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요한복음 11:1-16)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7. 4. 10. 03:59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요한복음 11:1-16

 

요한복음 11장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의 앞부분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생명의 책(Book of Life)’이지만, 그 안에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며, 또 죽음이라는 주제가 매우 자유롭게 다뤄집니다. 심지어 기독교의 대표적인 상징이 죽음을 의미하는 십자가입니다. 성경에서 죽음이 이렇게 쉽게 다뤄지는 이유는 이것이 더 이상 무섭거나 무거운 주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하시며 또 내가 깨우러 간다고 하십니다.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께 죽음이란 잠시 쉬다가 깨어나는 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은유적인표현이 아니고,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진리를 우리에게 증거하십니다.

 

베다니라는 유대 마을에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 그리고 그들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라비인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이 누이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이 소식을 듣기만 하면 곧 오셔서 나사로의 병을 치료해 주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후에도 이틀을 더 계신 곳에 머무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병든 나사로는 죽고 말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죽음이 이 삼 남매의 행복한 가정을 어둠과 절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들이 믿고 의지하던 예수님도 죽음 앞에서는 위로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오라비를 죽음에 빼앗기고 나서 마리아와 마르다는 뼈가 시리도록 깊은 외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무덤 속에 누운 나사로와 마찬가지로, 마르다와 마리아의 영혼 또한 한 줄기 빛도 들지 않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혀 누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 아이고 큰일났구나!” 하며 근심을 하시거나 빨리 가자!” 하며 서두르시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하고 있는 이 다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들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사랑은 여전히 유효하며, 나사로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으며,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의 역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기 전에 가셔서 그를 낫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심으로써 나사로가 죽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이에 대해 1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곧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서였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제한적이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가 죽기 전에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를 치료해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21절과 32절에서 각각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37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을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이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병을 치료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믿음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이제 너무 늦었습니다. 나사로가 그만 죽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믿음도 끝났습니다. “사랑도 이제 별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무지막지한 죽음앞에서 슬픔을 억누른 채 조용히 숨을 죽이고 흐느껴 우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거기 계시지 아니한 것을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거의 내가 거기 있지 않아서 나사로가 죽게 된 것을 기뻐한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기뻐하신 것은, 이제 제자들의 이 제한적인믿음의 경계를 죽음 너머로 넓히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나 제자들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을 믿지만 우리의 믿음은 자주 죽음이라는 한계에 부딪혀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합니다. “죽음이 꼭 나사로의 죽음처럼 숨이 끊어지고 무덤에 묻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죽음이란 마지노선(Maginot Line), 곧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한계선,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방어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선이 무너지면 내 인생도 망할 것 같은 그런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직장이나, 건강이나, 가족과 같이 우리의 삶에 소중한 것들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은 마감일을 넘기거나, 주차 위반 딱지를 받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기대를 실망시키는 사소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크고 작은 문제들은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정말 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발 이런 문제들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하며, 혹 생기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마지노선을 넘지 않도록 더욱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 눈으로 보기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우리는 주님을 계속 믿기를 포기하고, 대신에 만일 주님께서 OO하셨더라면~” 하며 애석해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자주 이런 한계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의 한계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사실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한계적인 믿음으로는, 우리가 아무리 간절히 예수님을 찾고 부른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결국 죽음의 두려움일뿐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예수님 조차 이 죽음의 한계 아래 갇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는 예수님이라도 어쩌지 못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비극적인 신앙 생활입니다. 늘 지뢰밭을 걷는 듯한 조마조마한 삶입니다. 작은 문제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삶입니다. 사실은 오늘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유대 땅으로 가시려고 하자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이들은 며칠 전에 유대 땅에서 나쁜 경험을 했습니다. 어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0:31). 이 일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 깊은 두려움을 심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유대 땅은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이들의 몸은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죽음의 그늘이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대신, 두려움의 소리를 듣고 주저앉았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것을 그냥 두고 보실 리가 만무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한계적인 믿음을 고치시고, 온전한 믿음을 갖게 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까요? 우리가 약한 육체의 생명을 의지하여 사는 대신, 예수님 안에 있는 참 생명을 의지하여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허름한 건물을 부수고 그 자리에 견고한 새 건물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새 건물을 짓기 위해서 건축자가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이미 있는 낡은 건물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땅 위에 있는 모든 약한 것들을 남김없이 부수고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 건물의 기둥들을 모두 단단한 기초 위에 세워야 합니다. 만일 아까운 마음에 낡은 건물의 일부라도 남긴다면 그 위에 견고한 새 집을 건축할 수 없습니다. 새로 지은 집이 아무리 튼튼하더라도, 그 낡은 부문이 무너져 내리면서 건물 전체가 내려앉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생명처럼 붙들고 있는 모든 낡은 것들을 다 무너뜨리십니다. 하나도 남김이 없이 철저히 무너뜨리십니다. 그것이 나자로가 겪은 죽음입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의 다른 것들은 절대로 우리의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9,10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여기서 세상의 빛이란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4절은 예수님을 가리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말씀하며, 9:5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하십니다. 반면에 이란 이 빛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빛 대신 죽음의 두려움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어둠 속에 다닐 때 사람이 넘어지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곧 죽음을 경험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혹시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나사로는 죽고, 그의 자매들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 죽음의 고통을 떠안았습니다. 또 예수님의 제자들은 죽음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유대 땅으로 가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모두 낡은 옛 사람을 무너뜨리는죽음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과정에서 예수님 안에서 있는 생명의 빛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야말로 진정한 생명을 누리며, 이에 따라서 어두움이 조금도 없는 빛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만 이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병이 죽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영광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에게 칭찬 받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찬송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영광을 얻으실까요?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으시는 방법은 한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앞으로는 홍해 바다와 뒤로는 맹렬히 추격하는 바로의 애굽 군대 사이에 갇혀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라” (출애굽기 14:17) 하시고 또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14:13)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구원을 행하심으로써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은 우리의 삶을 개선하거나 일상에서 겪는 문제들을 해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구원으로는 하나님께 전혀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는 상태곧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도착하신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제로였습니다.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늦게 오신 것은 그때야 돼서야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을 행하실 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로부터 영광과 찬송을 받으십니다.

 

오늘 이야기의 소재는 나사로의 죽음이지만, 그 주제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내 그의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또 그들에게 죽음의 슬픔을 압도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은 또 우리 각자에게 나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곧 나의 이 땅에서의 삶의 여정을 요약하면, 죽음이나 혹은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누리며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자주 겪다 보면 더 이상 죽음이 죽음이 아니게 됩니다. “부활의 믿음이 습관이 됩니다. 나와 내 사랑하는 자들의 형편이 어떠하든 내내 예수님의 생명의 빛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을 보며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 각자가 누리는 행복한 삶입니다. 이 행복한 삶을 위해 오직 예수님께서 나의 생명의 빛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