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6:1-15)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3. 8. 05:20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6:1-15

 

오늘은 예수님께서 다섯 개와 물고기 마리로 오천 명의 무리를 먹이신 일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적은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어서 (마태복음 14:13-21; 마가복음 6:32-44; 누가복음 9:10-17; 요한복음) 특별히 의미 있는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기록된 일들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 있습니다.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 또는 발에 향유를 부은 일이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데, 여자에 대해 요한복음 12장에서는 마르다의 자매인 마리아라고 이름이 명시되어 있지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냥 여자 기록되어 있어서 (마태복음 26:7; 마가복음 14:3; 누가복음 7:37), 이들이 같은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 중에서는 오직 오병이어의 기적만 모든 복음서에서 나타납니다. 우리는 기적의 의미를 여러가지로 해석할 있겠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6 후반부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6:32), 그리고 생명의 ”(6:35,48)이라고 하시고, 세상의 생명을 위한 바로 예수님께서 주실 떡이라고 하십니다 (6:51). 예수님의 말씀들이야말로 오병이어 기적의 의미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하고, 오늘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라는 미국의 작가이며 미래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3 물결(The Third Wave)이라는 베스트 셀러 책을 썼는데, 책에서 그는 가지 물결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첫번째 물결은 농업 사회(Agricultural Society), 두번째 물결은 산업 사회 (Industrial Society), 그리고 세번째 물결은 정보 사회 (Information Society) 말합니다. 그가 책을 시기는 1980년이었습니다. 그는 첫번째 물결이었던 과거 농경 사회와, 산업 혁명으로 시작된 두번째 물결이 지나고, 이제 3 물결 정보화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견했습니다. 개인용 컴퓨터, 인터넷, 모바일 통신 등이 널리 보급될 것이며, 이와 관련된 비지니스들이 융성할 것을 예견했습니다. 그의 책이 나온 40여년이 지난 오늘날을 돌아보면, 세상이 그가 예견한 3 물결의 가운데 있음을 보게 됩니다. 미래 학자들이 말하는 물결(Wave)이란 좁게는 어떤 시대를 선도하고 지배하는 기술을 말하지만, 보다 넓게 보면 물결은 일종의 강물 같습니다. 물결을 타는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먹을 것을 얻고, 안정된 삶을 누립니다. 나아가 물결을 선점하고 이끌어가는 사람은 시대를 지배하는 권력을 쥐게 됩니다. 반대로 과거의 물결에 머무는 개인이나 기업이나 국가는 경쟁에서 뒤쳐지고 결국은 낙오하게 것입니다. 그래서 영리한사람들은 미래를 내다보며, 새로운 물결을 예측하고 대비하거나 심지어 새로운 물결을 창조하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를 가만이 살펴보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조용한 갈릴리 지방에 매우 강력한 물결 일으키신 것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시자, “ 무리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2). 5절에도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무리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좇는 사람들의 수가 5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시간 상으로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 그리고 장소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광야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유월절은 가장 크고 오래된 명절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41절에 부모(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1:55절에도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가까워오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시골 갈릴리 지방에서 5천명이나 되는 무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대신 예수님을 좇아 산과 바닷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2), 이제는 더하여 그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심으로 식량 문제도 해결해 주실 것으로 보였습니다. 예수님만 따라다닌다면 그들의 미래는 최소한 굶주림과 질병으로부터 안전할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참으로 세상에 오실 선지자라고 부르며, 주님을 그들 가운데 으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새로운 물결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강물을 의지하여 살며 많은 것들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셔서 제자들과 함께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향하여 오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여기서 예수님의 질문의 포인트는 어디서?”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가 떡을 구해서 사람들을 먹일 것인데 떡을 어디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빌립의 대답과 이어지는 다른 제자 안드레의 말은 이런 예수님의 질문의 포인트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들립니다. 빌립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빌립은 재빨리 들판을 뒤덮고 있는 사람들의 머릿수를 세어보고는 마음 속으로 계산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아주 조금씩 먹이기 위해서도 이백 데나리온이라는 거액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당시 1데나리온은 성인의 하루치 품삯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20:2절에 보면 포도원 주인이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할 품군들을 고용하면서 하루 데나리온 약속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오늘날 화폐 가치로 환산하여 하루 품삯을 10만원으로 잡아도2000만원이나 되는 거액입니다. 빌립의 뒤를 이어,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님께 여짜왔습니다. “여기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어린 아이가 가진 음식을 갖고 나온 것을 보면, 아마도 제자들 자신들이 갖고 있던 음식은 전혀 없었던 같습니다. 어떤 영어 성경들은 그냥 보리떡,” “물고기라고 하지 않고 작은 보리떡 (small barley loaves),” “작은 물고기(small fish)”라고 번역을 놓았습니다. 심지어 주인조차 어린 아이(little boy)”입니다. 안드레는 이것들을 예수님 앞에 보이면서 스스로 한심한 말했습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빌립과 안드레의 말은 우리 사람들이 갖고 있는 문제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200데나리온이라는 필요 있지만, 우리가 가진 것은 필요를 채우기에 너무나 작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하며, 슬퍼하며, 불평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둡고 가난합니다. 쫓기며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오천 명은커녕 명의 이웃을 돌아보기도 힘이 듭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병이어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부끄러워 숨깁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우리의 필요를 채워줄 새로운 강력한 물결 애타게 찾고 기다립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안드레가 가져온 오병이어를 보시고는 그것을 무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시켜 사람들을 잔디밭 위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서 가져온 떡을 취하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떡을 떼어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셨습니다. 그리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배부르게 먹고, 남은 조각을 거두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의 접근 방법은 제자들의 그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반대였습니다. 빌립은 없는 “200데나리온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절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사서 무리들을 먹이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앞에 놓인 오병이어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을 받으시고, 감사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있는 그대로 기뻐하시고, 그것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마음에 계획하신 사랑의 , 선하신 뜻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오병이어 예수님께서 세상을 먹이시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새로운 물결 임하시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생명의 양식이 되시고, 행복의 근원이 되시는 방법입니다.

 

이사야 8:6-8a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라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 그러므로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하수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모든 곬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강을 끼고 건설된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예루살렘은 꼭대기에 세워져서 그런 강이 없습니다. 대신 예루살렘 밖에 기혼샘(Gihon Spring)이라는 샘이 있어서, 곳에서 솟아난 물이 개의 수로를 통해 내의 실로암 연못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이란 바로 물을 가리킵니다. Wikipedia 따르면, 샘은 간헐천(intermittent spring) 이라고 합니다.  물이 항상 콸콸 솟아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때는 나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멈추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천히 흐르는 이라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천천히 흐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물을 맑고 깨끗한 생명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보기에는 물이 너무 초라했습니다. 이들은 다메섹이나 앗수르나 애굽에 있는 강들을 부러워했습니다. 좌우편으로 넓고 기름진 옥토가 펼쳐져 있고, 강물을 타고 크고 작은 배들이 바쁘게 오가며, 진기한 물건들이 가득 쌓인 쇼핑몰들은 차려 입은 손님들의 즐거운 웃음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이런 세상의 물결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들이 초라하고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기는커녕, 이를 싫어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풍속을 좇으며 그들과 같이 것을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상의 물결로 덮으셨습니다. 물이 넘쳐 목에까지 차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물결이 아니라, 멸망과 죽음을 가져오는 물결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다시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찾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생명의 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학자들이 말하는 물결이란 결국 사람들이 그들의 생존과 안위와 권력을 얻기 위해 의존하는 세상의 거대한 흐름입니다. 사람들은 강물로부터 먹을 빵을 얻으며, 마음의 안식을 누리며, 나아가서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을 잡기도 합니다. 물결은 난폭하고 사나워서 많은 사람들이 흐름에 휩쓸려 떠내려가거나 죽기도 합니다. 그리고 물결은 시대를 따라 변하고,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하지만 영원한 물줄기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흘러 나오며, 오직 물줄기만이 우리에게 생명과 평안과 풍요로움을 줍니다. 시편 46:4 말씀입니다. “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시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두신 예수님이십니다. 예루살렘 성문 밖의 기혼 샘처럼 맑고 시원한 물이 샘에서 끊임없이 솟아나 천천히 흐르며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하는 것입니다.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는 광야에 5천명의 무리가 모여있습니다. 마가복음 6:34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들을 목자 없는 같이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무엇인가 먹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드려진 초라한 오병이어 받으사 축복하시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오천 명의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것은 분명 기적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축복하시는 영원한 영적 원리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의 행복과 만족을 간절히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가난하고 부족한 우리를 기뻐하시고, 존중하시며,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겸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난함을 가지고도 뜻을 넉넉하고 영광스럽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들 가운데 왕으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떠나 홀로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것이 이번 뿐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적들을 몰아내시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매우 실망스럽게도, 예수님께서는 왕이 되시는 대신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바꿀만한 크고 새로운 물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흥분시켰던 거대한 물결은 예루살렘 성문 밖에 세워진 십자가 위에서 갑자기 멈춰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천천히 흐르는 샘물 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오병이어 되셨습니다. 이것은 앗수르의 거대한 하수와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앨빈 토플러의 3 물결과 같지 않습니다. 샘물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샘물이야말로 우리의 생명과 만족을 위해 필요한 전부입니다. 물은 변하지 않으며, 흐름을 멈추지 않습니다. 비록 천천히 흘러서 어떤 때는 흐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코 마르지 않습니다. 3 물결은 세상을 바꾸어 놓았지만, 그것은 영혼을 구원하거나 영혼의 굶주림을 채워줄 없습니다. 4 물결에 대해, 사람들은 생명공학이 새로운 시대의 주류가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술을 통해 사람들은 아마도 하나님 없는 오병이어의 기적 꿈꾸며, “하나님 없는 치료의 기적 꿈꾸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기술이 건설적이기보다 더욱 파괴적이며, 이러한 거대한 흐름들이 우리의 삶을 불안하고 두렵게 만들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세상의 흐름을 읽어내기 위해 미래학자가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세상의 난폭한 물결에 편승하고 살아남기 위해 긴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자신이 세상의 시작부터 끝까지 흐르는 강물이 되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의 원천이시며, 평안의 원천이시며, 능력이 원천이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 광야에서 오병이어만 가졌더라도 우리는 이미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넘치는 하나님의 궁정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없는 것들을 인해 걱정할 것이 아니라, 세상의 물결을 따라 방황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을 돌려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실 일들을 기대해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혼란한 세상으로부터 감춰져 깊이 흐르는 마르지 않는 샘물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오병이어를 축복하시고 그것을 영원한 생명과 만족으로 바꾸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