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평화의 왕 예수님 (마태복음 21:1-17)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4. 12. 03:51

평화의  예수님

 

마태복음 21:1-17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성주간(Holy Week) 또는 고난 주간(Passion Week)이라고 부르는 교회 절기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종려 주일(Palm Sunday)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날  성토요일 (Holy Saturday)까지의 일주일을 가리킵니다.  7일의 기간 동안 일어난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종려주일
(Palm Sunday)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성월요일
(Holy Monday)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성화요일
(Holy Tuesday)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 세상의 마지막 때에 있을 일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 그리고 최후의 심판에 대해 예언하십니다.
성수요일
(Holy Wednesday)
마리아가 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 위에 쏟아 부음으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성목요일
(Maundy Thursday)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같이 너희도 서로사랑하라 하시는  계명을 주십니다 (요한복음 13:34) “Maundy” 라틴어 Mandatum(계명)에서  말이라고 합니다.
성금요일
(Good Friday)
 날은 유대인의 유월절입니다. 이날 예수님께서 체포 당하시고, 재판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십니다.   날을 “Good Friday”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죽음의 희생을 통해 우리 사람들을 향한 그의 크신 사랑을 보이시고,   희생의 값으로 우리를 위해 모든 하늘의 축복을 사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토요일
(Holy Saturday)
예수님의 무덤은 봉인되고 경비들에 의해 굳게 지켜집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몸에 바를 향품과 향유를 준비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일 새벽에 부활하심으로써, 고난 주간이 끝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마태복음은  28장으로 되어 있는데,  중에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4장부터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8(21-28)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과 부활하신  승천하시기까지의 며칠에 걸쳐 일어났던 일들과 예수님의 가르치심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백~수천 년의 시간을 다루는 성서의 시간 스케일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마지막 날에 대한  기록들은 경이로울만큼 자세하고 생생합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주는 의미도 깊다고   있습니다. 사실 인류의 역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보다  의미 있는 사건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의 일주일 동안 천지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셨다면, 예수님께서  일주일 동안 천지 만물과 사람을 대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주일은 창세기 1장의 처음 일주일과 버금가며 심지어 그보다 더욱 중요하다고도  있는 시간입니다.

 

결정적 순간 (decisive momen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은 프랑스의 사진 작가인 헨리 카티에르 브레손(Henri Cartier-Bresson) (1908-2004)이라는 사람에 의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개념입니다. 사진 작가들은 보통 보기 좋은 사진 얻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조명, 각도, 구도 등을 조절하면서 최대한 아름다운 사진이 찍히도록 연출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시도를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카티에르 브레손의 사진 작가로서의 관심은 보기 좋은 사진 찍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진실의 순간 사진으로 포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던휴대용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가서 연출되지 않은 사람들의 정직한 삶의 순간들을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물론 이런 순간들을 포착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인내심과 민첩함이 있어야 하며,  어느 정도의 기대와 예측도 해야 합니다. 그런 수고를 통해 얻은 그의 사진에 담긴 결정적인 순간들은 매우 역동적이며,  사람들의 감정이 살아 있으며, 그래서 많은 의미들과 정보들을 담고 있습니다. 옆의 사진은 그의 작품은 아니지만, “결정적 순간  예로 제가 인터넷을 검색해서 얻은 것입니다. 사진은 베트남 전쟁에서 포로로 5년간 잡혀 있다가 풀려난 로버트 스텀(Robert L. Stirm) 중령이 공항에 마중 나온 그의 가족들과 재회하는 순간을 담은 것입니다.  사진에는 “Burst of Joy”라는 제목이 붙여졌습니다. 정말 오랜 기다림과 그리움끝에 재회하는 가족들의 기쁨이 살아 숨쉬듯 그대로 전해져 오는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우리는 이런 결정적 순간들 많이   있습니다. 비록 사진이나 그림은 아니지만, 유달리 세밀한 설명을 통해서 우리는  일들이 일어난 순간의 진실을 손에 잡듯이 생생하게 느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칼로 이삭을 잡으려   하나님께서 급히 그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말리는 장면 (창세기 22),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빼앗고  에서를 피해 급히 집을 떠나는 장면 (창세기 27),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의 형제 요셉을 시기하여 노예로 팔아버리는 장면 (창세기 37),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그의 형제들과 재회하는 장면 (창세기42-45) 등은 마치 시간이 멈춘  우리 앞에 영원한 순간으로 살아있습니다. 이런 장면들이 그렇게 흥미롭고 의미가 깊은이유는  결정적인 순간들을 통해서 모든 감추어져 있었던 진실들이 눈에 보이도록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마치 휴화산이 분화를 위해 오랫동안 힘을 비축하고 있다가 그것이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되어 폭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이외아들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릴 , 하나님께서는 그가 진심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을 보시고 크게 기뻐하시며 그에게 축복의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이제 아무런 장애물도 긴장도 없는 완전한 평안이 임하게 것입니다. 반대로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가로챔으로써 그의 감추어진 야심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으며, 이로 인해 야곱에 대한 에서의 미움은 동생을 죽이고자  만큼 극에 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요셉의 형들은 동생을 노예로 팔아버림으로 그들의미움과 시기심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으며, 요셉은 이런 형들을 용서하고 축복함으로 그의 하나님께 대한 겸손함과 형제들에대한 진실한 사랑을 드러냈습니다. 이렇듯 성경책은 결정적 순간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이는  책이 진실을 다루며, 오직 진실만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있는 가장 장엄한 결정적 순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시는  일주일동안의 이야기입니다.  일주일 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많은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예언들과 경고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추함, 연약함, 비겁함, 욕망을,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들의 용기, 진실함, 순수한 헌신 등을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일주일은 예루살렘의 좁은 땅에서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모든 실체들이  드러나고, 부딪히고, 폭발하는그런 순간이라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예수님께서는 담담하게 예수님께서 하실 일들을 하시며, 예수님께서 가야할길을 걸어가십니다.  일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평화의 왕이 되셔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하나님의화해의 손을 내미시는 것이었습니다.   일을 위해서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겸손하신 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  대신 나귀 그것도 나귀의 새끼를 타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발이 땅에 닿아 질질 끌렸을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사람들은 길에  겉옷을 펴고 나무 가지를 깔고,  뒤로 따르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호산나라는 말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환영하는 예루살렘 시민들의 예수님께 대한 기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이렇게 환영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며칠 후에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자녀를 모으려  일이  번이냐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23:37-39).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감추어져 있음이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힘껏 환영했을까요? 누가복음 19:11 말씀입니다. “저희가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자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 옛날 다윗 왕국처럼 강하고, 풍요롭고, 평화로운 나라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때니이까?” 하고묻습니다 (사도행전 1:6).  예수님의 제자들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어머니와 함께 예수님께 나아와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주세요 하고 청탁을 합니다 (마태복음 20:21). 그리고   제자는  자신들중에 누가 큰가에 대해서 논쟁을 하며 서로 다투었습니다 (마가복음 9:34).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회복하실 이스라엘 나라에서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에 대한 신경전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되신 예수님 대해 기대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크신 권세로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그리고 불의한 헤롯왕으로부터 구원해주실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헤롯의 왕궁이나 빌라도의 청사로 가지않으셨습니다. 대신 성전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꾸짖으시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하시던 것처럼 성전에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21:14)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21:23). 예수님은 참으로 겸손하신왕이시며, 평화의 왕이십니다.

 

조지 오웰이라는 영국 작가가  코끼리를 쏘다 (Shooting an Elephant)”라는 에세이가 있습니다. 조지 오웰은 영국 사람이지만 젊었을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에서 경찰관으로 일을 했습니다.  에세이는 그가 경찰관으로 근무하던 당시의  경험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담당하고 있는 마을에 코끼리  마리가 나타나서 집들을 부수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급히 총을 들고 코끼리가 나타났다는 곳으로 가보았습니다. 코끼리는 이미 다른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뒤를 따라가보니  사람이 코끼리에 밟혀 죽어 있었습니다. 조지 오웰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하여, 코끼리 사냥용 총을 구해왔습니다.  총을  사람들은 매우 흥분했습니다. 그리고 조지 오웰을 따르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 거대한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마침내 조지 오웰은 마을을 벗어나  한가운데서 평화롭게 서있는 코끼리를 발견했습니다. 이제 코끼리는 전혀 위험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일은 다만 코끼리 주인이  때까지  자리에서 코끼리를 지켜보는  뿐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코끼리를 죽일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그의 뒤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없이 많은 사람들의 눈초리가느껴졌습니다. 그들은 조지 오웰이 코끼리를 향해 총을 쏘기를 기다리며 몹시 흥분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는하는  없이 코끼리를 향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그는 경찰관의 권세를 가졌으며, 총을 쥐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있는 왕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실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평화를 선택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시선에 밀려 코끼리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가 코끼리를 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마도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고, 그에게 조롱의 말들을 퍼부었을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조지 오웰은 평화 선택하지 못하고, “폭력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거친 세상 속에서 발견된 그의 참모습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겸손하신 평화의  예수님은 끝까지 겸손하시고 평화로우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회복을꿈꾸는 사람들에게 말할  없이  실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폭력 선택하지 않으시자, 이제 그들의 분노가 예수님을향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평화로우실 , 사람들은 가장 폭력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겸손하실 , 사람들의 교만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전히 겸손하시고 여전히 평화로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결정적 순간 그동안 비밀로 감추어졌던 주님의 겸손과 평화가 포착되고 세상에 드러나게  것입니다. 앞에 보여드린 로버트 스텀 중령의 가족 사진은 기쁨 상징과도 같습니다. 저는 가족이 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 지가 궁금해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매우 뜻밖의 안타까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진을 찍기 3 전에 사진에 나오는 중령의 아내가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사진을 찍을  중령은 이미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진은 “Burst of Joy”라고 부를 수가 없는것입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그렇게 아픈 상처를 안고 있으면서, 이렇게 즐거운 장면을 연출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믿어지지 않습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주민들로부터 그렇게 열렬한 환영을 받으신 후에 그들에 대해 탄식을 하셨는지도 조금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겉모습에 속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순수한의미에서 진리를 드러내는 결정적 순간은 없습니다. 참된 진리를 전하는 결정적 순간 오직 예수님의 복음 뿐입니다. 영원한 진리는 오직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구원과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시키시고자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화해의 손을 펴셨습니다. 우리가 겸손하시고 평화로우신 왕께 실망하고,  손을 뿌리치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박았는데도,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다시 우리를 찾아오셔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시고 화해의 손을 내미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십니다 (요한복음 20:21). 우리의 오늘의 찬양은 내일 불평으로 바뀔  있으며, 우리의오늘 인애는 내일 아침 이슬처럼 사라져버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겸손한 사랑은   자리에서 홀로 솟아난 어린 싹과 같습니다. 매일 욕망과 미움과 거짓과 폭력이 난무하며 질주하는  거칠고 험한 세상에서 오직 주님만 이렇게 순하시며, 온유하시며, 평화로우신 것입니다. 정말 우리  예수님은 얼마나 사랑스러우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