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7:11-19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10명의 문둥병자들을 치료하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많은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 병들이나 장애들은 모두 사람이 고칠 수 없는 심각하고 고질적인 불치의 것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나오는 문둥병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문둥병은 불치의 병일 뿐 아니라 사람들이 천형이라고 여기는 매우 꺼려지는 병이었습니다. 제가 전에 들은 얘기입니다. 한 마음씨가 곱디 고운 처녀가 있었는데, 그 처녀가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남자가 말하기를 자신에게 어떤 병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극진했던 이 처녀는 남자를 위로하며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어떤 병이 걸렸더라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어요! 도대체 무슨 병이 있는 거죠?” 남자는 대답하기 전에 며칠만 기다려달라고 했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남자가 자신의 병을 고백하기로 한 날이 되었습니다. 여자는 기도를 하면서 설사 남자에게 내일 죽을 병을 있더라도 그를 변함없이 사랑하며 그와 결혼을 할 것이라고 굳게 결심하고 약속 장소에 갔습니다. 그리고 남자가 고백을 했습니다. “제 병은 문둥병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여자는 핸드백과 구두를 버려두고 도망갔습니다. (이것은 이야기고 실제로 소록도에서는 나병환자들을 돌보는 간호사들과 환자들 사이에 순애보가 자주 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문둥병자들은 대개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외로운 삶을 삽니다. 특히 이스라엘에서의 문둥병자들의 삶은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13:45,46절 말씀입니다.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 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문둥병자들에 관한 규례들 중 하나입니다. “옷을 찢고 머리를 푼다”는 것은 죄인들이 그 죄를 슬퍼하며 하는 행동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 스스로 멀리서부터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침으로써 그 사람들이 부정한 자신을 피할 수 있도록 경고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10명의 문둥병자들도 예수님께 가까이 나오지 못하고 멀리 서서 큰 소리로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들은 감히 자신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몹시 가난했습니다. 단 1페니의 프라이드도 없었습니다. 아무런 자격도 가치도 없는, 심지어 사람들에게조차 버림 받은 자신들을 다만 “불쌍히 여겨 주시라”고 간구했습니다. 이들이 의지하고 있는 유일한 소망은 “예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만이 그들이 의지하는 유일한 빛이었습니다. “예수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사실은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며 기도하는 합당한 자세입니다.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이 말씀 또한 레위기에 기록된 규례로 문둥병으로부터 나음을 입은 자는 제사장에게 가서 그 나은 것을 확인 받은 후 정상적인 사회생활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신 것은 그들의 병이 치료되었음을 선언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 문둥병자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갔습니다. 그리고 가는 도중에 자신들이 몸이 깨끗해지는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는 아직 병이 치료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간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순종하여 가는 길에 예수님의 치료의 기적이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축복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 말씀만으로는 하나님의 축복을 담을 수 없습니다. 그 축복은 오직 그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만 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그릇이 완성되고 또 하나님께서 그 그릇을 한량없는 축복으로 채우십니다. 이것이 천국의 원칙입니다. 오늘 말씀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몇 주 전 공부했던 요한복음 9장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눈 먼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히브리서 4: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하지 아니함이라.” 복음은 복된 말씀이지만 이 복이 우리에게 임하기 위해서는 이 복음의 말씀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말씀의 포인트는 그 병으로부터 나음 받은 이 10명의 문둥병자들이 아니라, 그 중의 한 명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사장을 만나러 가던 10명의 문둥병자들이 모두 가는 도중에 자신들의 병이 나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 9명은 가던 길을 계속 가는 반면, 다른 한 명은 자신이 깨끗해짐을 확인하자마자 놀라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뒤로 돌아 예수님께 돌아와서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9명은 감사하지 않았고, 이 한 명은 감사했습니다. 9명은 병이 나은 순간 예수님을 잊었고, 이 한 명은 병이 나은 동시에 예수님께 대한 감사가 넘쳐흘렀습니다. 13절에 보면 10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께 “큰 소리”로 간청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15절에 보면 오직 한 명만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이 한 명은 기도할 때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았을 때, 여전히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는 기도도 큰 소리로 하고, 감사도 큰 소리로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9명은 큰 소리로 기도한 반면, 그 기도가 이루어진 후에는 그들에게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17,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연거푸 물으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이 말씀들을 볼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무척 기다리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내시면서 “가다가 병이 나으면 하나님을 찬양하거라! 그리고 내게 와서 감사하거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섭섭해하시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 근심하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참된 구원되신 예수님 자신을 주시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19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돌아와 엎드려 감사하는 이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말씀의 보다 정확한 번역은 “네 믿음이 너를 온전하게 하였느니라”입니다. 이 한 명의 문둥병자는 다른 아홉 명과 마찬가지로 문둥병으로부터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께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시거나 온전하게 되었다고 하시는 것은 그의 병이 나았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영혼에 참된 구원이 임하였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때, 예수님은 이를 “그의 믿음”으로 인정하시고 그가 구원받았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해 주셨습니다. 그가 작은 은혜에 감사했을 때, 그에게 더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것이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분수령(watershed)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물을 나누는 산봉우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보이는 사진은 알프스 산 정상입니다. 산 꼭대기에 눈이 쌓여 있습니다. 이 눈이 녹으면 그 물이 흘러 내려가는데, 사진 왼쪽의 밝은 부분의 눈은 서쪽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들어가며, 오른쪽 어두운 부분은 남동쪽으로 흘러 지중해로 들어갑니다. 산꼭대기의 서로 가까운 위치에 있지만 분수령의 어느 쪽에 있느냐에 따라서 결국은 대서양과 지중해라는 전혀 다른 목적지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10명의 문둥병자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인생의 최고의 순간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 최고의 순간에, 9명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예수님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어디로 갔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쁜 길로 빠지지 않았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입니다. 반면에 한 사마리아인은 그 최고의 순간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더 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더 큰 은혜를 받았을 때 어떻게 했을까요? 더 크게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 하나님의 은혜가 끊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어주시는 은혜가, 그리고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그를 더욱 하나님 가까이 인도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축복된 삶입니까? 이것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누리는 은혜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히브리서 6:7,8절 말씀입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십니다. “땅에 내리는 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모든 땅에 차별이 없이 임합니다. 마치 10명의 문둥병자들이 모두 문둥병으로부터 나음을 입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비가 내리면 그 빗물을 땅이 흡수하여, 어떤 땅은 맛있는 채소를 내며, 어떤 땅은 먹을 수 없고 날카로운 가시와 엉겅퀴를 냅니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됩니까? 맛있는 채소를 내는 땅은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다. 하지만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땅은 버림을 당하고, 저주를 받으며 결국 불에 태워집니다. 얼마나 다른 운명입니까? 같은 은혜를 받았지만 결과는 극과 극의 차이가 있습니다.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저주를 받는 땅이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비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우리에게 저주가 되지 않고 참 은혜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마음이 늘 차고 넘쳐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맛있는 채소를 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모두 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내가 가진 것 중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희생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일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찬양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이 넘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셔서 나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얼마만큼 임하십니까?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만큼, 내가 하나님을 좋아하는 만큼 내 안에 임하십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학교를 다니는 제 둘째 애가 새 학년을 시작하면서 어려움을 많이 겪는 것 같아서 지난 Labor Day에 학교를 방문하여 딸과 함께 하루를 지내고 왔습니다. 가기 전에 전화 통화를 하면서 아빠가 간다고 하니 딸이 무척 좋아했습니다. 딸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우리 성경 공부도 하는 거지?” 그래서 저는 “물론이지!” 이렇게 대답한 후 전화를 끊고 급하게 성경공부 준비를 했습니다. 아빠를 반겨주고, 찰싹 붙어서 재잘거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받아먹는 딸이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딸이 저를 좋아해주고, 저와의 성경공부를 즐거워하는 만큼 제가 딸과 함께 있을 수 있었고, 또 성경 말씀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딸이 즐거워하지 않았다면 저의 방문이나 성경 공부가 오히려 딸을 더 어렵게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 대해서 이와 같은 마음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분이신가를 우리에게 드러내십니다. 계속 그렇게 하십니다. 은혜를 베푸시면서 마냥 기다리십니다.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 솟아오르기를 기다리십니다. 그 감사와 찬양 가운데 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을 향하여 솟아나는 감사와 찬양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보좌가 우리 속에 마련되기를 간절히 원하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기다립니다.
우리 마음에 찬송과 감사가 흘러 넘치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임재하실 때 그것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은혜입니다. “은혜 위의 은혜”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삶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우리의 찬송과 경배를 받으실 유일한 분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기쁨이 되며 나의 즐거움이 될 때, 그 기쁘고 즐거운 마음에 하나님께서 임하시며 내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주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은혜로 주십니다. 그러면 내가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늘 감사하므로, 하나님께서 내 가장 큰 기쁨이 되시는 더 큰 은혜 그리고 가장 큰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