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좋은 것을 택하라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2. 11. 29. 14:09

누가복음 10:38-42

 

사람들은 인생이 선택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매일 크고 작은 선택들을 합니다. 어떤 커피를 마실 것인가? 어떤 학교를 갈 것인가? 어떤 남자 또는 여자와 결혼을 할 것인가? 이러한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늘 하는 것은 어떤 것이 더 좋은가를 판단하고, 그 더 좋은 것을 취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 좋은 것을 택하라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며 따로 생각해 볼 여지가 없는 주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좋은 것을 택하는 일은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무엇이 좋은 것인지 잘 알 수 없는 경우가 많고, 둘째로, 설사 무엇이 좋은 것인 것 알더라도 그것을 선택할 수 없는 내적인 또는 외적 요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 쓴 “Shooting an Elephant”라는 에세이가 있습니다. 조지 오웰은 영국의 소설가이며 저널리스트로 동물농장, 1984와 같은 유명한 소설들을 남겼습니다. Shooting an Elephant는 조지 오웰이 버마(현재의 미얀마)에서 경찰관으로 일했을 때 겪었던 일을 소개한 에피소드입니다. 어느 날 마을 주민들이 경찰서로 몰려왔습니다. 거리에 코끼리 한 마리가 나타나서 난동을 부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늘 갖고 다니는 총을 들고 현장으로 나갔습니다. 그곳에 갔을 때 코끼리는 보이지 않고 난동을 부린 흔적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가니 한 남자가 코끼리에 밟혀 죽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느낀 조지 오웰은 사람을 시켜 코끼리 사냥용 총을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큰 총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갑자기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지 오웰을 따르는 사람들의 수도 점점 많아져서 2000명을 넘어섰습니다. 마침내 마을을 벗어나 수확이 끝난 논 한가운데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 코끼리가 보였습니다. 평화롭게 들판에 서있는 코끼리를 보면서, 그는 이 커다란 짐승에게 총을 쏘는 것이 마치 살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가 혼자였다면 당연히 코끼리 주인이 올 때까지 코끼리를 감시하는 것으로 일이 끝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의 뒤에서 앞으로 벌어질 흥분되는 일을 기대하며 4000개의 눈들이 반짝거리며 그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오직 한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코끼리를 향하여 총을 쏘았습니다. 누가 총을 쏜 것입니까?

 

오늘 말씀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집에 계시는 동안, 이 두 자매의 행동은 사뭇 달랐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들이 많아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어느 순간 마르다가 예수님께 와서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당연히 열심히 일하는 자신을 두둔하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으로는, 마리아가 좋은 것을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마르다에게는 마리아의 좋은 것을 빼앗을 권리가 없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마리아의 행동은 철이 없고 이기적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집에 왔을 텐데 이 와중에 바쁘게 일하는 언니를 돕지는 않고 한가하게 예수님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것도 사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언니가 와서 화를 내며 자기를 도우라고 요구를 하니까요. 주위에 있는 많은 다른 사람들도 말은 하지 않지만 같은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 언니는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동생은 뭐야! 맞아 둘째들이 대체로 저렇지 뭐!” 하며 수근댔을 것입니다. 마리아 자신의 마음 속에서도 계속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인가 아니면 일어나 나가서 빈대떡을 부칠 것인가!” 하는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는 이렇게 안팎으로 밀려드는 사람들의 시선과 압력을 견뎌야 했습니다. 마리아는 이것을 잘 해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들과 압력들을 이겨내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꿋꿋이 해나갔습니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조지 오웰은 자기 뒤에 있는 2000명의 시선에 굴복하여, 자기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코끼리를 쏘았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매우 강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원하는 것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마르다도 원하는 것을 택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한다는 것 또한 즐거운 일 아닙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 말씀을 통해 엿보이는 마르다의 내면은 그렇지 않습니다. 40절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마음이 분주하다는 말은 영어로 “distract”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곧 어떤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마음을 빼앗긴다는 뜻입니다. 41절에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마르다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자신이 원해서 택한 것들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마르다의 마음은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선택하고 그것에 집중할 만큼 강하지 못했습니다. 쉽게 걱정 근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녀의 앞에 예수님이 계셨지만 그녀에게는 이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온갖 일들에 대한 염려로 시끄럽고 분주했습니다. 조지 오웰의 마음이 2000명의 주민들에게 점령당하여 꼭두각시같이 행동한 것처럼, 마르다의 마음도 온갖 염려와 근심들에 의해 점령당했습니다. 그녀는 이리저리 끌려 다녔습니다. 그래서 사는 것이 행복하지 못하고 짜증이 났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음식을 만들어야 하지 않나!” “예수님의 말씀도 중요하지만 먹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지!” 우리 입장에서 보면, 또 마르다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혹자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이렇게 비교합니다. “마르다는 자기 집을 열어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께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자기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셨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고 그녀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를 통해 그녀의 영혼에 생명이 되는 생수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예수님의 제자들은 근처의 마을에 가서 먹을 것을 구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먹을 것을 예수님께 드리며 선생님, 드세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이 오신 목적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방문하신 목적도 이 한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고,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신 목적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이를 통해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드시는 양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음식을 먹어서 배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심으로 배가 부르고 만족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 중 누가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하고 있는 겁니까? 당연히 마리아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마리아를 앞에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면 천국 잔치를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이 잔치 분위기를 망치고 심지어 예수님으로부터 그 잔칫상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손님이 계신 동안은 손님이 주인입니다. 그 손님의 입장에서 대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대접해야 합니다.

 

성경 공부 시간에 잠깐 말씀 드린 제 선배 얘기를 하겠습니다. 저에게 OO”라는 선배님이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이 분은 자주 저를 집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약속 시간에 맞추어 그의 집에 가면 저녁 식사가 식탁에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앉아서 식사를 하면서 담소를 나누고, 식사가 끝나면 옆자리로 옮겨서 차를 마시면서 계속 즐거운 시간을 갖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 선배나 그 부인이 절대로 제 앞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손님이 오면 접대를 하느라 특히 여자는 부엌을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선배나 그 부인은 좀처럼 그런 일이 없습니다. 미리 필요한 것들을 잘 준비해 놓고, 손님이 집에 머무는 동안에는 계속 손님과 함께 있으면서 손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손님에게 주의를 집중합니다. 이러한 배려 덕분에 저같이 목소리가 크지 않고 말이 느린 사람도 아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선배 부부는 나이도 저보다 훨씬 많고, 사회적인 지위도 저보다 훨씬 높고, 또 늘 제게 성경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 저의 영적 선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집에 가면 마치 내가 주인이 된 듯한 느낌이 듭니다. 제대로 대접을 받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은 그 분들이 진심으로 저를 영접해주고, 저를 존대하고, 저와 마음으로 함께 하며, 제 말을 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대접을 받는다면, 비록 준비된 음식이 변변치 않더라도 무척 즐거울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예수님을 대접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예수님을 대접했습니다. 사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도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많은 목소리들이 있었습니다. “손님이 오셨는데 음식을 제대로 장만해야지 어떻게 상에 달랑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만 올려!” “아니 여자가 어떻게 무례하게 예수님 앞에 앉아 있어! 거긴 남자들의 자리야! 여자는 부엌에서 일을 해야지!” “너는 언니잖아! 네가 동생과 똑같이 행동하면 안되지!” “예수님께서 그 동안 너한테 베푼 은혜를 생각해 봐! 뭐라도 해서 조금이라도 갚아야 하지 않겠니?” 이런 목소리들은 얼핏 듣기에 그럴 듯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런 소리들은 세상의 소리들입니다. 세상의 습관들, 규례들, 이웃집 아줌마들의 잔소리, 생각 없이 내뱉는 쓴 소리들입니다. 마르다는 이런 소리들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예수님 앞에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많은 염려와 근심으로 인해 원하지 않는 일을 할 때, 마르다는 자신이 불쌍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자기 연민은 짜증과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자신을 돕지 않는 동생이 밉고, 그런 동생을 내버려두는 예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마르다는 참지 못하고 끝내 도발을 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그녀는 예수님을 주여!” 하고 부르지만 이 순간만큼은 예수님께서 그녀의 주인이 아니셨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주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신경질을 내며 예수님께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또 예수님을 통해 동생에게 압력을 가했습니다. 온 집안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하게 식었습니다. 손님으로 오신 예수님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안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한다고 많은 일을 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예수님께 실례를 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동생과의 사이도 나빠지도, 자신도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잘못된 선택을 한 것입니다.

 

좋은 것을 선택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들에게 눈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눈이 두 개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속에는 더 많은 눈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앞에 말씀드린 조지 오웰에게는 자신의 두 눈 외에 4000개의 눈이 더 있었습니다. 그는 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자신의 두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의 뒤에서 코끼리가 총을 맞고 쓰러지기를 숨죽여 기다리는 4000개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의 소리 없는 목소리에 굴복하여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마르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의 마음은 많은 눈들에 의해 감시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세상의 소리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하고 있으면 저것이 눈에 걸리고, 저것을 하고 있으면 이것이 눈에 걸렸습니다. 도무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어떨까요? 그녀에게는 오직 두 눈 곧 자신의 눈만 갖고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녀의 두 눈은 정확히 예수님의 두 눈에 고정되어 있었고, 그녀의 두 귀는 예수님의 입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녀의 눈은 밝고 환했습니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 매우 분명했습니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언니가 와서 짜증을 내도, 그녀의 눈은 불안으로 distract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예수님께 고정하였습니다. 그녀의 눈은 무엇이 좋은 것인지 분별했고, 그녀의 믿음은 그 좋은 선택하고 끝까지 지킬 만큼 강했습니다.

 

마태복음 6:2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여기서 “네 눈이 성하면”이라는 말씀은 영어 성경들에서 대체로 “If your eye is good”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킹제임스 버전에는 “If your eye is single”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번역이 원문에 가장 가까운 번역입니다. 우리가 좋은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첫째, 다른 사람의 눈이 아닌 내 눈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눈을 예수님의 눈과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좋은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내 자신을 행복하게 하며, 이웃을 진심으로 진리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눈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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