, 글자를 두 자 이상 쓰거나 지워서는 안되고 또 불을 켜거나 끄는 행위도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을 이런 복잡하고 까다로운 규정들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 안식일만큼은 아예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고 죽은 듯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안식일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은 다만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 예수님의 생각을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경계하였습니다. 복음서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의 충돌은 단지 안식일에 관해서뿐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나 이방인과 같은 “죄인들”을 받아주시고 이들과 어울리시면서, 반면에 율법을 잘 지키며 금식과 기도와 십일조에 충실한 “경건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죄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좋은 일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법”을 무시하시고, “죄”를 조장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에게도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바울이 쓴 로마서를 읽어보면, 서로 평행을 이루며 달려가는 중요한 일련의 개념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불순종 – 죄 – 죽음 – 율법
순종 – 의 – 생명 – 성령
윗줄의 개념들은 첫 사람 아담과 이후의 모든 사람들이 겪게 되는 삶의 궤적을 설명합니다. 곧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죄를 짓고, 그 죄의 삯으로 죽음을 당하며, 또 일생 율법 아래 종(slave)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아래의 개념들은 둘째 아담인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삶을 설명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의에 이르고, 그 의는 생명을 가져오며, 이제 율법이 아닌 성령 안에서 자유자(free man) 또는 아들(son)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믿는 자의 삶과 믿지 않는 자의 삶이 서로 전혀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겹쳐지는 것이 없으니 혼란스러운 것도, 갈등할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문제가 있으며, 그 문제는 “율법”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크리스천들이 “율법”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순종 – 의 – 생명 – 성령”의 길을 따르는 대신, “순종 – 의 – 생명 – 율법”의 길을 고집합니다. 곧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계명을 따라 살면서 이를 통해 의와 생명을 얻고 유지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한 길이며, “없는” 길입니다. 이것은 다시 “불순종 – 죄 – 죽음 – 율법“의 삶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고린도전서 15:5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이 말씀에 따르면, 놀랍게도 율법은 “의의 권능”이 아니고 “죄의 권능”입니다. 율법은 사람들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이는 오늘 말씀에서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법을 가지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정죄한 것과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좋은 율법”을 이용하여 제자들을 “나쁜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야 말로 “사단의 역사”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단을 “참소하는 자(accuser)”라고 부릅니다 (요한계시록 12:10). 사단은 죄의 권능인 율법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서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고소합니다. 이런 사람들과 사단의 역사에 노출될 때, 우리는 율법을 무시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따라 사는 대신, 다시 “율법을 지키는 삶”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노예가 되어서 무거운 짐을 지고 두려움 속에 사는 것입니다.
이런 갈등을 겪을 때, 항상 우리 마음 속을 파고드는 끈질긴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요?” 이 질문은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치는 우리의 절망적인 몸부림”을 잘 나타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이 예수님 안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의인”입니다. 우리는 이미 죄를 벗어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거지의 옷을 벗고 왕자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마음”이 변해야, 곧 속이 변해야 그것이 진정한 변화이며, 이에 따라서 겉도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선은 우리의 “겉옷”이 변합니다. 죄인의 더러운 넝마를 벗어버리고 예수님께서 주신 “하얀 의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왕궁에서 “왕자”요 “공주”로 사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속에는 아직 변화되지 않은 “거지 근성”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겉과 속이 다른” 당황스러운 일들을 많기 겪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의 옷”을 벗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내면도 조금씩 변화하게 됩니다. 겉옷에 걸맞은 “고귀하고 위엄 있는 성품”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지키려는 “율법”의 본색이란 무엇일까요? 사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소설 “왕자와 거지”에 나오는 톰은 거지였습니다. 이 소설에 따르면 당시에 톰이 살던 도시 런던에서는 구걸을 규제하는 엄격한 규칙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거지였던 톰이 이 규칙들을 잘 지켰다고 해서 그가 왕자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착한 거지”가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에서는 이런 법들을 가리켜 “의문(written codes)”라고 하며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모양만 내게 할 뿐이며, 거룩한 삶을 사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2:23). 이런 것들은 다만 더러운 넝마를 입는 것과 같습니다 (이사야 64:6). 하나님께는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이 참혹한 더러움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지키려는 법들이 사실은 다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죄인으로써 계명을 잘 지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라야 왕궁에 거하면서 고상한 궁정의 예법들을 배우고 익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하십니다. 골로새서 2장에서는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장하는 비결로 “머리 되신 예수님께 붙어있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머리 되신 예수님과 한 몸이 되게 하시며, 주님의 지체로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우리도 예수님처럼 변화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법”을 존중하며 이를 신성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법을 머리 되신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켰습니다. 하나님을 내쫓았습니다. 법을 집행하는 “왕”의 자리에 하나님 대신 사단이 앉았습니다. 그러자 그 법은 생명이 없는 차갑고 무정한 법이 되었으며, 심지어 생명을 죽이는 법이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왕의 자리를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주요 머리가 되실 때, 주님 자신이 생명의 법이 되십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가르치시며,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 길은 사람이 상상할 수 없이 높고 고상하며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길입니다.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법” 곧 육체로 안식일 법을 지켰으며, 반면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 곧 성령으로 머리 되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법을 지켰습니다. “눈에 보이는 법”은 모양을 낼 수 있지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은 모양을 낼 수 없지만 우리에게 생명을 주며 하나님의 나라의 온갖 보화를 누리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가져가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것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그 안에서 살게 하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왕궁에 거하는 왕자와 공주가 된 것과 그 안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이 은혜 안에 거할 때 우리 속에 “하나님의 법”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우리 각자가 머리 되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이 믿음의 싸움을 끝까지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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