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세상의 빛 예수님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2. 11. 29. 14:07

요한복음 9:1-7

 

한 신발 회사가 있습니다. 그 회사 사장님은 아프리카에 시장을 개척하고자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회사 직원 중 이성적인 이대리와 믿음 좋은 신대리를 아프리카 현지에 보냈습니다. 시장 조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이대리와 신대리가 아프리카에서 시장 조사를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사장님이 물었습니다. “그래 어떻든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여지가 있는가?” 그러자 이대리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했습니다. “사장님, 전혀 여지가 없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신발을 신지 않습니다. 신발을 신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신발을 팝니까?” 사장님은 이제 신대리에게 물었습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신대리는 아주 흥분한 목소리로 보고했습니다. “사장님, 그곳은 황금 시장입니다. 그곳에는 신발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이대리는 신대리를 쳐다보며 못마땅한 듯 말했습니다. “아니, 수천 년 동안 맨발로 살아온 사람들이 갑자기 신발을 신을거라고 믿는가?” 하지만 신대리는 확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과거의 맨발의 역사는 잊어버려! 이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거야!” 이대리의 생각은 과거의 맨발의 역사에 묶여 있습니다. 그 어두운 그림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한 역사를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신대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것이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온 것이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칼에 끊어버렸습니다. 그는 과거에 매이지 않고 미래의 새로운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는 모든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신들이 만든 하얀 운동화를 신고 초원을 누비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 비전이 그를 몹시 행복하고 정력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같은 문제를 앞에 두고 이대리와 신대리는 이렇게 서로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절망하고 한 사람은 소망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비슷한 대조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소경으로 태어나 평생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구걸을 하며 살아가는 불쌍한 남자입니다. 이 사람의 삶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상상하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매일 보고 즐기며 심지어 짜증도 내는 푸른 하늘, 붉은 저녁 노을, 우거진 숲,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 그에게는 말 그대로 추상명사입니다. 엄마, 아빠의 얼굴조차 모릅니다. 서옥희 성도님의 말에 따르면 사람이 습득하는 지식의 80%를 시각을 통해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지적으로도 많은 제약이 있었을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길 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하지만 이 사람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9:34절에 보면 사람들이 이 소경 거지를 꾸짖어 말합니다.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사람들은 이 불쌍한 사람을 온전한 죄인,” “타고난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아니 소경으로 태어난 것도 기가 막힌 일인데, 거기에 죄인이라는 낙인까지 찍힌 것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심지어 그의 부모까지도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이 소경 거지는 가문의 수치였습니다. 이것이 이 불쌍한 소경 거지를 보는 보통 사람들의 시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를 본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제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 소경 거지에게 내리신 저주스러운 불행이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습니다. 그것이 자기 죄 때문이라면, 태어나지도 않은 어린 것이 무슨 죄를 지을 수 있단 말인가? 또 부모의 죄 때문이라면 왜 부모가 받을 벌을 자식이 대신 받는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실수라도 하셨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의문들을 마음에 품은 채 제자들은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먼저 단언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사람들은 이제까지 이 소경 거지나 그의 부모가 몹쓸 죄를 범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정죄했습니다. 그의 불행을 받아 마땅한 저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다하셨습니다. 수십 년 동안 소경 거지의 인생에 진절머리 나게 붙어 다니던 죄인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가 소경으로 난 이유는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이는 앞의 말씀보다 더 놀라운 말씀입니다. 소경 거지는 이제까지 자신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하시기 위해 그 인생을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이 소경 거지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일이란 그의 눈을 띄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치료하시며, 회복하시며, 구원하시며, 한 없이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한 마디로 좋은 일, 매우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 사람의 비참해 보이는 인생이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이고 진리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겪습니다. 이런 일을 만날 때, 우리도 제자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지?” 하며 자책하거나, 또는 누구 때문에 이 일이 생긴 거야?” 하며 비난할 사람을 찾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의 불행함을 슬퍼하며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하며 낙심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어려움들은 결코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 아닙니다. 제 말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이 우리의 죄와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sign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성경에서 은 생명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어떤 것또는 죽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직장을 다닐 때 제 사무실 직원들은 거의 모두 주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1층에 있는 증권회사 객장을 왔다 갔다 하면서 주가 동향을 관찰했습니다. 퇴근할 무렵이 되면 사무실 분위기만 봐도 그날 주식이 올랐는지 내렸는지 대충 알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주가가 빛이고 이 기쁨이었습니다. 그 빛이 밝게 빛나면 그들의 마음도 환하고, 그 빛이 어두우면 그들의 마음도 대단히 어두웠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각자가 자신의 행/불행을 결정하는 나름대로의 을 또는 생명의 근원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의 밝고 어두움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빛이 어두울 때 죽음의 고통 겪게 됩니다.

 

하지만 오직 예수님만이 참 빛이며 참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빛이 우리 안에 비출 때,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고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온갖 문제들이 있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빛이 비춘다고 그것들이 다 해결되나? 우리 영혼에 있어 예수님은, 마치 지구를 비추는 태양 빛과 같습니다. 봄이 되어 햇볕이 따사롭게 비치면 겨우내 메말랐던 대지에 온갖 생명의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눈이 녹고 계곡에 물이 흐릅니다. 싹이 나고 꽃이 핍니다. 알이 깨어나 애벌레가 되고 벌과 나비가 됩니다.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깨어나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한 가지 곧 햇빛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영혼에 예수님의 빛이 비칠 때 우리 안에 생명의 역사 곧 하나님의 일이 시작됩니다.

 

이 생명의 빛이 어떻게 이 소경 거지의 삶에 임했습니까? 6절과 7절은 예수님께서 이 소경 거지를 치료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이라는 곳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 사람은 얼굴에 진흙을 바른 채 길을 더듬어 실로암 못까지 가서 씻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을 때 그의 눈이 열리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인생에 빛이 임했습니다. “순종이란 마치 실 끝을 바늘 귀에 끼우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바느질을 하는 어머니 옆에 앉아서 눈이 침침한 어머니를 위해 실을 바늘귀에 끼는 일을 도와드렸습니다. 다 해보셔서 아시겠지만 작은 바늘귀에 실 끝을 집어넣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실 끝이 힘이 없거나 풀어져 있으면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풀어진 실 끝을 가위로 조금 자르고, 침을 묻혀서 실 끝을 뾰족하고 꼿꼿하게 세웁니다. 그리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좁은 바늘 귀 틈으로 밀어 넣습니다. 여기까지가 어려운 작업입니다. 일단 실 끝이 바늘 귀를 통과해서 반대편으로 나오기만 하면 일이 거의 끝나는 것입니다. 그 끝을 잡고 죽 잡아당기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빛 가운데 들어가는데도 이와 같은 순종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맞추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까지 그렇게 안 살아와서 맞추기 힘들더라도, 또 예수님의 말씀이 잘 이해가 안되더라도, 참고 나를 겸손히 낮추어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종하여 우리 자신을 예수님의 말씀에 억지로라도 꿰어 맞추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잡고 안으로 끌어당기십니다. 우리의 온 몸과 영혼이 예수님의 빛 안으로 죽 딸려 들어감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참 빛 되신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눈을 뜬 이 소경 거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앞을 보지 못하던 그가 이제 앞을 보게 되었으니 그의 인생에 밝은 빛이 비친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그가 진정으로 눈을 뜬 것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입니다. 9:35-38절에는 이 사람과 예수님 사이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대화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인자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이심을 그에게 밝히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며 예수님을 경배하였습니다. 그가 뜬 눈은 세상에 대한 눈이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눈이었습니다. 소경 거지는 육체의 눈을 뜨자마자 눈 뜨고는 못 볼 꼴을 당했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자기 눈을 뜨게 하셨다는 것을 말했다는 이유로 쫓겨난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경배했습니다. 이로써 그의 인생에 참 구원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한 이상, 그는 더 이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스스로 본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자들을 소경이라고 하십니다. 이들은 교만과 세상 욕심에 눈이 멀어 그들 앞에 서 계신 세상의 빛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참 빛 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이며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그리고 유일한 문제입니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오직 한가지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1:5절 말씀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어두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둠에 갇혀서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의 어떤 어둠도, 심지어 죽음도, 사단의 권세도, 천사들도 예수님의 빛을 가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병든 자를 치료하시며,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풍파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우리의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깊은 어둠 가운데서도 이 빛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훈련을 시키십니다. “어둠 가운데서 빛을 보는 훈련입니다.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훈련입니다. 과거의 죄에 매이지 않고 앞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 훈련을 신물 나게 시키십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이 어떤 문제 앞에서도 어두워지지 않고, 예수님의 빛을 보고 즐거워할 때까지 계속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영의 눈을 활짝 열어주시고 이로 인해 우리가 항상 세상의 빛 예수님을 즐거워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메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리한 싸움  (0) 2012.11.29
진정한 믿음  (0) 2012.11.29
하나님의 의  (0) 2012.11.29
좋은 나무 못된 나무  (0) 2012.11.29
복 있는 자  (0) 2012.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