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세례 요한과 헤롯 (마가복음 6:14-29)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4. 25. 11:23

세례 요한과 헤롯

 

마가복음 6:14-29

 

오늘 말씀은 헤롯왕이 어떻게 세례 요한을 죽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헤롯왕의 가족사를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여러 명의 헤롯왕들이 나옵니다. 가장 먼저는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헤롯왕으로 동방 박사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베들레헴과 지경에 있는 모든 사내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이라고도 불리며, 헤롯 왕조의 왕입니다. 헤롯 대왕에게는 도표에

서와 같이 명의 아내가 있었으며, 이들로부터 여섯 명의 아들들을 두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롯왕은 헤롯대왕이 그의 아내 말다케로부터 얻은 아들 하나인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그가 그의 이복 형제인 빌립 (도표에서 빌립1”)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를 것입니다. 헤로디아도 사실은 헤롯 왕가의 여자로서 헤롯대왕의 손녀입니다. 헤롯대왕이 아내 미리암I으로부터 아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르스를 가졌는데, 헤로디아는 아리스토불르스의  딸입니다. 헤로디아는 먼저 빌립과 결혼하여 살로메 가졌으며, 후에 다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헤롯왕(헤롯 안티파스) 결혼했습니다. 헤롯대왕의 손녀인 헤로디아가 헤롯대왕의 아들들과 혼인을 했으니, 자신의 삼촌뻘이 되는 아저씨들을 남편으로 것입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살로메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것은 아니고 (성경에는 살로메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여성이 나옵니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라는 1세기 역사가의 기록에 따른 것입니다. 살로메 또한 헤롯 대왕의 다른 아들인 빌립2” 혼인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엄마 쪽으로 촌수를 계산하면 할아버지 뻘인 사람과 결혼을 것입니다.

 

헤롯 왕조의 왕을 헤롯대왕이라고 부르는 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롯왕은 분봉왕(分封王)”이라고 부릅니다. 분봉왕을 영어로 “Tetrarch”라고 하는데 “Tetra” 4 또는 1/4 뜻하며, “Arch” 다스리는 라는 말입니다. 분봉왕 문자적으로 풀어 설명하면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 영토의 1/4 맡아서 다스리는 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3:1-2 말씀입니다.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다섯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말씀에 따르면,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은 지역으로 나뉘어져서, 명의 로마인 총독과 명의 분봉왕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다스리던 유대 땅도 본래는 헤롯 대왕의 아들인 아켈라오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었습니다. 마태복음 2:21-2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셉이 일어나 아기(예수님) 모친(마리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그러나 아켈라오가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요셉과 마리아가 헤롯 대왕의 핍박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해 있다가, 헤롯이 죽은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는데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 유대의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서워하여 그곳에 가기를 주저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켈라오는 헤롯 대왕의 아들들 중에서 악명이 높고, 매우 폭압적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폭동을 우려한 로마 황제는 그를 쫓아내고 대신 총독을 보내어 유대 지방을 직접 통치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관여했던 본디오 빌라도는 다섯 번째 유대 총독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헤롯왕(헤롯 안티파스) 어떻게 세례 요한을 죽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설교는 세례 요한과 헤롯을 비교한 것입니다. 성경은 빛과 어두움 관한 책이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을 하면서 얻게 되는 것은 바로 빛과 어두움 분별하는 지혜입니다. 이것은 선과 ,” “참과 거짓,”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 “생명의 길과 죽음의 등으로도 구분할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들은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두움인지를 마치 흑백 영화처럼 매우 선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좋은 사례들과 나쁜 사례들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배울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인과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야곱과 에서, 요셉과 그의 형제들, 모세와 바로, 다윗과 사울, 엘리야와 아합 성경에는 같은 시대를 살면서 하나는 빛으로 다른 하나는 빛을 더욱 선명하게 하는 그늘로 대비되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가장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것은 바로 예수님과 사단 마귀입니다. 이사야 14:12-15 말씀입니다. “ 아침의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리 내가 북극 집회의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구덩이의 밑에 빠치우리라.” 여기서 아침의 계명성이란 교만한 바벨론 뜻하기도 하고 배후에 있는 사단 마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단 마귀의 야심은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며 하나님의 영광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왕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만의 결국은 음부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사단 마귀와 정반대의 성품을 보여주십니다. 빌립보서 2:5-11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만왕의 왕으로 높이셨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빛과 생명과 영광입니다. 그리고, 사단 마귀의 교만은 어두움과 죽음과 멸망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과 헤롯왕을 통해서도 같은 지혜를 배울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세례 요한은 단순히 권력자들의 불장난에 희생된 불운한 사람들 하나로 보일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그는 등불 같은 존재입니다. 요한복음 5:35절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하십니다. 요한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 그리스도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빛으로 살다가 때가 되었을 조용히 무대에서 내려왔습니다. 반면에 헤롯을 가리켜 예수님은 여우(that fox)”라고 부르십니다 (누가복음 13:32). 여우는 교활함 상징합니다. 자신의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천사의 얼굴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서운 짐승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둘을 비교함으로써, 빛과 어두움의 의미를 좀더 분명하게 깨달을 있습니다. 빛이란 진리(하나님) 순종하는 입니다. 진리가 나의 왕이 되며, 나는 진리를 지키고, 순종하고, 전파하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두움이란 자신이 왕이 되는 입니다. 나를 왕으로 높이고, 영광을 취하며, 나의 높아짐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해로 여기고 배척하고 미워하며, 나의 높아짐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자랑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사람들 대부분은 후자에 가까운 삶을 것입니다. 자신을 왕처럼 높이고 자랑하는 일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며, 이를 위해 미워하고 사랑하며, 경쟁도 하고 힘을 모으기도 합니다. 하지만 길은 결코 진정한 되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조차 짐승으로 비유하실 만큼 비참하고 절망적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영적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들을 기름을 발라 치료하자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6:12-14a). 소식을 들은 헤롯은 두려움에 떨며 말했습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14). 16절에서도 헤롯은 내가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하면서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엘리야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선지자자들 하나와 같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헤롯은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는 자신이 무고히 죽인 세례 요한을 떠올렸습니다. 그가 능력을 가지고 다시 살아났다고 믿었습니다. 헤롯의 반응을 보면 그가 세례 요한을 죽인 얼마나 심한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아마도 매일 세례 요한의 유령에 쫓겨 다니는 악몽을 꾸다가 비명을 지르며 잠자리에서 깨어났을 것입니다. 이렇게 심한 죄의식에 시달리는 자신을 보면서, 헤롯은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악하여져서 이제 예수님까지도 죽여 없애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3:6, 누가복음 13:31). 헤롯은 왕이었지만 실상 내면은 두려움으로 가득했습니다. 겉으로는 왕의 위엄을 뽐내고 있지만, 그의 내면은 죽은 사람조차 두려워할 만큼 불안하고 예민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그의 눈을 어둡게 만들고 그를 죄악으로 내몰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등불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진리 되신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 증거하고, 예수님을 높이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 세례 요한을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자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영향력이 너무 커져서 사람들은 그가 그리스도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례 요한은 조금이라도 자신을 높이고 나의 영광 맛보고 싶은 유혹에 빠질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아주 철저히 예수님 중심 길을 걸었습니다.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돌이켜 예수님을 따르게 되자, 요한의 제자들이 걱정하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께로 가는데요?” 그러자 요한은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너희가 일도 이를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신랑이시고, 신부를 취할 분은 바로 신랑 되신 예수님이시다. 나는 신랑의 친구로서 사람들이 신랑 되신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보고 기쁨이 충만하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례 요한의 말을 생각하면, 그가 등불인지를 있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그의 안에 예수님께서 그의 기쁨으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면서 마음에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이로 인해 자신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데도 그의 기쁨은 오히려 더욱 커지기만 했습니다. 이는 그가 아닌, “진리 좇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세례 요한의 삶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좇는 이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담대하며, 확신하며, 기뻐합니다. 심지어 자신을 죽일 권세를 가진 헤롯왕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합니다. 누가 진정한 왕일까요?

 

헤롯이 요한을 옥에 가두고 결국 그를 죽이게 내역이 본문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헤롯이 어떤 사람인지를 미루어 짐작할 있습니다. 헤롯은 자신의 이복 동생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그녀에게 장가를 들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를 책망하자 헤롯은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에 대해 오늘 본문의 17절에는 헤롯이 여자를 위하여이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19절에는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결국 헤로디아는 자신의 딸을 이용하여 헤롯의 마음을 움직이고 세례 요한을 죽이도록 만듭니다. 말씀들을 생각해보면, 헤로디아야말로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이도록 만든 주범이라고 있습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헤롯은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없이 주위 사람들의 악한 꾀에 놀아나는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헤롯의 이런 연약함은 다른 사실로도 확인됩니다. 헤롯이 그의 아내 헤로디아를 위해 요한을 옥에 가두긴 했지만 그를 죽일 생각은 없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20절에,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합니다. 언뜻 듣기에, 헤롯이 요한을 존경하고 그를 돌본 같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4:5절에는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롯이 요한에 대해 두려움과 번민을 느낀 가장 이유는 사람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다른 문제가 없다면 요한을 죽이는 것이 헤롯에게는 손바닥을 뒤집듯 간단한 일이었겠지만, 요한을 따르는 사람들의 반발이 두려워서 뜨거운 감자처럼 요한을 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헤롯의 세례 요한에 대한 배려 그의 진심이기보다는 정치적인 계산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여기서 기회 좋은 날이 왔다함은 헤로디아의 입장에서 그녀가 죽도록 미워하는 세례 요한을 죽일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는 말입니다. 헤로디아는 자신의 딸이 왕과 귀빈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들을 기쁘게 하도록 했습니다. 이에 한껏 마음이 높아진 헤롯은 허세를 부리면서 말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맹세까지 하면서 말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헤로디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딸에게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했습니다. 요구에 대한 헤롯의 반응이 26절에 나옵니다.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없는지라.” 헤로디아는 아마도 이런 헤롯의 약점을 알고 있었던 같습니다. 이런 약점을 이용하여 헤롯으로 하여금 세례 요한을 죽이도록 하는 것은 헤로디아에게 식은 먹기처럼 쉬웠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헤롯은 분봉왕으로서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 자신에게 주어진 지역을 관할할 , “ 나라라고 만한 영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땅을 누구에게 마음대로 있는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실언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이 죽게 되었다면, 체면이 구겨지더라도 바로 실수를 인정하고 살로메의 요청을 잘라서 거절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헤롯은 심히 근심하면서도여전히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헛된 명예욕에 질질 끌려다니는 비참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겨우 1페니도 안되는 체면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놓으신 등불이며 백성들의 선지자인 세례 요한을 죽이고, 이로 인해 평생을 두려움과 죄책감에 쫓기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비참하게 됐을까요? 이는 그가 진리를 좇지 않고, “나의 좇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국 왕이 되는 대신 음부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실제로 헤롯왕은 후에 로마 황제 가이우스(Gaius) 의해 권좌에서 쫓겨나고 유배지에서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누가복음 7:24-26절에,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부드러운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요한은)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 말씀에서 예수님은 왕궁에 살면서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사치하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비유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고 바로 헤롯입니다. 헤롯은 겉으로 보기에 왕이었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없는, 심지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르는 무지하고 무능한 존재였습니다. 그저 갈대처럼 바람에 휘날리며 정처 없이 살다가 말라 죽고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왕으로 높이며 자신을 꾸미기에 바쁜 사람들이 피할 없는 운명입니다. 이에 비해 세례 요한은 진리 되신 예수님을 좇아 살면서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빛을 뿜어내는 선지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왕처럼 흔들림 없이 진리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앞에 길이 있습니다. 나를 왕으로 높이다가 지옥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질 것인가, 예수님의 진리를 좇아 겸손히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구원과 영생의 열매를 맺을 것인가? 우리는 매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예수님을 배움으로써 빛과 어두움을 분별하는 지혜를 얻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높아짐과 됨을 기뻐하는 대신 사나 죽으나 예수님을 기뻐함으로, 세례 요한처럼 어두운 시대를 비추는 등불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