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
요한복음 13:1-17
성경에는 “구원”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굳이 “구원”이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았더라도,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구원”은 성경의 중심 주제이며, 또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해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를 “통째로” 잘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10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그들의 병을 치료해주시기를 구하며, 예수님께서 이들을 모두 치료해주십니다. 그런데 이들 중 오직 한 명만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십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10명의 문둥병자들이 모두 그들의 불치병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직 한 사람 곧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에게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구원들은 여러 가지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병의 치료, 노예 생활로부터의 해방, 죄의 용서, 악한 영들로부터의 놓임, 죽음에서의 부활, 궁핍함의 채워짐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의 가장 궁극적인 의미는 “관계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구원이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회복된 것이며 또 이를 통해서 “나와 이웃들 사이의 관계”도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원수”였으나 이제는 하나님과 화해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것은 우리에게 좀 실망스러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구원들 예컨대 병의 치료나 궁핍함의 채워짐에 비해서 “관계의 회복”이란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으며 또 당장 손에 잡히는 유익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이 나에게 큰 관심 사항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핵심은 “관계의 회복”입니다. 구원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없이는, 다른 구원들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으시려고 하자 베드로는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하며 완강히 거부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베드로가 듣기에는 매우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자신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예수님과 가까운 사람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베드로가 예수님의 “최측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관계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생각이 달랐습니다. 전혀 달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베드로의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이어서, 심지어 그럴 것이면 “네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십니다. 말하자면 베드로가 “최측근”이기는커녕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 밖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또한 자주 베드로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의미를 오해하고 이를 “통째로” 누리지 못합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특히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이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세상에서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일들을 하셨지만 그 모든 일들의 결과물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1절에 나오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야말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며, 주님의 사역을 통해서 거두신 열매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는 곧 세상을 떠나시며, 이제 그들만 세상에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 사람들은 무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정도로 포악했으며 또 그만큼 권세도 막강했습니다. 이런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제자들이 실상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선 그들은 “자기 사람들” 곧 예수님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절대적인 소유권”를 가리킵니다.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입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세상과 이혼하고 예수님과 혼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이제 제자들에 대해 아무런 권세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에 대한 “권리”는 오직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이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끝까지”라는 말의 의미는 “마지막까지”라기보다는 “최고로” 또는 “지극하게”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의 포대기”로 완전히 둘러싸여있으며 철저히 보호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3절 말씀에 따르면, 그들의 목자 되신 예수님은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 되십니다.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왕의 왕께서 그들을 온전히 소유하시며 지극한 사랑으로 보호하시며 돌보십니다. 이것이 바로 이것이 제자들이 처한 “영적인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장 불쌍한 자”가 아니라 “가장 행복한 자”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저녁을 드시던 중 예수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발을 씻기는 일은 종들이 그들의 주인을 위해서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위해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을 하나 둘 씻기시고 이제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영문을 모르고 당혹스러운 눈으로 예수님께 발을 맡기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베드로는 발을 뒤로 빼며 물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후에 이 일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완강히 거부하였습니다.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이 말씀에 충격을 받은 베드로는 이제 반대로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주세요” 하며 달려들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사람들은 보통 관계를 맺을 때 “더러운 발”을 내밀지 않습니다. 오히려 냄새 나는 발은 깊은 곳에 숨겨두고, 가장 깨끗하고 예쁜 부분만을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곧 “약점”은 감추고 “강점”을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그래야만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이에 따라서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관계를 맺는 일반적인 방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이런 세상의 방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가장 더러운 부분”을 드러내고 내미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것을 씻어주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나의 강점”을 통해서 맺어진 관계가 더 튼튼하고 오래 유지될 것처럼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강점”을 통해 맺어진 관계는 약하고 쉽게 끊어집니다. 베드로의 강점은 예수님께 대한 “충성심”이었습니다. 그는 이 자신의 강점을 기초로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충성심”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약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함께 죽을 수도 있다고 장담을 했지만, 정작 죽음의 두려움에 직면하자 그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충성심”을 기초로 그와 관계를 맺으셨다면, 그 관계는 금방 깨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충성심”으로 관계를 맺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더러운 발”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견인차(towing car)가 있습니다. 견인차가 고장 난 다른 차를 견인하기 위해서는 두 차 사이를 연결해야 합니다. 이 때 차의 약한 부분에 고리를 걸어서는 고장이 난 무거운 차를 끌고 갈 수 없습니다. 약한 부분에 고리를 걸면, 차가 끌려가는 대신 그 약한 부분이 부서지고 뜯겨져 나가서 차를 더 심하게 망가뜨릴 뿐입니다. 차를 끌고 가기 위해서는 그 차의 몸체에 고리를 연결하거나 아예 “통째로" 들어서 업어야 합니다. 베드로를 고장 난 차에 비유한다면, 그의 “충성심”은 차 머리에 붙은 “자랑스러운” 장식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신의 충성심을 믿고 거기에 고리를 걸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자랑스러운” 충성심이 약해서 곧 부서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와 관계를 맺고 그를 끌고 가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에게 충성을 요구하시는 대신 그의 “더러운 발”을 내밀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더러운 발”은 바로 “베드로 자신”입니다. 고장 난 차와 같이 움직일 수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 베드로”입니다. 그것은 “강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래서 오직 주님의 이끄심을 바랄 수밖에 없는 그런 “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베드로를 죽음의 골짜기로, 그리고 부활의 영광으로 견인해야 합니다. 이 험난하고 치열한 길을 가기 위해서, 그와 끊어질 수 없는 튼튼한 관계를 맺기 원하셨습니다. 서로 보기 좋은 것들만 나누면서 사치하고 희희낙락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더러운 발”을 내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좋은 관계를 맺고 성공하기 위해서 “스펙(spec)”을 쌓습니다. 이러한 “장점들”을 연결고리로 하여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더 높은 수준의 성공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더러운 발”을 숨긴 채, 내가 아닌 “스펙들”로 나의 겉모습을 덕지덕지 치장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나의 “강점들”을 통해 맺은 관계는 오히려 약한 끈입니다. 이는 그 “강점”이라는 것이 “나의 본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화장이 지워질 것을 두려워하여 조심하듯이, 이런 강점들을 통해 맺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평생 초조해하며 겉치레에 시간과 자원을 낭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화장이 지워지듯이 “강점”은 바래지며, 이에 따라 처음의 좋았던 관계는 실망과 상처만 남기고 사라져버립니다. 심지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세상에서와 비슷한 “종교적 스펙”으로 자신을 덮으려고 합니다. 신실한 기도와 예배, 십일조, 교회 직분, 헌신적인 봉사, 신앙적인 출생 배경 등으로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더욱 심하게 몸부림을 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강한 것들”이 아니라, 나의 깊은 속에 숨겨져 있는 “약한 것들”을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이를 통해서 끊어질 수 없는 “강한 관계”를 나와 맺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구주와 죄인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죽음도 분리할 수 없는 강하고 온전한 관계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으셔서 그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에 베드로는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합니다. 과거의 베드로라면 자신만만하게 “제가 주님을 정말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예수님 안에 있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실패한 자신을 여전히 품에 안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알았습니다. 그와 예수님을 묶어놓은 끈이 자신의 “충성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한량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이제 베드로에게는 자신이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부인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함” 때문에 주님께서 자신을 꼭 붙들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주님께로부터 떨어져나갈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자신의 전체가 “통째로” 주님 안으로 옮겨져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주님의 구원을 “통째로”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눈으로 나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하십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보기에 제자들은 이미 온 몸이 깨끗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짙은 화장으로 겉을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또 “예수님의 눈”으로 보기에 제자들은 항상 발을 씻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늘 용서하시고 씻어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더러운 발을 감추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주님 안에서 우리는 날로 담대하며 성결하며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이 주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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