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
마가복음 5:1-20
오늘은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서 만나신 한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일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정체성”과 관련하여 얘기하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께서 이 귀신 들린 사람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신분증 검사 (ID check) 같은 것입니다. 각 사람들은 “정체성 (Identity)”이라는 것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개인적인 신념 또는 생각입니다. 정체성은 기본적으로는 나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시켜주는 나만의 특징이기도 하고 (예를 들어, 나의 이름), “나”라는 존재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주는 나의 장점들이기도 하고 (예를 들어, 나의 직업, 학력, 재산 등), 더 나아가서 나에게 어떤 그룹이나 조직의 일원으로서 소속감을 부여하는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인). 그러므로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는 매우 많고 다양하며, 또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고 변하며, 우리의 삶에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요즘 사회는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을 많이 강조한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그 사람의 개성, 자신감, 신념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예로, 과거에 여자들은 대개 “OO의 아내”나 “OO의 엄마”로서 “의존적인” 정체성을 가졌다면, 요즘은 자신의 이름으로 불려지기를 원하며, 또 자기 자신의 능력과 업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정체성은 내가 인식하고 있는 “나”라는 사람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제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이루어낸 결과물이기도 하며, 동시에 내가 앞으로 삶을 살아갈 토대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정체성”은 우리가 행복하고 건강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사는데 있어서 너무나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만나는 사람은 이 정체성이 완전히 무너지고 황폐하게 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속에 있는 더러운 귀신들을 내어쫓으시고, 그를 온전하게 하십니다.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서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나오시자 더러운 귀신에 들린 한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3-5절 말씀은 이 사람의 현재 형편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형편은 한 마디로 말해서 “통제불능(Uncontrollable)”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고랑과 쇠사슬로 묶어서 억제하려고 했지만, 그는 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습니다. 힘으로는 그를 당해낼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괴성을 지르며 무덤 사이나 산을 돌아다녔습니다. 또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15절에 정신이 온전해진 후 “옷을 입었다”고 한 것을 보면 아마 옷도 입지 않은 채 들짐승처럼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가 왜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많은 귀신에 들렸다는 것이며, 이런 그에게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영적인 문제”를 겪고 있는데, 사람들은 오직 “육적인 방법”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3절에 “이제는 (any more)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그래도 형편이 아주 나쁘지는 않아서 쇠사슬을 사용해서 그를 억제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적인 형편은 더욱 나빠지고 결국은 이렇게 쇠고랑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에 이르고 만 것입니다.
앞에서 “정체성”이란 “나”라는 존재를 채우고 있는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나”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존재인지를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물들을 주섬주섬 꺼내서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학자에게 그 내용물은 “지식”이 될 것이며, 부자에게 그 내용물은 “돈”이 될 것이며, 지도자에게는 “지도력”이 될 것이며, 현자에게는 “지혜”가 될 것입니다. 지혜가 없다면 현자로서의 정체성은 포기해야 할 것이며, 돈이 없다면 부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영적으로 어떤 사람인가, 곧 나의 “영적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내 안을 채우고 있는 “영적 내용물”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의 영적 내용물은 “군대 귀신”입니다. 많은 수의 귀신들이 그의 영혼 속에 거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영혼이 “귀신들의 거처”가 된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사람이 더러운 영들의 “집”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1:24-26절에,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을 찾아 다니다가 찾지 못하자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며 본래 그가 거하던 사람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의 집이 깨끗하게 소제되고 수리된 것을 보고는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함께 들어가 거하면서 그 사람의 형편이 더욱 나빠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반대의 경우에도 사실입니다. 사람이 “더러운 귀신들”이 거하는 집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또 “거룩한 영” 곧 성령께서 거하시는 집이 되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3:16-1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이 말씀에서 바울은 믿는 자를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 곧 성령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 자라고 합니다. 사람은 본래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영적 정체성은 그 안에 거하는 영으로써 결정됩니다.
예수님은 “영적 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사가 하는 일은 우선 병을 진단하는 것이며, 다음은 그 병을 치료하고, 마지막으로 건강한 삶을 살도록 필요한 처방과 안내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 군대 귀신 들린 불쌍한 사람을 위해서 이와 같은 일들을 다 하십니다. 우선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심으로 이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것들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십니다. 이렇게 이 사람을 치료하신 후에 그를 “데가볼리” 지방에 예수님의 이름을 전파하는 선교사로 보내십니다. 사실 오늘날은 “영적인 문제”에 거의 관심이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큰 이유들 중 하나는 아마도 “도시화 (urbanization)”일 것입니다. 곧 사람들의 삶이 복잡해지고, 만나야 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신경을 써야 할 일들도 다양해졌습니다. “정체성”이라는 면에서 볼 때도,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한 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 복잡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회의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관계들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고집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만나는 사람에 따라,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 따라 민첩하게 변신하는 것이 더 지혜롭게 보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결국 “진정한 나”가 아닌 거짓된 가면들을 시시때때로 바꿔 쓰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영리함도 곧 한계에 이르고 내면은 피폐하게 됩니다. 이렇게 바쁘고 복잡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을 찾아 목말라 합니다. 이런 외진 곳에서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거짓된 가면들” 곧 “가짜 정체성들”을 다 벗어버리고 그냥 “본래의 나”가 되어 아무 생각 없이 “멍을 때리며” 편히 쉬고 싶어합니다. 어둠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간섭이 없이 본능에 따라 자유롭게 살고 싶어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신앙” 마저도 또 하나의 짐이며, 거짓된 가면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런 현대인들은 영적으로 보면 “빈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사단 마귀의 영적 공격에 취약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흥미롭게도 오늘 본문의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이 살던 고장을 “데가볼리”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20절). 사실 “데가볼리”란 특정 지역의 이름이 아니고, 헬라어로 Deca Polis (Ten Cities – “열 개의 도시들”이라는 뜻), 곧 그 지역에 헬라식 스타일로 건설된 열 개의 도시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말입니다. 아마도 이 귀신 들린 사람은 그가 사는 지역의 이런 도시 문화의 희생자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오늘날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들의 삶이 이 군대 귀신 들린 자의 삶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낮에는 사회 생활이라는 “쇠고랑”을 차고 억눌린 자아를 가면으로 가린 채 영혼 없는 삶을 살다가, 밤에는 이 모든 것들을 벗어버리고 “자유롭게” 어두운 곳을 찾아다니며, 괴성을 지르고, 그 영혼이 다치기까지 향락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신 분열”의 고통을 겪습니다. 이런 영혼들을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악한 영들입니다. 세상과 개인들이 악한 영들에 너무 깊이 사로잡혀 있어서 마치 그것이 “나”인 것처럼 동질화(identify)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영적인 문제인지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영적인 의사이십니다. 그 빛으로 우리 영혼을 비추시며, 악한 영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잃어버린 채 고통당하고 있는 “본래의 나”를 회복해 주십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며 각 개인의 영적인 정체성은 그의 안에 거하는 영으로써 결정됩니다. 곧 그 안에 악한 영들이 거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령께서 거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육체가 매일 음식을 먹고 마시며 공기를 호흡하여 그 생명을 유지하듯이, 우리의 영 또한 그 생명을 위해 매일 채워져야 하는 “소욕들(desires)”이 있습니다. 악한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는 대신, 우리 자신의 정욕을 따라 살라고 유혹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생명의 길이며 행복의 길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오늘날 젊은 사람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모토들 중 하나가 바로 “너 자신이 되어라 (Be Yourself)”라는 말입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다르게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이 말을 풀어 쓰자면 “다른 사람들 눈치 보지 말고 네 욕심대로 살아라”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 여자를 유혹하는 뱀의 말과 비슷합니다. 뱀은 여자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게 하기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5). 이 말은 이제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뜻(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옳고 그름) 같은 것은 잊어버리고, 너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라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달콤하고 매력적인 조언입니까? 이 말을 듣고 속은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보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이제 여자는 그 열매를 간절히 원하게 되었습니다. 에덴 동산에는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주신 다른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창세기 2:9)이 많이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 속은 오직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그러자 이를 금지하신 하나님이 미워지고 싫어졌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버렸습니다. 그녀는 그것이 생명의 길이요 행복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뱀의 유혹에 속아서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정욕대로 행했을 때, 그녀의 영혼 속으로 기어들어온 것은 “죄”였습니다. 수치심과 두려움이었습니다.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마귀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너 자신이 되라”는 유혹의 결과 사람이 갖게 된 비참한 “영적 정체성”인 것입니다.
군대 귀신 들린 자에게 예수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을 때, 그는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이 대답을 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귀신이 마치 그 사람 자신인 것처럼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귀신에 사로잡힌 자가 겪게 되는 증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이것이 우리 각자가 갖고 있는 정체성의 본질입니다. 정체성(identity)이란 어떤 것이 “나와 동질화된 (identified with me)”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자”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돈이 그 사람과 동질화된 것입니다. 돈은 물론 그 사람 자신은 아닙니다. 그것은 금고에 쌓여있거나 은행 계좌에 들어있습니다. 부자는 그 돈을 소유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과 그가 소유한 돈은 “한 몸”입니다. 그가 가진 돈은 그 사람의 일부입니다. 그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는 항상 “부자”로 인식될 것입니다. 그는 때로 이것을 불편해하고 “부자”가 아닌 “본래의 나”로 인식되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가 침묵하더라도 그가 소유하고 있는 돈이 벌써 입을 열어 “나는 부자입니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돈이 그를 소유하고 그를 대신해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정체성이란 무엇인가가 나와 동질화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아주 순수한 의미에서의 “나”라는 존재는 없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모든 사람은 “하나님 밖에 있는 나” 또는 “하나님 안에서의 나”로 발견됩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필연적인 영적 정체성입니다. 에베소서 5:8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신자들을 가리켜 “주 안에서 빛”이라고 부르며, 또 “빛의 자녀들”이라고 합니다. 이 빛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빛 안에 거할 때, 우리 자신이 빛이 되고 동시에 빛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는 자체가 바로 우리 자신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빛 밖에 거할 때는 “어두움”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과거 정체성이었습니다. 하나님 밖에서는 내가 누구이든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하든지 다 어두움입니다. 디도서 3:3절은 우리의 과거 이 어두운 정체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하는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지으신 분이시며,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로 소유하시고 축복하시며, 우리가 세상을 관리하고 다스리도록 책무와 권한을 주신 분이십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만” 비로소 우리가 창조 시에 가졌던 “본래의 나”를 완전히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나”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떠나 어두움 속에 갇혀 마귀의 종이 된 비참한 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본래의 나”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둘째 아들의 비유에서와 같이, 돌이켜 회개하고 내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후 배를 타고 떠나려 하시자 그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대신에 그가 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19절). 이 말씀에 따르면, 이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큰 일을 행하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 예수님의 이름과 은혜를 친속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일 또한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의 마지막 날에 제자들에게 명하신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찬식”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도록 하신 것이며, 둘째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것입니다. 앞의 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며, 뒤의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가르침에 순종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주십니다. 그 정체성은 온전히 예수님의 은혜에 기초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바로 “새로운 나”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10절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 말씀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자신으로 동질화시킵니다. 그는 이 은혜를 기초로 많은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심지어 그것조차도 그는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이는 그 삶 전체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져 있음을 말합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자신의 삶에 대해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영적 싸움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의 정체성으로 지키는 싸움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대신 우리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하나님처럼” 높아지라고 유혹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대신, 자신의 업적을 쌓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기 영광” 곧 “자기 정체성”에 대한 욕심의 결국은 오늘 우리가 본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의 비참한 삶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 앞에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 싸움의 무기는 “겸손”입니다. 겸손히 낮아져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며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마귀가 거할 자리가 없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채워집니다.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은혜가 많은 사람”이 영적 싸움을 끝까지 싸우고 또 그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는 이 싸움이 다른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거하며, 그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 은혜에 기초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영적 싸움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12:1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은 “영적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그것은 어린 양의 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고 이를 증거하기 위해 죽기까지 헌신하는 것입니다. 죽음조차도 이들의 “정체성”을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는 자의 삶입니다. 우리 각자가 참으로 예수님의 은혜로 된 자요, 예수님의 은혜로 사는 자요, 또 그 은혜를 지키고 전하기 위해 죽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