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여인
열왕기하 4:8-37
오늘은 Mother’s Day입니다. 그래서 이를 기념하여 열왕기하 4장에 나오는 한 수넴 여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8절에는 이 여자를 가리켜 “귀한 여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귀하다”는 말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great (훌륭한),” “wealthy (부유한),” “distinguished (뛰어난)” 등으로 이 말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왜 이 수넴 여인을 “귀한 여인”이라고 부르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위해 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늘 그 일을 위해 사람을 부르시고, 그 사람과 함께 일하십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그 일을 맡기시기 위해 부르신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들입니다. 제가 아는 한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위해 여자를 직접 부르신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인 갈릴리 시골 처녀 마리아가 거의 유일한 예가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여자들의 역할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그려지는 여자들의 역할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표면은 딱딱하지만, 땅을 깊이 파고 들어가면 바위가 아주 뜨거운 액체 상태로 녹아 존재하는 “외핵 (Outer Core)”이라는 층이 있습니다. 이 고온의 유동성 외핵은, 비
록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 숨겨져 있지만, 지구의 기온을 따뜻하게 유지시켜주는 외에도 지구상에서 생물들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환경을 유지하는 여러가지 매우 중요한 역할들을 한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여자들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세상에 온기와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가끔 이런 여자들이 표면으로 돌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그림에서와 같이 깊은 땅속에 있던 마그마가 딱딱한 지표면을 뚫고 화산으로 터져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스스로 해결해야 할 매우 다급하고 절실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간절함과 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매우 강력해서, 그들이 갖고 있는 여자로서의 태생적인 한계들, 그리고 그들을 짓누르는 사회적, 관습적, 인종적, 종교적 제약들을 뚫고 나와서 화산처럼 폭발합니다. 그런 예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시아버지 유다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자녀를 가질 수 없게 되자 시아버지를 속여 그로부터 남편의 대를 이을 아들을 잉태한 다말, 태어난 아기 모세의 아름다움을 보고 애굽왕 바로의 명령을 무시하고 아들을 살린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과 그의 누이 미리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숨겨 자신과 가족을 구한 여리고의 기생 라합, 이방 여인이지만 유대인 시모인 나오미를 따라 유대 베들레헴에 와서 겸손히 이삭을 주우며 시모를 섬기다가 다윗왕의 증조할머니가 된 룻, 간절한 기도로 아들을 얻고 또 얻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린 한나, 위기에 처한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왕 앞에 나아간 에스더, 어리석은 남편 나발의 실수로 온 가족이 몰살당할 위기에 다윗에게 나아가 겸손히 용서를 구한 아비가일 …… 이들에게는 모두 해결이 불가능한 어려운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슬프고 기구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불행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오히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에 간절한 기도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으로 응답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들은 무모한 듯 보였지만, 평안하고, 담대하고, 냉철하고, 지혜로웠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축복을 쟁취했을 뿐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도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믿는 여자들의 이야기들은 세상의 어떤 이야기들보다 더욱 다이나믹하고 드라마틱합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본문의 주인공인 수넴 여인 또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8절에는 이 여자를 가리켜 “귀한 여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루는 선지자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을 때 이 여자가 엘리사를 강권하여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그 마을을 지날 때마다 자기 집에 들러서 음식을 먹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엘리사에게 베푸는 친절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엘리사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고는 남편과 상의하여 그를 위해 방을 만들고 그 안에 필요한 집기들까지 준비하였습니다. 이제 엘리사는 여자의 집에서 음식을 먹을 뿐 아니라 잠도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는 선지자 엘리야의 후계자로서 북왕국 이스라엘을 무대로 약 60여 년간 선지자로 활동했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주로 사마리아 지방의 길갈, 베델, 여리고, 요단강 등지에서 공적인 일들을 수행했으며, 또 자주 갈멜산으로 가서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열왕기하 2:25절은 “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는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만나기 위해 갈멜산으로 갔습니다. 이렇듯 엘리
사는 갈멜산과 사마리아 사이를 자주 왕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의 8절에도 “그곳을 지날 때마다”라고 한 것이 이 여행의 빈번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갈멜산과 사마리아 사이의 거리는 약 56마일 (90km) 정도로 이틀을 꼬박 걸어야 되는 여정이며,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중간 쯤에 수넴(Shunem)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하룻길을 걷고 나서 지친 엘리사에게는 이 여인의 집에서 먹고 하룻밤을 편히 쉴 수 있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큰 위로와 힘이 됐을 것입니다. 13절에 엘리사가 이 여자에게 말하기를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생각이 주밀하도다” 합니다. 여기 “생각이 주밀하다”는 말의 원문은 “두려움,” “경외심,” “지극한 주의” 등을 나타내는 말이 반복되는 형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Careful with all this care”(KJV)라고 번역됩니다. 이 말은 이 여자가 엘리사를 섬기는 태도가 어떠했을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녀는 마치 하나님 자신을 섬기듯, 여종이 그 주인을 섬기듯 그렇게 두렵고 떨림으로 엘리사를 대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그 일을 하였습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진심으로 그 일을 하였습니다. 참으로 귀한 여인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이 여자가 자신에게 베푸는 친절이 너무 고마워서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불러서 물었습니다.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생각이 주밀하도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왕에게나 군대장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 그녀에게 소원이 있으면 왕이나 군대장관에게 말을 해서 그것을 들어주겠다는 말입니다. 여자로서는 참으로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하기를 “나는 내 백성 중에 거하나이다” 하였습니다. 이 말은 “저는 그냥 평범한 백성들 중 하나입니다. 제가 왕이나 군대장관처럼 높은 분들에게 무슨 볼 일이 있겠습니까?” 하는 말입니다. 여자는 자신이 베푼 친절을 앞세워 자랑하며, 또한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와의 친분을 이용하여 자신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다 하고 나서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17:10). 그녀는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내 백성들 중 하나 (one of us)”로 여겼습니다. 그녀는 이 평범함과 백성들 중에 거함을 행복으로 여기고, 이를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주신 축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앞에 언급한 바 땅 속 깊은 곳에 숨은 뜨거운 용암처럼, 그녀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히 사람들 속에 거하며, 동시에 그 따뜻한 마음으로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위로와 새 힘을 선사했습니다. 그녀는 참으로 귀한 여인이었습니다.
여자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자, 엘리사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사환인 게하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면 저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꼬?” 게하시는 이 여자에게 아들이 없으며 또 남편이 늙었음을 고하였습니다. 이에 엘리사는 다시 여자를 불러 말했습니다. “내년 이맘때 쯤에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여자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엘리사의 말대로 여자가 아기를 갖게 되고 엘리사가 말한 때에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하나님의 축복으로 얻은 아들이 이 여인과 남편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잘 자라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원인 모를 병에 걸려서 엄마의 무릎에 앉아 앓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여인은 죽은 아들을 엘리사가 거하는 방의 침대에 눕혔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녀는 아직 아들의 죽음을 모르고 있는 남편에게 사환 한 명과 나귀 한 마리를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그녀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갔다 올 것을 말했습니다.
사실 그녀의 행동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우선 아들이 죽었습니다. 아들이 죽었다면 이미 상황이 끝이 난 것입니다. 아무도 이 상황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니 먼저 남편에게 아들의 죽음을 알리고, 죽은 아들을 땅에 묻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녀는 빨리 포기해야 했습니다. 사실 그녀는 처음부터 아들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일 년 후에 아들을 안으리라고 엘리사가 말했을 때도, 그녀는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며, 엘리사가 주는 소망의 약속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했습니다. 이제 아들이 죽은 마당에, 그녀는 “이것 보세요. 내가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 팔자에 무슨 아들을 …… 아이고!” 하고 푸념을 하면서 빨리 죽은 아들을 잊어버리고 과거 아들이 없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소망의 불씨를 끄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이 소망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행동했습니다. 사실 그 길은 아무도 걸어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아니 그 곳에 길이 있다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길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 길을 뚫고 나아간 것입니다. 마치 땅 속에 갇혀 있던 용암이 아주 두껍고 무거운 지각을 뚫고 위를 향하여 솟아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녀가 “믿음의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엘리사가 아들을 약속했을 때 이 약속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의 늙은 몸으로는” 그것이 이미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불가능한 일이 말씀대로 그녀의 몸에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께서 그녀를 위해 하신 일이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그녀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아들의 죽음”보다 더 강하게 그녀의 마음 속에 자리잡았습니다. 그녀에게 아들은 단순히 “내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주신 선물을 “소홀히” 다루지 않았습니다. 비록 아들이 죽어서 그 몸이 차갑게 식었지만, 그녀는 엘리사를 섬기던 그 자세 곧 “Careful with all this care”로 이 하나님의 선물을 다루었습니다. 아들을 가졌을 때 배웠던 그녀의 믿음은 이제 “더 큰 믿음”으로 자랐습니다. “아들의 죽음”이 그녀의 믿음을 뒤덮고 그 불씨를 꺼버린 것이 아니라, 그녀의 “더 큰 믿음”이 죽은 아들의 몸을 뒤덮고 그 안에 생명의 온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참으로 귀한 여인이었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만나러 간다고 하자 남편은 의아해하면서 물었습니다.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어늘 그대가 오늘날 어찌하여 저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뇨?” 그러자 그녀는 다른 말은 전혀 없이 그냥 “평안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별 일 없습니다,” “Everything is OK”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외아들이 죽었는데 그녀는 남편에게 “평안이니이다” 하고 말합니다. 다른 한편, 그녀는 자신이 탄 나귀를 몰고 갈 사환에게 이르기를 “앞으로 나아가라 내가 말하지 아니하거든 나의 달려가기를 천천하게 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사실 그녀의 마음 속은 평안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매우 다급했습니다. 한시바삐 갈멜산에 이르러 엘리사를 만나야 했습니다. 그를 모셔와서 죽은 아들을 살려야 했습니다. 그녀는 이를 위해서 시간을 아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평안이니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골로새서 4:5절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그녀는 각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말”만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시간을 아끼며 일을 신속하고 순조롭게 진행시켰습니다. 아들이 갑자기 죽은 충격과 슬픔을 겪고 있는 여자가 이렇게 상황을 잘 분별하고 냉철하고 지혜롭게 행하고 있음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여자가 갈멜산에 가까이 이르자 엘리사는 멀리서 그녀를 알아보고는 자신의 사환 게하시로 하여금 달려나가서 그녀를 맞이하도록 했습니다. 게하시는 엘리사가 시킨 대로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고 문안했습니다. 여자는 게하시의 질문에 또 다른 말을 하지 않고 “평안하다”고만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곧장 엘리사에게로 나아가 엎드려 그의 발을 안았습니다. 엎드려 발을 붙드는 행동은 겸손함과 간절함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여자는 엘리사에게 비로소 자신이 당한 문제를 토로했습니다.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이 말은 그녀의 깊은 속에 감추어져 그녀 홀로 견뎌내고 있던 엄마의 슬픈 마음을 잘 드러냅니다. 그녀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감출 것 없이 그녀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남편이 있습니다. 또 마을에는 가까이 지내는 같은 또래의 부인네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오직 하나님의 사람 앞에서, 곧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충분히 자유롭게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드러냈습니다. 우리는 비슷한 예를 선지자 사무엘의 모친인 한나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한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는 여자였지만 자식이 없음으로 인해, 남편의 다른 아내인 브닌나로부터 많은 조롱을 당했습니다. 한나는 이런 아픔을 남편이나 다른 사람에게 쏟아내는 대신, 하나님께 쏟아내었습니다. 사무엘상 1:10-11절 말씀입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는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오래 오래 기도하면서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나는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었다”고 합니다 (사무엘상 1:18). 이 수넴 여인이나 한나의 기도는 그들의 기도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곧장 하나님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곧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며, 기도하며, 믿고, 바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와 반대가 되는 모습들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6-8절 말씀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또 디모데후서 4:3-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이렇게 정함이 없는 마음, 나뉘어진 마음, 여러 욕심들에 끌려 우왕좌왕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는 진실한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담대하게 일직선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고 길이 되는 것입니다.
여인을 통해 아들의 죽음을 알게 된 엘리사는 자신이 직접 가는 대신 사환인 게하시에게 자신의 지팡이를 주고는 곧바로 아이에게 가서 그 지팡이를 아이의 얼굴에 놓으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엄마는 엘리사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그녀는 엘리사가 직접 가서 아들을 살려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앞에서 여자는 왕에게나 군대장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고 했을 때 자신을 백성들 중에 사는 평범한 여자로 낮추며 엘리사의 호의를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직 엘리사의 동행을 고집합니다. 어떻게 보면 모순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지금 “생명”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주실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열왕기의 중심 주제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자주 그들의 능력으로는 전혀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그 때마다 이들은 옷을 찢고 머리를 뜯으며 절망했습니다. 열왕기하 5:8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어 가로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여기서 “그 사람”이란 자신의 문둥병을 치료받고자 이스라엘 왕을 방문한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을 말합니다. 자신의 신하 나아만의 문둥병을 치료해달라는 아람 왕의 편지를 받은 이스라엘 왕은 자기 옷을 찢으면서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아람 왕이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어려운 일을 부탁하여 트집을 잡고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 왕에게 엘리사는 말했습니다.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엘리사를 통해서 문둥병으로부터 나음을 받은 나아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열왕기하 5:15). 하나님과 하나님의 선지자를 곁에 두고도 두려움에 빠져 옷을 찢는 왕들은 비록 “세상의 권세”를 가진 자들이지만 정말 약한 바람에도 곧 부러질 “상한 갈대”와 같습니다. 이런 왕들의 연약함을 생각하면, 수넴 여자가 아들의 죽음을 당하여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바로 엘리사에게로 달려가고 또 오직 그의 도움을 구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참 겸손”입니다. 이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그 구원이 필요한 자신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매달리는 겸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참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영광받으시기를 심히 기뻐하십니다. 이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죽음의 절망에서도 구원과 생명의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귀한 여인이 우리에게 이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인은 마침내 엘리사의 기도로 다시 살아난 아들을 되찾았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두 번” 받았습니다. 한 번은 “늙어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남편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죽음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녀가 아들을 가졌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녀가 하나님 앞에서 “귀한 여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귀한 여인은 지극히 겸손하며 동시에 지극히 파워풀합니다. 그녀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움직이고, 나아가 하나님을 움직입니다. 그의 삶에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을 드러냅니다. 우리 가운데 이 수넴 여인 같은 귀한 여인들이 많이 세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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