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43-54
믿음이란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된 보이지 않은 “통로(channel)”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통로를 통해 무엇인가가 흐르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나온 “실로암 못 (Pool of Siloam)”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소경 거지의 눈에 침을 이겨 만든 진흙을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신 것입니다. 이 못은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공동 우물입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이 샘에서 물을 길어다 마셨습니다. 그런데 실로암 못은 그 자체가 샘이 아닙니다. 그곳은 단지 물을 모아 놓은 곳입니다. 이 못의 물 근원은 따로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기혼 샘(Gihon Spring)”이라는 곳입니다. 이 기혼 샘에서 솟아난 물이 “히스기야 수로”라는 통로를 통해 성 안으로 흘러 들어와서 실로암 못에 모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 물을 떠다가 마시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20:20절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권력과 못과 수로를 만들어 성중으로 인도하여 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이 못과 수로를 만든 이유는 역대하 32장에 나와 있습니다. 역대하 32:2-3절 말씀입니다. “히스기야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그 방백들과 용사들로 더불어 의논하고 성 밖에 모든 물 근원을 막고자 하매 저희가 돕더라.” 산헤립은 그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앗시리아 제국의 왕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쳐들어와서 그 수도인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특이한 도시입니다. 큰 도시들은 대개 큰 강들을 끼고 있습니다. 물이 충분해야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강이 없는 높은 산 꼭대기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혼 샘이 유일한 물 근원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샘이 성 밖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외적이 쳐들어와 성문이 닫히면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물을 구할 수 없고, 반대로 성 밖에 있는 적들은 그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은 성 밖에 있는 샘들을 모두 막아버리고 대신에 땅 속에 터널을 뚫어 기혼 샘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적들에 의해 포위된 가운데서도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뚫려 있는 “히스기야 터널”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사는 우리 각자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일한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밖에서는 보이지 않은 비밀한 터널을 뚫어놓으셨습니다. 이 터널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며 또 하나님의 축복이 끊임없이 우리 각자의 영혼에 흘러 들어옵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왜 믿는 자들이, 가진 것이 없어도 심지어 많은 문제들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해처럼 밝은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은 터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터널은 어느 누구도 볼 수 없고, 막을 수도 없습니다. 이 믿음의 터널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한히 축복하시고, 무한하게 공급하십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뚫려 있는 “히스기야 터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병들어 죽어가는 아들을 위해 예수님께 나아온 왕의 신하에게 이 터널 공사를 하십니다. 곧 그가 예수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갖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 갖도록 도우시는 “진정한 믿음”이란 어떤 믿음입니까? 오늘 말씀에 따르면 진정한 믿음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 그리고 “예수님 그 분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후 고향인 갈릴리 지방으로 돌아오셔서 가나라는 마을로 가셨습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전에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이적을 행하신 곳입니다. 그 때 한 왕의 신하가 가버나움으로부터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청하였습니다.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이 사람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듯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갈릴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환영은 “예수님께 대한 경외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이적들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같은 표적들을 갈릴리에서도 보여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의 예수님께 대한 마음은 차가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는 생명의 말씀, 천국의 복음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기적을 통해 그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영접하지 않고 그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씀을 듣지 않은 사람들로 인해 예수님은 심히 답답해 하시고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보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마치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시험을 볼 때는 책상 위에 연필과 지우개 외이는 아무것도 올려놓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주어진 문제들을 풀어야 합니다. 무엇으로 풉니까? 우리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지식들을 갖고 푸는 것입니다. 시험은 “우리가 보는 것”을 테스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것” 곧 “우리 속에 들어 있는 것”을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학교에서 히브리어 기말 시험을 보았습니다. 학생들의 시험 준비를 위해 교수님은 많은 예상 문제들을 답안지와 함께 주셨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답안지를 펴놓고 문제를 보면 문제가 참 쉬워 보입니다. 그런데 답안지를 덮기만 하면, 갑자기 문제들이 어려워집니다. 확실히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순식간에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모든 게 다 가물가물합니다. 아, 뭐였더라? 하면서 답안지를 열면 다시 다 기억이 납니다. 이래서는 시험을 잘 치를 수 없겠죠? 잘 준비된 학생은 모든 것을 머리 속에 확실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험 시간에 마치 답안지를 보고 베끼듯이, 머리 속에 있는 것을 문제지에 옮겨 적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시험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십니다. 우리에게 이적을 보이시기도 하시며, 눈에 볼 수 있는 은혜들을 베푸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눈 앞에 답안지가 펼쳐져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상관 없이, 내 속에 지식이 온전하고 분명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또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자신을 다시 살리시고 하늘 나라 영광의 보좌에 앉히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이 모든 축복들을 믿음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시험을 잘 보신 것입니다. 우리도 더 강하고 순수한 믿음을 위해, 같은 믿음의 시험들을 치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을 모두 거두어가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눈에 보이는 증거들을 다 없애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아직도 내가 너를 사랑함을 믿느냐?” 이때도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이 차가워지지 않고, “Yes” 하며 기쁨과 확신으로 대답해야 합니다. 보이는 것이 없는 중에도, 내 영혼이 히스기야의 터널 같이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며, 상을 주십니다.
“진정한 믿음”은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아들이 목숨이 경각을 다투는 위급한 가운데, 이 왕의 신하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잘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간청했습니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의 거리는 약 20마일로 걸어서 하루가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빨리 출발을 하셔도 아이가 죽기 전에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에 아버지의 심장은 바싹 타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실 생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서 아들을 고치실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그의 믿음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직접 가셔서 아들의 머리에 손은 얹어야만 병이 나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그 전에 아들이 죽기라도 하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는 약한 믿음이었습니다. 그의 몸은 예수님 앞에 있지만, 그의 마음은 시간에 쫓기고, 죽음에 쫓기고, 두려움에 쫓겼습니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이 말은 믿음의 말이기도 하지만, 절망의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의 호소를 듣고 “그래! 빨리 가자” 하시면서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절망을 이기는 소망의 말씀이며, 어둠을 이기는 빛이 되는 말씀입니다. 아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같이 슬퍼해주고 같이 울어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실 생각이 전혀 없으십니다. 오히려 절망하며 우는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가 절망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는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하고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십니다. 우리는 내 속에서 들려오는 두려움의 소리를 듣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두려움을 잠재우고, 절망을 이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호소를 들어달라고 몸부림치지 말고, 내가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귀담아 듣도록 내 자신을 설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고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시자, 이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갔습니다. 그의 원래 계획은 예수님은 모시고 가는 것이었지만, 그의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실패한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더 좋은 것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그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가 이를 믿고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며 “천국”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우리가 그 말씀을 믿을 때, 모든 것이 다 잘 됩니다. 빛이 임하고, 생명이 살아나고, 모든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말 그대로 “만사가 형통”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돌아가던 신하가 도중에 그의 종들을 만났습니다. 종들은 그에게 “아이가 살았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신하가 그 말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게 정말이야! 야, 빨리 가자! 건강한 우리 아들 얼굴이 보고 싶다!” 이렇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 대신 종들에게 “아이가 정확히 몇 시에 낫기 시작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돌아오는 내내 그가 무엇을 생각했는가를 보여줍니다. 이제 신하의 관심은 “아들의 병”이나 “병든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그 병을 치료하고 살리시는 예수님”으로 옮겨졌습니다. 53절은,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말씀합니다. 이제 이 왕의 신하와 그의 온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그냥 예수님이라는 그 분을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는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을 말씀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며, 또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임하신 구세주이심을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는 그 분이 경배 받으시며 순종해야 할 주이심을 믿고 “죽음”보다 “병”보다 이 예수님을 더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보지 않고 믿는 믿음”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믿음은 “예수님 그 분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순수한 믿음을 하루 아침에 갖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랜 시간과 많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그 일을 하십니다. 히스기야가 바위덩이를 깨고 땅 속에 터널을 뚫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바위덩어리 같은 불신을 조금씩 조금씩 깨시면서, 우리 속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터널을 뚫어가십니다. 우리가 오늘 공부한 왕의 신하에게서도 이러한 믿음의 성장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혹시 예수님이라면 죽어가는 아들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예수님께서 지푸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 권세 있는 말씀이 그의 마음에 임하자 어둠이 걷히고 빛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고 순종했을 때, 아들이 생명을 얻고 그와 온 가족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축복이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작은 믿음, 심지어 의심과 두려움이 범벅이 된 정말 믿음 같지 않은 믿음도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 약한 믿음을 끄지 않으시고 살리십니다. 생명의 말씀을 주셔서 더 강한 믿음을 갖게 하시며, 끝내는 찬물을 부어도 꺼지지 않은 빛이 우리 가운데 임하게 하십니다. “진정한 믿음”을 주십니다. 우리 각자에게 이와 같은 믿음의 성장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이 교회가 사람들 속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터널을 뚫는 수고를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