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
요한복음 9:1-41
오늘은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 된 한 사람을 고치신 일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실 때에 거기에 한 소경이 있었습니다. 그는 엄마의 몸에서 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는 선천적 맹인이었습니다. 8절에 사람들이 그에 대해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말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지나가고 있을 때 그는 아마도 길 가에 앉아 구걸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소경 거지를 본 제자들은 예수님께 매우 심각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제자들은 소경으로 태어나 거지로 살고 있는 이 사람의 “불행한 삶”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했습니다. 그들 생각에 이 사람의 기구한 삶은 틀림 없이 “죄에 대한 형벌”이었습니다. 문제는 누구의 죄 때문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 자신의 죄 때문이라면,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가 무슨 죄를 지어 소경이 되었을까 하는 또 다른 의문이 생깁니다. 또 그 부모의 죄로 인해 소경이 되었다면, 이는 참으로 억울하고 부당한 일입니다. 이 소경 거지의 불행한 모습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갖고 있는 질문은 우리들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나 문제들을 “죄”와 연결시켜 생각합니다.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의 원인이 무엇이며, 누가 그 문제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누가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종교”라는 세계 속으로 들어오면 이런 고민은 더욱 깊어집니다. 사람들의 종교 행위란 거의 모두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 속에는 “죄”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들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는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또 죄로부터 비롯된 불행한 삶은 바꿀 수 없는 것이어서, 그냥 나와 내 가족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제자들이 말은 안했지만, 그들은 이 소경 거지의 불행한 삶 뒤에는 그를 이렇게 만드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암묵적인 항변이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에게 벌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계신 하나님은 하늘 높은 곳에 군림하시며 사람들의 죄를 정하시고 징계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또 한 편으로, 이 소경 거지와 같은 불행을 피한 자신들은 최소한 이 사람보다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불행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두려운 마음으로 소경이 있는 자리를 떠나며 그를 잊고자 할 것입니다. 참으로 “죄”는 무거운 쇠사슬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무겁고, 어둡고, 두렵게 만듭니다. 우리는 그것을 벗어버리고 자유롭고 밝은 삶을 살고 싶지만, 죄의 짐은 마치 등에 붙은 껍질처럼 언제나 우리 곁에 있으며, 우리의 삶을 옥죄고 짓누릅니다.
제자들의 의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뜻밖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먼저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이 소경 거지와 그 부모들에게 생명이 되는 말씀입니다. 이 거지의 날 때부터 소경 됨은 이 소경 본인에게, 그리고 그의 가족들에게 일생 견디기 어려운 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들을 보고 같은 질문을 하였을 것입니다. “도대체 저 사람들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오늘 본문의 34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눈을 뜬 이 사람을 핍박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이렇게 사람들은 그를 대놓고 죄인 취급하였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소경 거지와 그 부모들은 일생 숨을 죽이며, 죄인으로 살아왔습니다. 겨우 동전 몇 개를 던져줄 뿐, 어느 누구도 그들의 인생의 짐을 덜어주지 않았고 덜어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선포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니라!” 이 말씀은 소경 거지의 일생에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던 “죄인”이라는 낙인을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을 얽매던 쇠사슬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이 사람의 소경으로 난 것은 죄와는 상관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벌도 아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의미하는 바가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자주 하나님께서 세상과 멀리 떨어져 계시며 다만 “사람들의 행위”를 따라 가끔 상을 주시거나, 벌을 주시거나, 아니면 그냥 무관심한 분으로 생각합니다. 세상 대부분의 종교에서 “일을 하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입니다. 곧 하나님의 노여움을 달래고 그 분의 상을 받기 위해서 또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사람이 죽도록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정말 “일을 하는 쪽”은 사람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5:17절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것에 대해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따지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쉬는 날도 없이 매일 우리를 위해 일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시편 121:4-6절에,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해 일하심은 마치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 신실하심과 섬세하심과 인자하심은 사실 부모의 그것을 훨씬 능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이 몇 개인지도 다 아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며 (마태복음 10:30),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다 아시고 공급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6:32). 혹시 엄마가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거나 자기 태에서 난 아이를 긍휼이 여기지 않는 일은 생길 수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으시거나 긍휼이 여기시지 않는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사야 49:15).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밤낮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항상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구원“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 둘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그 이름을 높이십니다. 시편 23:3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의 목자이신 여호와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도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고 또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데, 그 일을 “자기 이름”을 걸고 하시는 것입니다. 곧 “나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이 사람의 소경으로 난 것이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 소경 거지의 삶과 매우 긴밀하게 엮여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이 소경 거지를 보고 “죄와 형벌”를 생각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저주 받은 삶에 엮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 이 사람은 하나님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은 사람이며,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으로 보기에 이 사람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그 품에 안으시고, 그 손으로 붙들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에 “하나님의 이름”을 거십니다.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이것은 참으로 무모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소경 거지의 삶 자체가 너무나 절망적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빛이라고는 전혀 없는 완전히 캄캄한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소망의 빛으로 가득합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4-5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낮 동안, 곧 빛이 있는 동안 일을 하며, 밤이 되면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신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 되십니다. 곧 우리가 일을 할 수 있는 “낮”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소경이 눈을 뜬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본문의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해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하십니다. 이 말씀들을 생각해보면, “낮”이란 우리가 빛을 통해 진실을 볼 수 있는 상태이며, “밤”이란 그렇지 못한 상태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이 진리의 빛을 비추어주시는 빛의 근원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빛 안에서 모든 것들의 진실을 알고 이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빛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며, 무슨 일을 하려고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실족하고 오히려 더 많은 문제들을 만들 뿐입니다 (요한복음 11:10). 우리는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진리를 보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진정으로 소경이 무엇이며, 소경이 눈을 뜬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을 빛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을 믿고, 그가 하시는 말씀에 순종하며, 그가 가신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한 두 눈을 가진 우리들은 자신이 “소경”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기 위해서는 시력과 함께 빛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무엇이 나의 빛인가?”에 따라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이 매우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봅니다. 오늘 본문에 바리새인들이 나옵니다. 이들에게 빛은 “율법”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깊은 속에서 이들의 길을 비추는 “참 빛”은 “욕심과 살인심”이었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이용하여 권세를 부리며,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에 바빴습니다. 이들 눈에는 불쌍한 소경 거지도, 그를 섬기시는 예수님도 자신들의 이익을 해치는 방해물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불쌍한 소경 거지의 눈에 침으로 이긴 진흙을 발라 그 눈을 뜨게 하시자, 이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이 일을 하신 것을 문제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16), 심지어 예수님을 가리켜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하며 정죄하였습니다 (24). 그들이 아무리 율법 지키는 일에 열심이 있더라도,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의 눈이 떠진 것을 보면 그냥 입을 다물지 못하고 놀라워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애써 부인하고 부정했습니다. 눈을 뜬 소경은 그들의 태도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했습니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라” (32-33).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영적으로 완전히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그들 눈에 다른 것들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발라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이것만 보였습니다. 아니, 그것만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종교 지도자들 아래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을 것인지 대충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아주 작은 실수 조차 용서 없는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고 정죄하며, 숨통을 조였을 것입니다. 정말 세상은 빛이라고는 한 줄기도 느낄 수 없는 컴컴한 어둠이었을 것입니다. 이를 생각하면, 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밤낮 일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고,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영광의 빛을 보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과는 반대로, 소경 거지는 예수님의 은혜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일”을 그대로 사람들에게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 그는 핍박을 받고 마을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그를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이에 그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그러자 소경 거지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그를 보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소경 거지는 이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고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눈을 뜬 것입니다. 곧 예수님을 보고 그 눈의 “빛”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 거지의 눈을 뜨게 하시는 일은 6-7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습니다. 이에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서 씻고 눈이 떠졌습니다. “실로암 못”은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바위를 깎아 만든 깊은 인공 우물입니다.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기혼 샘에서 솟아나는 물이 성 내로 흘러들어 모이도록 만든 것이기 때문에 바위를 아주 깊이 파야 했습니다. 그래서 실로암 못에 가려면 길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야 했습니다. 이는 눈이 성한 사람에게도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에게는 매우 어려운 숙제였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의 눈에는 침으로 이긴 진흙이 발라져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침”은 주로 사람을 모욕할 때 사용합니다. 진흙 또한 더러움과 약함을 상징합니다. 침으로 이긴 진흙을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 계단을 더듬거리며 내려가는 소경 거지의 모습은 매우 안스럽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런 일을 시키신 것을 “무례함”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소경 거지의 순종입니다. 모든 순종은 부끄러움과 고통과 인내의 과정을 수반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에 관해 히브리서 12: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순종은 마치 바늘 귀에 실을 꿰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한복 바느질을 하시는 어머니 곁에 앉아서 어머니를 위해 바늘 귀에 실을 꿰어주는 일을 자주 했습니다. 실을 꿰기 위해서, 먼저 실 끝에 침을 바르고 손가락으로 그 끝을 만져 뾰족하게 세웁니다. 그리고는 집중력을 발휘해서 바늘 귀에 실 끝을 맞추고 구멍 안으로 천천히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반대편으로 나온 실 끝을 잡아댕기면 실 전체가 바늘 구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일단 실이 바늘 귀를 통과하면, 바늘과 실이 하나가 됩니다. 바늘이 어디로
가든, 실은 그 뒤를 따라갑니다. 우리 각자는 내 멋대로 살던 풀어지고 늘어져 있는 “실”과 같습니다. 이런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되는 순종의 과정이 있습니다. 실을 좁은 바늘 귀에 끼워 넣듯이, 우리 또한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하며, 좁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7:13-14). 이것은 늘 부끄러움과 고통과 인내를 수반하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우리 자신을 이 예수님께 맞추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좁은 문으로 우리 자신을 들이밀어야 합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우리 앞에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빛이 환하게 임하며,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우리의 앞길을 비추시며 인도하십니다.
요한복음 1:5절 말씀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말씀은 우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의 핵심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어두움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진짜 문제는 빛이 어두움 속에서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소경 거지는 가장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두운 삶에 예수님의 빛이 환하게 임하였을 때,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세상에 드러내는 복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어두움 속에 머물고자 하며, 더 나아가, 어두움을 빛이라 하고 빛을 어두움이라고 하면서 고집을 부립니다 (이사야 5:20). 이들은 이중으로 눈이 먼 자들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빛이 되십니다. 우리가 이 빛 안에서 진리를 볼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참으로 보는 눈을 가진 자요, 복을 받은 자들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우리의 거룩한 시력을 회복하셔서, 우리가 세상의 거짓 빛들에 속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들을 보며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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