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6:1-6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향 마을에 가셨다가 그곳에서 배척당하신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지방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자라신 곳은 갈릴리의 나사렛이라는 동네입니다. 누가복음 4:16절에는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마을 출신이신지라, 성경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공생애 기간 중 갈릴리 지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셨지만, 주로 가버나움이라는 도시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던 중에 제자들과 함께 고향 마을 나사렛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나사렛은 외진 곳에 위치한 작은 산골 마을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45-46절에,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그 친구 나다나엘에게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에 대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보내시기로 약속하신 “그 분”이라고 소개하자, 나다나엘은 이를 의심하면서 이렇게 반문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이렇듯이, 나사렛은 참으로 별 볼일 없는 동네였습니다. 이런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많은 제자들을 데리시고 고향 마을을 방문하신 것은 “금의환향”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을 입구에 “나사렛의 자랑 예수!!!”라고 플래카드를 걸고, 큰 잔치를 열어 예수님을 환영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그 반대였습니다. 고향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고, 멸시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고향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의 옛날 모습을 기억하고, 이 기억 속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2절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많은 사람들이 놀라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찜이뇨?”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런 지혜와 권능을 갖게 되셨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였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옛날의 예수를 잊고, 이제 그들 앞에 지혜와 권능으로 행하시는 새로운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옛날의 예수”를 고집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리아의 아들 목수”로, “목수 요셉의 아들”로, 그리고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로만 기억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오직 “육체”로만 판단했습니다. 예수님의 “출신”과 “직업”만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규정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들은 교만했으며, 육신적이었습니다. 이들의 교만하고 육신적인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께서 거하실 자리가 전혀 없었습니다.
세상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하나님을 알되 경외하지는 않는 사람입니다. 이들 중 가장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되는 사람은 바로 셋째 부류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가까이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대신 자신이 왕이 되어 교만하게 행함으로 하나님의 훈련을 많이 받고 고생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의 교만함은 자주 “자신이 하나님과 가까우며 하나님을 잘 안다”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민수기 12장에, 모세의 누이이며 형인 미리암과 아론이 하나님의 종 모세와 다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한 구스 여자를 취한 것을 두고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들의 불만은 표면적으로는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것 때문이지만, 실상은 그 마음 속에 쌓여있던 교만함과 시기심과 경쟁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너만 하나님의 종이냐? 우리도 하나님의 종이다. 너만 선지자냐? 우리도 선지자다.” 이런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들의 말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러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모세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고 계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하십니다. 또 민수기 1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겸손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가까이 하시며 그에게 하나님의 은밀한 것들을 다 보이시고 함께 하시는 것은 모세가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 더 겸손하며 하나님께 충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는 “나”라는 존재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끼어 “중보자” 노릇을 하면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고 또 행하였으며, 또 하나님 앞에서는 백성들의 죄를 들고 나아가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하였습니다 (민수기 11:15). 정말 모세는 자신을 버린 채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한 것입니다. 하지만 미리암과 아론은 이런 모세의 고난은 모른 채, 다만 그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누리는 영광”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교만함과 시기심으로 모세를 비난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에게 모세는 그냥 “형제들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은 또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나”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에게 진노하시고 그녀에게 칠일 동안 문둥병을 앓는 벌을 내리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의 고향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을 보고 놀랐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놀라움은 곧 “차가운 비아냥”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사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정말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분”이심을 증명하고 고향 마을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 그들에게 더 크고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여 보여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시며 자신이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하심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많은 권능을 행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인정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고향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 예수님은 여전히 평범한 “마리아의 아들 목수”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보고 만지고 경험한 사람들이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영적인 눈이 멀어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예수님의 고향 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경계가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교만하고 육신적입니다. 곧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지하여 자신을 자랑하고 높이기를 좋아합니다. 이 본성은 너무나 뿌리가 깊어서, 우리가 의식을 하지 않아도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다 “나를 높이는 이 한 가지 일”에 몰두합니다. 그리고 이 본성 앞에서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도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람들의 교만하고 육신적인 본성을 잘 이용함으로써 좋은 인간 관계를 유지하고 또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리를 지어 서로를 칭찬하고 서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43-44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칭찬하고, 서로 높이고, 서로 영광을 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만을 구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며, 하나님께 충성합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인정을 구합니다. 그리고 이 길이 생명의 길임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시면서, 사람들도 자신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도록 도우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싫어합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높이는 대신, 자신들을 칭찬하고, 자신들을 높여주며, 자신들을 성공으로 이끌어주는 교훈들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저는 나사렛의 아들입니다. 저를 이렇게 키워주신 마을 어르신들께 감사합니다. 제가 성공하여 꼭 여러분들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박수로 환대하며 축복했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후원회”를 만들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만히 들어보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오직 “하나님”에 관한 것 뿐이었습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이들의 마음이 차가워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이는 이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42).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고향”이 꼭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 중 4절에서 예수님은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다고 하십니다. “고향”이란 장소보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고향입니다. 고향에는 주로 부모님과 형제들과 친척들과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 우리는 내 집 같은 편안함을 느낍니다. 반대로, 이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불신, 두려움, 경계심, 경쟁심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고린도 교회 신자들 가운데 여러 파벌들이 있었으며, 이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바울에 속한 자” 곧 “바울파”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베드로파,”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신을 “그리스도파”라고 하며, 같은 그룹끼리는 서로 뭉치고 다른 그룹들과는 반목했습니다. 이들이 자신을 “OO파”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직 자신이 따르는 사도가 “진짜 사도”이며, 자신이 속한 그룹이 “진짜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꾸짖으며,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본받도록 도왔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부르시고 구원하신 것은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며” (고린도전서 1:29), 그리고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1:30). 우리 신자들 각각은 모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고향” 같은 울타리가 생기게 됩니다. 그 안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 고향 집에 온 듯한 느낌이 듭니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나만의 자랑거리도 생깁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따르기가 점점 어렵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서는 아무것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랑할 것이 없으며, 예수님 안에서는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자랑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나를 높이고 나를 자랑하기 시작하면, 점점 예수님의 십자가가 부담스럽게 느껴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멀리하게 됩니다. 말씀과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은밀한 시간을 갖기를 싫어합니다. 조용히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며 충성하는 것이 어렵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예수님을 배척하게 됩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임을 자랑하면서, 동시에 예수님을 내 마음 밖으로, 내 “고향 마을” 밖으로 쫓아내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배척한 것과 똑같습니다. 이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을 보고는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찜이뇨?” 하고 놀라워합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지혜와 권능을 마치 “남의 것”을 빌려다 쓰시는 것처럼 그렇게 쓰신 것 같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그 능력을 쓰신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능력을 가지셨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40일 동안 금식하시고도 떡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 반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세상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일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 생명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며, 그 일로 인해 많은 수치와 조롱과 오해를 당하신다고 해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지혜로 자신을 위해 변명을 하시거나, 그 능력으로 자신을 구원하시거나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에 대해 이사야 53: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정말 예수님의 겸손한 순종은 신비롭고 아름답기가 그지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찾아 볼 수 없이 맑고 깨끗한 물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온전한 믿음의 순종이며, 세상 영혼들을 위한 온전한 사랑의 헌신입니다. 거기에는 “나”가 없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또 높이셔서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비록 세상의 고향에서는 배척을 받으셨지만, 하늘 아버지께서 계신 하나님 나라의 본향에서는 환영을 받으시고 높임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늘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후 우리의 고향은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항상 나그네로 살 뿐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마태복음 8:19-20). 머리 둘 곳 없는 나그네의 삶은 예수님 자신의 삶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좇는 우리들의 삶이기도 합니다. 언뜻 보기에는 “정처 없는 처량한 삶”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늘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어 놓으시고 기다리고 계신 “영원한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이 하늘 본향을 향해 움직여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나를 자랑하며,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고, 사람들 가운데 높임을 받고자 하는 것은 견딜 수 없이 무거운 짐을 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귀의 꾀임일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모든 육체의 자랑들을 부끄럽게 여기고 벗어 던지며,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고 자랑함으로 자유롭고 가벼운 마음으로 이 하나님 나라를 향한 믿음을 경주를 끝까지 잘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희생으로,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구원하고 이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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