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자는 더 받으리라
마가복음 4:21-25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여러가지 주제들에 관해서 공부하고 배웁니다. 가장 기본적인 주제들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에 대해서, 창조와 구원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천사에 대해서, 사단 마귀와 악령들에 대해서 등등 정말 알아야 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이런 주제들과 더불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매우 중요한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종말”에 관한 것입니다. 종말은 “끝”이라는 말입니다. 곧 모든 것이 끝나는 때입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는 때,”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때,” “영원히 계속될 상태가 확정되는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때를 가리켜 “추수 때”라고 하기도 하고 (마태복음 13:39; 마가복음 4:29), “심판의 날”이라고 하기도 하고 (베드로후서 3:7; 요한1서 4:17), “그리스도의 날”이라고 하기도 하고 (고린도전서 1:8; 빌립보서 1:6; 1:10; 2:16), 그냥 “그 날(That Day)”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21:34; 데살로니가전서 5:4). 간혹 “호기심” 때문에 종말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말”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바 가장 확실한 “끝”은 죽음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는 장래 일과 마지막 날에 관해서 우리가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컴컴한 어둠”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말”에 대해서 얘기하기를 꺼립니다. 마치 어둠 속에 무서운 괴물이 숨어서 우리를 삼키고자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성경 속으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성경은 종말을 가리켜 “끝”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때”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1:6절 말씀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또 데살로니가전서 5:23-2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우리가 지난 주에 공부한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또한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씨가 좋은 밭에 뿌려질 때, 곧 말씀을 듣고 받은 자는 “추수 때에”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마가복음 4:20).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종말의 때”를 바라보고 이를 준비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들은 거의 다 “종말”에 관한 의미들을 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24-30, 36-40절에 기록된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밭에서 곡식과 함께 자라는 가라지를 가리켜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하십니다. 또 마태복음 13:47-50절에 기록된 “그물의 비유”에서도 예수님은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 끝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꾸준히 가르치십니다. 요약하자면 예수님의 “초림 (First Coming)”의 목적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예수님의 “재림 (Second Coming)”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하도록 도우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공부할 말씀 또한 매우 뜻이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키워드를 꼽는다면 “드러낸다”와 “받는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단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종말”을 향하여 인도하시는 기본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정의 시작은 “듣는 것”입니다. 2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십니다. 또 24절에서는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하십니다. “삼가라”는 “마음을 들여서 그 뜻을 깊이 생각해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예정하는 “종말”을 향해 가는 여정의 시작은 다름이 아니고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가 되시는 예수님 자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공부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도, 열매 맺는 삶의 시작은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봄에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 “시작”이 없이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기름진 땅이라도 “황무지”와 다를 바가 없으며, 때를 따라 내리는 햇볕과 비와 바람도 전혀 할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땅에 씨가 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예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 말씀을 여전히 기억하고, 믿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4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그 한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심판을 받을 자는 “말씀을 받지 아니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를 심판하는 이는 바로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구원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말씀을 받지 않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명한 요한복음 3:1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과 함께 18절은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이 말씀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이미 구원과 심판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차 종말의 때에 그 말씀 곧 구원과 심판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하면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삼가라” 하시는 예수님의 권고의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21-22절 말씀입니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bowl)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lampstand)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상식입니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그것으로 방 안을 환하게 비추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잘 보이는 높은 곳에 등불을 두어야 합니다. 침대 밑이나 그릇 밑에 숨겨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등불”은 세상의 빛이 되시는 예수님 또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과 관련하여 마태복음 10:26b-2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이 말씀에 따르면,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가져오신 “등불”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듣고 받은 제자들은 그 등불을 드러내고 비추는 “등경(lampstand)”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말씀을 들은 자는 그 시로 마음 속에 이 “등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등불을 사람들 가운데 비추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등불을 비출 수 있을까요? 누가복음 9:2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또 누가복음 12:8-9절에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고 또 주님과 그 하신 말씀과 그 하신 일을 자랑하는 것이 바로 “등불”을 비추는 삶인 것입니다. “등불”은 빛입니다. 우리 각 사람들의 속에는 어둠을 비추는 “빛”이 있습니다. 그 빛은 그 사람이 자신의 “행복하고 평안한 미래”를 위해서 믿고 의지하며 자랑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빛은 “돈”일 것입니다. 곧 많은 재산을 쌓아두면 이것이 그 사람에게 행복하고 평안한 미래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 사람의 영혼 속에 켜 놓은 “등불”이 됩니다. 물론 이 등불은 그 사람에게 평안함을 주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자랑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 대해 예수님 자신이 바로 이런 “등불”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비추는 빛이 되시며 우리의 자랑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행복하고 평안한 미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레미야 9:23-24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을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지혜, 사람의 용맹, 사람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여호와를 아는 것” 그리고 “여호와께서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스러운 성품들을 잘 아는 것이 우리가 가진 “부함”이며, 우리의 “지혜”이며, 우리의 “자랑”입니다. 그리고 이 “부함”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친히 말씀하시고 행하시고 보이심으로 “엄청나게” 더욱 풍요로워졌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복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등불을 품은 “등경”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이 빛을 싫어하고, 거절하며, 멸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불을 가진 우리 자신이 이 빛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계속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자리를 지키며 그 빛을 밝히 비추어야 합니다. 입을 열어 예수님을 시인하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 하신 일들을 자랑해야 합니다. 세상에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넘치도록 복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에게 축복된 삶이 됩니다.
24-25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든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우리가 신앙 생활에서 항상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급이 되시며 또 모든 축복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곧 하나님은 “주시는 분(The Giver)”입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아들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두 가지의 측량할 수 없는 (immeasurable), 다시 말해서, 사람의 생각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그래서 신비로운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7:2절에서는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또 마태복음 5:7절에서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하십니다. 또 로마서 11:2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인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죄인들(이방인들)에게 보이신 긍휼하신 용서의 사랑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자에 거한다”는 것은 그들이 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헤아려 알고 또 같은 용서의 사랑을 베풀며 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긍휼의 척도”입니다. 이 긍휼의 척도는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긍휼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내 이웃들에게 베풀어야 할 긍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면서, 이웃들에게 같은 긍휼을 베풀지 않는 것은 마치 다른 저울을 사용하여 속이는 것과 같습니다. 잠언 20:10절은 “한결 같지 않은 저울 추와 말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말씀합니다. 그럴 경우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우리를 헤아리신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떠받쳐주는 토대(foundation)는 바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 토대가 갈수록 튼튼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죄인임을 더욱 뼈저리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베푸신 예수님의 은혜의 크기를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어렴풋이나마 헤아리고 본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더 견실하게 안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에게 축복된 삶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지만, 여전히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일하심에도 우리의 “헤아림”이 큰 영향을 미칩니다. 곧 “우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헤아림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 구원의 능력을 행하시는 “마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큰 믿음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행하십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불신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십니다. “못하신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헤아림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헤아리시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6:5-6a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거기서는 (예수께서)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향 마을을 찾으셨을 때,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만 “마리아의 아들 목수”로만 생각하고 배척하며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이상하게 여기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미 신적인 “지혜와 권능”을 보이심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만큼 충분한 증거들을 그들에게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곧 그들의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나쁜 예입니다. 좋은 예들도 많습니다. 마태복음 9:27-31절에, 두 소경이 예수님께 와서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자신들의 눈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그러자 그들은 한 목소리로 힘차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과연 그들의 믿음대로 그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것은 좋은 예들 중 하나입니다. 헤아림 곧 믿음이 조금 모자라서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은 문둥병 환자였습니다. 그는 병의 고침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엘리사는 그에게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말했습니다. 나아만은 이 말을 듣고 노하였습니다. 그의 나라에는 요단강보다 더 크고 깊고 넓은 강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에 비하면 “개울물”에 불과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는다고 해서 이 지긋지긋한 불치병이 나을 리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나아만 장군의 헤아림이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흔들리는 믿음을 보고 근심한 그의 종들이 그를 말리며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말씀을 듣도록 권고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요단 강물에 일곱 번 몸을 잠그자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처럼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더 큰 믿음”을 갖게 되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더 큰 믿음을 갖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가장 큰 믿음은 “부활의 믿음”입니다. 종말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에게 언젠가 오직 “부활의 소망”만 남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것은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이나 문둥병자가 깨끗해지는 것보다 더 큰 “헤아림”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우리에게 이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소망 가운데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영광스러운 새 몸으로 부활할 것을 믿도록 도우십니다. 우리가 이 헤아림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고, 영화로운 새 몸을 입히시며, 하나님 나라의 영생으로 인도하여 들이십니다. 이 소망이 “종말”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이 큰 축복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종말”은 모든 것의 끝입니다. 그것은 어두움과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우리 믿는 자들이 바라보는 “종말”은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구원과 생명의 빛으로 밝히 드러나는 때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은혜와 능력에 대한 우리의 “헤아림”에 대하여 하나님의 상급이 임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종말은 빛과 소망으로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 마음에 이 소망의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이 씨앗을 키우고 더 큰 믿음을 가져, 주님의 날에 더 받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