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 - 타락(Degeneration)이냐 갱생(Regeneration)이냐? (요한복음 6:22-71)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3. 15. 04:25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

타락(Degeneration)이냐 갱생(Regeneration)이냐? –

 

요한복음 6:22-71

 

오늘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이란 쌀가루를 쪄서 만든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란 사람이 먹는 모든 음식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27절에는 대신 양식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떡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매일 끼를 먹어야 삽니다. 사실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성분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우리가 이제까지 먹어온 음식들로 것입니다. 그러므로 떡은 우리의 생명과 같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지 음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27 말씀입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우리에게는 썩는 양식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있습니다. 썩는 양식이란 그것을 먹더라도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양식입니다. 그리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우리로 죽음을 이기고 영생에 이르도록 하는 양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양식이란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마리로 오천 명의 사람들을 먹이신 일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일이 있은 , 예수님께서는 홀로 남아 산으로 들어가시고, 제자들을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늦게 위를 걸어 앞서 가던 제자들 일행과 합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홀로 남아 계신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이시지 않자, 배를 타고 예수님을 찾아 가버나움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발견하고 몹시 반가워하며 말했습니다.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간절히 자신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말씀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6: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사람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따라 바다를 건너고 산에 오른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궁금해하며, 가르치심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하지만 떡과 물고기를 배불리 먹은 후에 이들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다시 떡을 먹고 배부르기 위해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이것을 타락(degeneration)”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후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계속 떡을 만드실 생각이 없는 것을 알게 되자 실망하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66).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하셨습니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지난 내내 그물질을 했지만 고기를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몸도 매우 피곤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이렇게 많은 물고기를 잡았을 , 어부인 베드로는 당연히 !” 탄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며 기뻐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붙들고 같이 동업을 하자고 졸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오히려 깊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간청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 죄인 자신의 모습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과 당혹스러움으로 인해 그물을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힌 물고기는 그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한시바삐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하게도 예수님께서 그를 제자로 삼아 주시고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잡힌 물고기는 물론 자신의 생계 수단인 그물과 배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이것을 갱생(regeneration)”이라고 합니다. 많은 제자들이 떠난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물으시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67-69).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에게는 가지 양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양식이며, 다른 하나는 영적 양식입니다. 창세기 2장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에게 양식을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가지 양식을 주십니다. 창세기 2:16,17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 먹을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계명의 말씀을 주십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지으신 에덴 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생명 나무와 함께 동산 중앙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매일 나무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매일 동산 나무의 실과를 먹듯이, 그들은 매일 나무를 대면하며 그것을 금하신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의 마음 속에는 실과에 대한 많은 질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맛은 어떨지, 그것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것의 이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인지, 하나님은 그것을 동산 중앙에 두셨으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금지하셨는지 …… 모든 것이 자유롭고 풍요로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존재는 아마도 이들에게 괴로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신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들의 생명을 보전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계명은 그들에게 고난 동시에 영적 양식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를 매일 대면하면서, 그리고 많은 의문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떠올리고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매일 영적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양식은 (righteousness)”입니다. 하나님의 옳다 하심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먹는 영의 양식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하십니다 (27). “인을 치셨다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의 품질을 100% 보증하신다는 말입니다. 완전히 의롭다(perfectly righteous)” 말입니다. 우리가 100% 신뢰하고 먹을 있는 양식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이라고 하시고 (35), 나의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살이로라하십니다 (51b).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유대인들은 사람이 어찌 능히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하고 질문합니다 (52). 사실은 유대인들 아니라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도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생명의 되시며,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단순히 성찬식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떡과 잔을 나누는 것이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일까요? 우선 예수님께서 어떻게 생명의 되시는 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 속에 들어가 소화가 되어 결국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에너지로 사용되거나 신체를 구성하는 성분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어떤 물질이 사람을 위한 음식 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은 첫째, 사람이 먹을 있어야 하며 (edible), 둘째, 사람이 소화를 시킬 있어야 합니다 (digestible). 예를 들어, 따사로운 햇볕은 에너지를 가득 머금고 있지만, 사람은 에너지를 바로 먹고 소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대신 태양 에너지로 식물을 키워 채소나 과일을 수확하거나 그런 식물을 먹고 자란 동물을 잡아서, 우리는 그것을 먹고 소화시켜서 우리 몸에 필요한 에너지와 양분을 얻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이며 육체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마치 뜨거운 햇볕이나 심지어 타오르는 불과 같습니다. 이것은 먹고 소화하기는커녕, 우리가 만질 수도 없고 가까이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무서운 주인 같으며, 우리는 주인의 맹렬한 진노를 가라앉히고 겨우 숨을 쉬기 위해서 무거운 율법의 짐을 지고 노예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이 먹을 있는 하나님의 주셨습니다. 말씀이 육체가 되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땅에서 우리와 같이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 사시면서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 얻으셨습니다. 히브리서 5:7-10 말씀입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말씀에서와 같이, 예수님께서 온전하게되신 것은 우리와 같은 육체의 연약함 가운데 계시며 죽음의 고난을 당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으셨으며 경외하심으로 뜻에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온전하심 우리 사람이 먹을 있는 의의 음식으로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은 어떤 생명을 희생하여 얻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먹는 영적 음식 또한 예수님의 생명을 희생하여 준비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떡만 하늘에서 내린 이며, 우리가 먹을 있는 떡이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떡입니다 (33).

 

그렇다면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그것이 우리 속에서 소화되어 일부는 에너지로 사용되고 나머지는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성분들이 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을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음으로써 우리 속에 예수님의 형상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우리를 예수님을 닮은 자로 변화시킬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이며, 예수님의 형상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신명기 16:3절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 규례를 전하면서 칠일 동안 유교병을 먹지 말고 무교병 고난의 먹으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비록 노예였지만 음식에 관해서는 풍요로운삶을 살았습니다. 민수기 11:4-6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 외에 다른 먹을 것이 없는 것을 불평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육신적인 백성들을 40년동안 만나를 먹이시며 광야에서 훈련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만나는 참으로 고난의 이었습니다. 신명기 8:3절에 모세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너도 알지 못하며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의 여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생명을 얻는 길을 배우게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그리스도가 되신 것과 같이, 우리 또한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하십니다 (누가복음 9:23).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고난은 의미 없는 고난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겪는 고난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먹듯이, 그렇게 날마다 예수님의 고난에 참예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살을 먹고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으며, 또한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신다고 하십니다 (54). 오늘 본문에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39, 40, 44, 54). 그리고 이렇게 부활한 몸은 영원히 살게 됩니다 (47, 51, 54, 58). 예수님의 약속은 참으로 복되지만, 그것이 장래 이루어질 소망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어려움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현재의 만족,” 육체의 만족 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기대하는 축복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떡을 구하는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결과 이들은 실망하고 예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예수님의 약속은 마지막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현재의 삶은 예수님의 살을 먹는 ,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노랑 애벌레와 줄무늬 애벌레가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둘은 의미 있는 삶을 찾아 방황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노랑 애벌레는 나무 가지에 매달려 고치가 되어가고 있는 다른 애벌레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사이에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노랑 애벌레: 당신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같군요. 내가 도와드릴까요?

다른 애벌레: 아닙니다. 친구. 나는 나비가 되기 위해서 이렇게 해야 합니다.

노랑 애벌레: “나비라고요? 그게 뭐죠?

다른 애벌레: 그것은 당신이 원래 되기로 정해진 것이에요. 아름다운 날개를 갖고 있으며, 꽃들 사이를 옮겨 다니며 사랑의 씨앗을 전달해주는 일을 하죠.

노랑 애벌레: 안에 나비가 있다니! 믿을 없어요! 어떻게 내가 나비가 있나요?

다른 애벌레: 우선 애벌레가 되기를 포기할 있을 만큼 아주 간절하게 날기를 원해야 해요.

노랑 애벌레: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다른 애벌레: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보기에는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살아있어요. 생명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고, 삶이 바뀌는 거죠. 점이 나비가 되지 못한 죽는 애벌레들과 다른 점이죠.

 

애벌레는 안에 나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고치가 되는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이것은 애벌레로서 삶을 끝내고, 나비로서의 부활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시간 동안 애벌레는 고치 안에 갇혀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제자가 순간부터 마지막 부활하는 순간까지의 기간이 바로 고치로 보내는 시간 같다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붙들린 되어서 모든 것들을 포기한 오직 주님을 따르는 고난의 떡을 의지하여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에 하늘의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됩니다. 이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누가복음 20:36).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놀라운 은혜의 표적을 보았을 , 우리는 갈림길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는 은혜를 이용하여 현재 눈에 보이는 육신의 만족을 좇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의 길이며 죽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며 주님의 희생과 섬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길은 우리를 갱생으로, 부활로, 그리고 영생으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의미 없는 생고생이 아닙니다. 그것은 참으로 우리를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영광스러운 몸과 영으로 빚어가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생명의 떡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매일 떡을 의지하여 살며 하늘을 향해 가까이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