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혈루증 걸린 여인을 치료하신 예수님 - 믿음의 원리들 (I) (마가복음 5:21-43)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2. 21. 01:57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혈루증 걸린 여인을 치료하신 예수님

믿음의 원리들 (I) –

 

마가복음 5:21-43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시고, 혈루증 걸린 여인의 병을 치료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은 별개의 사건이지만 혈루증 여인을 치료하신 일이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이야기 속에 삽화처럼 들어가 있어서 이야기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실제로 이야기는 모두 믿음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혈루증 걸린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딸아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하십니다 (34). 딸이 죽었다는 소식에 절망한 회당장 야이로에게 예수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십니다 (36).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온 이들의 믿음의 행동과 이로 인해 일어난 일들을 통해서 믿음 관한 여러가지 원리들을 배울 있습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우리가 본문 말씀을 통해서 관찰할 있는 믿음의 원리들을 가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난 밤에 바다 건너 거라사인의 지방에 가셔서 그곳에서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후에 곧장 배를 타시고 원래 계시던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닷가에서 무리들과 함께 계실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님께 와서 아래 엎드려 자신의 죽어가는 딸을 살려주실 것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회당장 (synagogue ruler)”이란 유대인들이 예배, 교육, 집회 등의 용도로 사용하는 회당의 최고 관리 책임자를 말합니다. 이들은 회당을 관리하면서 동시에 말씀을 가르치거나 가르치는 자들을 정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당시 회당은 사람들의 생활을 감독하고 규율하는 사실상 종교 정부(spiritual government)”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회당장은 지방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영적 지도자라고 있습니다. 그런 회당장 야이로가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예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명의 주인공은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였습니다. 혈루증은 자궁내 질환으로 인해 불규칙한 하혈이 일어나는 부인병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혈루증을 유출병 (discharge)”이라고 하며, 레위기 15:2절은 누구든지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유출병을 인하여 부정한 자라 정하고 있습니다. 7절에는 유출병 있는 자의 몸에 접촉하는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합니다. 규정에 따르면, 혈루증을 앓는 여자는 부정하며 따라서 다른 사람과 접촉을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생각하기를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하며, 무리들 가운데 숨어서 몰래 예수님의 뒤로 다가와 주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병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본문 말씀을 통해서 배울 있는 가지 믿음의 원리들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믿음은 구원 관한 것입니다. 23절에, 야이로는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 얻어 살게 하소서간구합니다. 34절에, 예수님은 혈루증 여자에게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하십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구원 관한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은 죽음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물론 아무도 문제를 해결할 없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최선의 이란 심히 통곡하며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자의 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12년동안이나 병을 앓았습니다. 마디로 불치병입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있는 재산을 허비했으며, 전국에 용하다는 의사들은 모두 찾아가 만났습니다. 하지만 의사들은 돈만 받아먹고, 오히려 여자에게 많은 괴로움을 주었으며 그녀의 병은 더욱 악화되기만 했습니다. 질병과 죽음은 희생자들의 존재자체를 위협하는 강하고 무서운 원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도울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강하고 무서운 원수의 손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나는 야이로와 같은 죽어가는 딸이 있거나, 여자처럼 불치병을 앓고 있지 않아!” 이렇게 생각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어떤 신실한 크리스천이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먹고, 마시고, 잠자는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지만, 그들이 영원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하지 않습니다 (Most people think, speak, and write the way they sleep, eat, and drink, without any question ever arising as to their relationship to the eternal).”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문제가 없는 것처럼 그것을 덮어놓은 , 당장 오늘먹고 마시고 잠자는 일에만 골몰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상의 삶에 문제가 없다면 내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 가치를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 갖지 못합니다.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라는 존재는 절대 독립적으로 생존할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안에, 내가 안에 있으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말씀에 따르면, 나무와 가지가 몸이듯이 예수님과 나는 입니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예수님 안에서만 생명이 유지되고 계속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것으로써 사람은 이미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고, “죽음 그늘 아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39절은 우리 신자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회당장 야이로와 혈루증 여자가 오늘겪고 있는 어려운 질병과 죽음의 문제는 우리가 또한 내일아니면 모레겪을 일들입니다. 그리고 멸망에 떨어지는 외에 우리에게 뒤로 물러날 있는 길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문제는 훨씬 크고 심각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하십니다 (히브리서 9:27).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주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 밖에서 우리가 당할 멸망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비참하고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이란 말이 얼마나 보배롭고 소망스러운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의 주가 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 대한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베드로전서 1:9).

 

믿음은 개인적 것입니다. 믿음이란 내가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무리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21절에는 무리 예수님께로 모여들었다고 하며, 24절에는 무리 따라가면서 예수님을 에워싸 밀었다고 합니다. 회당장은 그냥 무리들 틈에 숨어 있으면서 눈에 띄지 않게 마음 속으로 원하는 바를 기도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예수님 앞에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기의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아뢰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눈에는 그만 보였습니다.  이렇게 1:1 개인적인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혈루증 앓는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회당장과는 달리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무리들 속에 숨겼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믿음 예수님께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을 ,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에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시고 그녀를 찾으셨습니다. 결국 여자는 예수님 앞에 나아와 모든 사실을 말씀드려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과 여자 사이에 1:1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속하거나 모임에 참석하는 신앙 생활 믿음이라고 생각할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지 못해도, 교회나 목회자가 나를 대신해서 나의 구원에 필요한 어떤 일을 담당할 있다고 생각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나와 예수님 사이의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1:1 만남입니다. 물론 교회나 목회자가 개인을 도와서 그가 예수님과 관계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일은 있지만 이상은 아닌 것입니다. 결국은 내가 예수님께 대해서 개인적으로알고 믿고 나의 구원을 의탁하는 연합이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과 사이에 1:1 믿음을 통해 내가 예수님과 연결되고 예수님의 은혜가 내게로 흘러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와 예수님 사이에 다른 아무 것도, 아무 사람도, 심지어 아무 종교 끼어들 없습니다. 여자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을 예수님 안에 있는 능력이 빠져나갔다고 말합니다. 당시 예수님을 에워싸고 몸에 손을 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여자에게서만 예수님과의 실질적인 연합 일어났습니다. 이는 그녀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개별성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밤에 남자가 자리에 누워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누가복음 17:34-35). 우리는 절대로 나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에 맡겨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예수님의 내게 대한 은혜를 통해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 각자는 반드시 나의 예수님 마음 속에 모셔야 합니다.

 

믿음은 겸손함과 간절함으로 표현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회당장은 마을 사람들의 영적 생활을 감독하고 지도하는 최고의 지도자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다른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주는 일에 익숙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수치를 무릅쓰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를 낮추어 예수님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체면을 뒤로 하고 많이 간구했습니다. 혈루증 걸린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정한 병을 가진 그녀가 몰래 행동은 법으로 금지된 것이었습니다. 또한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예수님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건장한 남자들을 뚫고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람들과 거친 몸싸움을 벌이다 보면 여자로서 지키고 싶은 고상함과 우아함이 망가지고, 많은 사람들 앞에 보기 민망한 부끄러운 모습으로 나타날 있습니다. 병을 고치기는커녕 창피만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그녀의 믿음은 단지 좋은 생각 그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일에 자신의 몸을 내던졌습니다. 이들은 모두 간절했으며, 예수님 앞에 겸손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믿음은 구원에 관한 것이며, 구원은 우리에게 필요하며 우리가 원하는 전부 (everything)”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을 잃더라도 절대로 놓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25). 전부를 주실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주님께 대한 믿음은 모든 것들을 뒤로 주님의 아래 엎드려 간절히 구하는 기도로써 표현되어야 합니다. 반대로도 생각할 있습니다. 겸손함과 간절함으로 표현되지 않는 믿음이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눈속임입니다. “외식(hypocrisy)”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보이고 영광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고 금식하고 구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 하십니다 (마태복음 6:2,5,16). 상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은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칭찬하는 자들과 칭찬 받는 자들이 서로 속고 속이며 결국은 함께 멸망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는 일에 우리의 전부를 걸어야 합니다. 구원이야말로 우리가 받을 유일하고 영원하고 복된 하나님의 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건 예수님께서 혈루증 여자를 고치신 일과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은 시간의 측면에서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자의 혈루증은 12년이나 계속되어온 만성의 불치병입니다. 그런데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을 병이 즉시나았습니다. 29 말씀입니다. “이에 그의 혈류 근원이 (Immediately)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야이로의 딸의 경우, 전혀 다른 시간적 전개를 있습니다. 딸의 나이가 (42) 어린 것을 보면, 건강하던 아이가 갑자기 병에 걸린 같습니다. 회당장은 어린 딸이 죽게 되었다 하며 (23), 실제로 예수님께서 그의 집으로 가시던 도중에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을 보면, 딸의 상태가 촌각을 다툴 정도로 매우 위급했음을 있습니다. 사실 즉각적인 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만성 환자인 혈루증 여자가 아니라 야이로의 딸이었습니다. 12 동안이나 앓아온 병의 치료를 서너 시간 미룬다고 해서 문제가 것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급한 야이로의 딸의 치료를 뒤로 미루시고, 혈루증 여인의 만성 질환을 치료하시기 위해서 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딸이 죽게 되는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에게 늦게 와서 미안하게 됐네!” 하시며 사과를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시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오래된 고질적인 문제도 즉시해결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다급한 문제에도 결코 서두르시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문제의 시간 휘둘리지 않으시고, 그냥 예수님의 시간을 따라 일하십니다. 그래서 시간이 없다고 급히 서두르시거나,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 포기하시거나 하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문제를 통해서 오랜 시간에 걸쳐 믿음의 훈련 톡톡히 받았습니다. 아직 아들이 없는데 자신과 아내 사라의 몸이 날로 늙어가자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실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여종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엘을 낳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 그의 아내 사라의 나이가 90세가 되었을 ,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그의 아내 사라에게 복을 주시며 그녀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으면서 속으로 말했습니다. “백세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창세기 17:17). 웃음을 지으면서 주님 너무 늦었네요!” 하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모습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서두르거나, 너무 늦어져 상황이 회복할 없게 되었다고 포기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혈루증 여인의 병을 즉시 치료하셨는지, 그리고 야이로의 딸이 죽을 때까지 길에서 시간을 지체하셨는지 뜻을 조금 이해할 있을 같습니다. 사실 믿음이라는 자체가 기다림의 시간 의미한다고 있습니다. 기다림의 시간 동안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해결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 나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시간을 참으며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소망하며 기다립니다. 하나님께는 너무 급해서 서두르실 일도, 너무 늦어서 포기하실 일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때가 있을 뿐이며, 때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위해 가장 좋은 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다시 살리시며,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자의 병을 치료하시는 사건을 통해서 믿음의 원리들을 가지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배운 믿음의 원리들은 우리가 예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을 키워나가기 위해서 잊어서는 매우 중요한 진리들입니다. 그리고 설교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서 다음 주일에 같은 본문을 가지고 믿음에 대해 좀더 공부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믿음의 비밀을 가르쳐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가 다른 무엇으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받는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