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이요 생명 되신 예수님
요한복음 11:17-44
성경의 여러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을 볼 수 있습니다. 홍해를 가르셔서 건너게도 하시고, 광야의 바위에서 샘물을 내셔서 마시게도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는 말씀은 창세기 1장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에서 “유”를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곧 진정한 의미에서의 창조(creation)입니다.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은 창조보다는 “구원”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재창조(re-creation)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있는 것을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좀 더 낫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입니다. 곧 “죽음”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을 요약하면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창조의 능력, 그리고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께 대하여 로마서 4:17절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유대 땅으로 건너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 지 4일이나 지난 후였습니다. 39절에 보면 무덤에 묻힌 나사로의 몸에서 냄새가 날 정도였습니다. 완전히 죽은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나사로라는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나사로를 깨우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말을 듣자, 마리아는 집에 앉아있고 마르다는 나가서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다음은 마르다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대화입니다.
마르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님: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마르다에게서 예수님을 믿고 존경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위축되고 쇠약해졌습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믿음의 고백을 하지만, 그 고백이 왠지 공허하고 슬프게 들립니다. 어찌 보면 이 마르다의 모습이야말로 많은 믿는 자들의 연약함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주 되신 예수님께서 앞에 계시지만, 마음 속은 무거운 죽음의 그림자로 짓눌려 고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무거운 바윗돌을 옮기시려 하시지만, 정작 자신은 포기하고 “입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과거형”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말했습니다. 그녀는 한 때 예수님을 믿었지만 이제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자주 지난날 있었던 나의 실수들 또는 “하나님의” 실수들을 돌아보면서 회한에 잠깁니다. 그리고 지금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합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또 “미래형”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는 부활을 먼 미래의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너무 멀리 있고 막연한 것이라서, 내 영혼을 밝히는 “소망의 빛”이 되지 못했습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또 “다른 사람을 통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녀는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는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또 “상식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그녀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시죠?”라는 질문을 받으면, 마르다는 거의 자동적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이 대답이 의미하는 바를 깊이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마르다를 붙드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나는 OO이라” 하시며 자신을 소개하시는 말씀들이 여러 번 나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생명의 떡이라” (6:35), “나는 세상의 빛이라” (8:12), “나는 선한 목자라” (10:11) 하십니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누구신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들은 예수님과 “그를 믿는 자”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과 나 사이의 “구원의 관계(saving relationships)”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 관계가 내게 구원으로 작용하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다만 예수님께서 OO이심을 믿는 것뿐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게 OO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나를 믿으면 내가 너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고 생명을 주겠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냥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항상 “부활이요 생명”이시며, 내가 주님을 믿는 순간 예수님께서 이미 “나의 부활”이요 “나의 생명”이 되심을 의미합니다. 나의 믿음과 예수님의 구원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믿음이 곧 예수님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사람들은 여전히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 통분하시고 괴로워하시며 물으셨습니다. “그를 어디 두었느냐?”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어디 묻혀 있는지를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그를 어디 두었느냐?”고 물으시는 것일까요? 이는 마르다가 죽은 오라비를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께 들고 나오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같이 “구원의 소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이거나 고질적인 문제들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을 때,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깊은 곳에 숨겨두고 혼자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님께 들고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런 문제들을 예수님께서 알아서 우리 몰래 해결해주시는 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그를 어디 두었느냐?” 하고 물으심으로 우리가 그런 문제들을 주님 앞에 믿음으로 들고 나오도록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찾으시며 “그를 어디 두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전능하신 구원자”이심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어려운 문제를 겪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물어보지 못합니다.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이 더 마음을 아프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주 예수님께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사흘이 되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찾으십니다. “그를 어디 두었느냐?”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 사랑하시는 자가 무덤 속에서 썩어가고 있는 것을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 영혼이 문제 속에 갇혀 신음하고 있는 것을 두고 보시지 않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찾으십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려야 하는 이유는 나사로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고 애통해야 하는 이유는 이 구원의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애타게 우리를 찾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숨김 없이 이 주님께 드러내야 합니다.
나사로의 무덤에 이르신 예수님께서는 “돌을 옮겨 놓으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정작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자 다시 죽음의 권세에 압도되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어쩌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 앞에 놓인 것은 죽어서 썩어가는 나사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놓인 것은 그를 통해서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는 정말 강합니다. 하지만 이 권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죽음의 권세가 깊고 어두울수록 하나님의 영광은 높고 찬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이 영광의 소망으로 죽음의 절망을 이기도록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를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심으로 그 믿음에 응답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것은 하나님과 믿는 자 사이에 세워진 바 “어길 수 없는 계약”입니다. 이 약속은 우리에게 죽음보다 더 확실한 진리입니다. 우리가 이 약속을 믿으면, 우리는 돌을 옮기고 죽음을 대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없다고 부인하며 피하기만 했던 깊은 영혼의 문제들을 직면할 수 있습니다.
돌을 옮기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나이다.” 이렇게 기도를 하신 후 주님께서 무덤을 향하여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자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일어나 나왔습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자가 주님의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깨어났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사건이 세 번 나옵니다. 나인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향하여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7:14). 또 야이로의 죽은 딸을 향하여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5:41). 또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 외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을 각각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이들이 듣고 죽음에서 깨어났습니다.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요한복음 5:25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을 부르신다는 것, 또 죽은 자들이 그 음성을 듣는다는 것, 그리고 그 음성을 들을 때 살아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일입니다. 마치 태초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심으로 어둠 속에서 빛이 생긴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일어나라” 하실 때 죽은 자에게 생명이 임합니다. 저는 이따금 깊은 어둠과 고요 속에 잠겨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누워있는 “나”라는 존재가 있을 뿐입니다. 아마 제가 무덤 속에 들어가면 이런 상태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세상의 소리는 멈추고, 그 깊은 어둠과 고요 속에서 제게 들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일어나라!” 이 말씀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제 부활과 생명으로 내게 임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의 어떤 소리도 일으킬 수 없었던 나를, 이 말씀은 일으키시고 강건하게 하십니다. 내 모든 세포를 생명의 능력으로 채우며 내 영혼을 빛으로 밝힙니다. 세상에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앞에 잠에 깨어난 내가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구주이십니다. 주님의 소리를 듣고 이 말씀을 믿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부활이 되시고 생명이 되십니다. 이 생명은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는 생명이며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의 소망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각자가 고요한 가운데 말씀으로 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둠과 두려움에서 깨어나 예수님 안에서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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