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겨자씨 한 알 같은 하나님 나라 (마가복음 4:30-34)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1. 24. 02:16

겨자씨 같은 하나님 나라

 

마가복음 4:30-34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 하나로 겨자씨 알의 비유입니다. 비유의 내용은 매우 단순합니다. “모든 씨보다 작은 겨자씨 땅에 심겨서 자라게 되면 모든 나물보다 커진다 것입니다. 내용은 이렇게 단순하지만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은 같습니다. 34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든 것들을 비유로 가르치시되, 그것들의 의미를 따로 제자들에게 해석해 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른 비유들과는 달리, “겨자씨 알의 비유 대해서는 본문에 예수님의 해석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의 의미를 이해하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더욱 넓고 깊게 해야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원칙이 있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 합니다. 바르트(Karl Barth)라는 독일 신학자는 신학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끝나야 한다 (Theology must begin with Jesus Christ; Theology must also end with Jesus Christ)” 말합니다. 이것들이 바로 성경 말씀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근본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주 성경 말씀을 세상의 일반적인 원리들 비추어 이해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일반적인 원리들에 비추어 생각하면, 예수님은 예외적이고, 특별하고, 극단적인 경우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특히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배우려는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예외적이고, 특별하고, 극단적인 경우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직 예수님만 일반적이고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원리 되십니다. 다른 모든 것들이 비정상이며, 오직 예수님만 정상 되십니다. 오직 예수님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명심해야 원칙입니다. 오직 그래야만 우리의 말과 생각과 삶이 세상 나라의 악한 길을 벗어나며, 하나님 나라의 의로운 ,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로 들어설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은 사물의 본질 되는 속성을 안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금은 안에 갖고 있습니다. 소금의 본질 그것의 맛이라고 있습니다. 만일 소금이 짜지 않다면, 그것은 소금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소금이 만일 () 맛을 잃으면 …..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하십니다 (마태복음 5:13). 다른 예로, (lamp) 빛을 내어 주위를 밝히는 도구입니다. 만일 등이 빛을 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등이라고 없습니다. 등의 본질 그것이 안에 품고 있으며 밖으로 비추는 빛입니다. 우리는 (lamp)” (light)” 거의 같은 말로 생각할 있습니다. 왜냐하면 둘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있습니다. 군인은 싸움을 해야 하며, 장사꾼은 돈을 벌어야 하며,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지식을 가르쳐야 하며, 작가는 글을 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천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우리를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만드는 것일까요? 다시 한번 바르트 선생의 말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그는 크리스천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입니다 (The Christian is the Christ).” 여기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크리스천과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관계가 등과 빛의 관계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안에 예수님이 없는 크리스천은 실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Nothing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것입니다. 점을 기억하면서 오늘 말씀인 겨자씨 알의 비유 의미를 음미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 알과 같다 하십니다. 겨자씨 알은 위의 모든 씨보다 작습니다. 세상의 원리에 따르면 작다 말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작은 것보다는 것을 원합니다. 하지만 성경 안에서는 이것이 진리는 아닌 같습니다. 성경에서 또는 하나님 나라에서 작다 말은 오히려 크다라는 의미를 가질 있습니다. 그럴까요? 간단히 말해서 내가 작다 것은 하나님의 크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크다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의 원리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이란 마디로 말해서 작은 입니다. 그는 자체로는 Nothing 자입니다. 그가 Nothing 아닌 이유는 오직 안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여 살며, 그리스도의 진리를 따라서 사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작은 이며, 동시에 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이와 같은 양면성 갖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사사 기드온을 있습니다. 사사기 6-8장에 나오는 기드온은 겨우 300명의 군사를 지휘하여 메뚜기 떼와 같고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은미디안과 아말렉 연합군을 물리쳤습니다. 기드온은 본래 작은 였습니다. 그는 겁도 많고 의심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말씀하셨습니다. “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용사라고 부르시고 그에게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압제에서 구원하라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들은 기드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기드온은 자신을 가장 약한 집안에서 제일 작은 라고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사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사람을 치듯 하리라.” 그렇습니다. 기드온은 작은 자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와 함께 하심으로그가 자가 됩니다. 미디안의 대군을 가볍게 제압할 있는 강한 자가 됩니다.

 

기드온의 이런 영적 실상은 그가 미디안 군대와 싸우는 싸움에서 매우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미디안과 전쟁을 하기 위해 기드온을 따르는 백성들의 수가 3만명이 훌쩍 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들 대부분을 집으로 돌려보내시고 오직 300명만 남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걱정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기드온의 군대는 너무 컸습니다. 너무 커서 그들이 교만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따르는 대신 자신들의 꾀를 따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대신 자신들의 승리를 자랑할 위험이 매우 높았습니다. 하나님께 필요한 것은 그런 군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온전해 드러낼 작은 였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기시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드러내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은 기드온이 전투에서 사용한 도구에서도 드러납니다. 기드온 군대가 사용한 도구는 항아리와 횃불이었습니다.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들은 각각 항아리 안에 횃불을 감추고 적의 진에 몰래 가까이 다가간 , 일제히 항아리를 깨뜨려 횃불을 드러내고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자 놀란 미디안 적들은 서로를 칼로 치며 도망하였습니다. 여기서 항아리 사람을, “횃불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사람은 흙으로 만든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질그릇 안에 하나님께서 불로 임하시고 거하실 , 질그릇은 무서운 하나님의 병기가 되는 것입니다. 작은 이며 동시에 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아볼 있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제사장 사가랴가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할 ,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기를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기는 장차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할 세례 요한입니다. 아기에 대해 천사는 저가 앞에서 자가 되며 ……”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1:15). 세례 요한은 하나님 보시기에 였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누가복음 3:16).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라고 소개하며, 반면에 자신을 가리켜 예수님의 신발 끈을 자격조차 없는 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 다수가 돌이켜 예수님을 따르게 되자 이를 섭섭하게 생각하기는 커녕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말합니다 (요한복음 3:30). 그는 앞에서 정말 실오라기 만큼의 (Greatness)”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자신을 Nothing으로 보았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예수님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 그의 일이었으며, 예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높임을 받으시는 것이 그의 기쁨이었습니다. 이런 그를 가리켜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중에 세례 요한보다 자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1:11).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되기를 원하며, 남보다 자가 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높은 지위에 오르며, 많은 부를 쌓으며, 권세를 갖기 위해 경쟁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은 모든 씨보다 작은 겨자씨 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되기 위해서 길을 걸어왔다면, 그리고 많은 것을 쌓아올렸다면, 우리는 쌓아놓은 것들을 포기하고 다시 원래의 지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욱 작은 되기 위한 새로운 여정을 출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같은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들은 자기들끼리 누가 큰가?” 문제를 놓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사실 이들은 대부분 갈릴리 시골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었습니다. 정말 내세울 것이나 자랑할 것이 전혀 없어 보이는 작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가 되기 위해 서로 치열하게 경쟁했습니다. 우리 사람들 속에 되기 위한 욕심이 얼마나 뿌리가 깊은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가복음 9:3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끝이 되며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가장 작은 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비우고 안에 예수님을 담는 과정입니다. 가장 작은 겨자씨 되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매우 실망스럽게 들렸을 것입니다. “가장 자가 되기 위해서 가장 작은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냥 자체로 모순 아닐 없습니다. 제자들은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른 것이지, 사람의 끝이 되어 종처럼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한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지금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는 우리 크리스천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혹자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신앙 생활을 가리켜, “예수님이라는 나무(tree) 흔들어 나무 가지에서 떨어지는 축복의 열매를 삶에 주어 담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축복의 열매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고 기대하는 것들입니다. 마디로 말해서 우리도 제자들처럼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참된 신앙은 이것이 아닙니다. 대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나무 되어, 다른 사람들의 그늘 되라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겨자씨 알이 자랐을 때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말씀에서 우리는 가장 사람을 섬기는 서로 모순되지 않음을 있습니다. 겨자씨 알이 크게 자라고 무성해져서 새들이 깃들 만한 그늘이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예수님이며 예수님의 삶입니다. 이사야 32:1-2절은 장차 오실 예수님께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장차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며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 폭우를 가리우는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바위 그늘 같으리니 ……”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가장 되시는지를 우리에게 설명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왕이 되신 것은 그가 모든 사람들의 피난처요 안식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끝이 되어 섬기는 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을 위해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희생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이런 나라입니다. 나라의 왕이 자기 백성들을 위해 낮아져 섬기며, 이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 우리 크리스천들은 우리의 피난처요 안식처 되시는 예수님 안에 사는 자들이며, 동시에 예수님을 자신의 유일한 삶의 원리로 영접하고 원리에 순종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은혜와 진리로 사는 삶이며, 이것이 바로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며 예수님께서 안에 거하신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5:4).

 

우리가 작은 겨자씨 알이 되며 자가 된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자신에 대해서 죽고 예수님께 대해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직 안에 계신 예수님에게서만 나의 삶의 의미와 삶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자신이 Nothing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 놀랍게도 우리가 Nothing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에 계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님 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을 밝히는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예수님의 형상을 보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우리의 섬김을 통해 사람들이 그들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며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됩니다. 곳에 참된 안식과 평화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많은 영혼들이 그늘에 깃들게 됩니다. 마치 우리도 예수님처럼 왕이 같은 고상하고 뿌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가장 작은 자가 되어 가장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자들에게 임하는 참된 하나님 나라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고 누리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