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한복음 11:1-57)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5. 2. 09:38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한복음 11:1-57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2 말씀에 따르면, 나사로는 유다 마을 베다니 사람으로 마르다와 마리아의 형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 남매와 매우 가까이 지내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5절에는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하며, 3절에 나사로의 누이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이르기를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성으로부터의 거리가 오리 ( 1.25마일) 쯤으로 가까운 마을이라서 (11:18),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실 때는 자주 베다니 마을에 숙소를 정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17).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계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머무신 것으로 믿어집니다. 누가복음 10:38-42절은 마르다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영접하고 접대하다가 생긴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나사로와 그의 누이 마르다 마리아는 예수님께는 혈육이나 다름이 없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 급히 사람을 보낸 것을 보면 병이 매우 위중했던 같습니다. 요한복음 10:40절에 보면,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서 요단강 건너편 세례 요한이 처음에 세례를 베풀던 곳에 계셨습니다. 공교롭게도 이곳 이름 또한 베다니입니다 (요한복음 1:28). 예루살렘에서 이곳까지의 거리가 20마일(33km)이라고 하니, 어른 걸음으로도 하룻길은 족히 되는 거리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촌각을 다투는 나사로의 병세에 예수님을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어 급히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들은 마디 소식으로 예수님께서 만사를 제치고 나사로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4절에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의 응답이 나옵니다. “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후에도 이틀이나 계시던 곳에 머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로 가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묻힌 4일이나 지난 후였습니다 (39).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그가 죽어서 무덤에 묻힌 후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사실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태연하게 말씀하십니다. “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나사로가 병들어 앓다가 죽었습니다. 시신을 베로 싸매고 굴로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무덤 입구를 돌로 막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체가 썩어 냄새가 무덤 밖으로 나올 정도였습니다. 죽음은 참으로 압도적인 현실입니다. 우리가 있는 일은 그저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 앞에서 영광 말씀하십니다. “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나사로의 죽음을 둘러싸고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시는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과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를 실감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언어 자체가 다릅니다. 예수님의 언어는 소망과 빛과 생명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언어는 절망과 두려움과 죽음의 언어입니다. 사람에게 죽음이란 피할 없는 인생의 목적지이며, 일단 목적지에 다다르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절망입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면서 말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말은 나사로가 죽기 전에 빨리 와주세요!” 하는 말입니다. 후에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오셨을 , 마르다와 마리아는 각각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1, 32). 예수님께서 너무 늦게 오셨으므로 나사로가 죽었고, 이제는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말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의 힘이 얼마나 압도적이며 절대적인가를 보여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오셔서 그를 치료하셨다고 하더라도, 죽음은 시간의 문제일 여전히 우리 앞에 있습니다. 모든 삶의 끝이 죽음이라는 사실처럼 우리에게 절망적인 사실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끝을 향해 매일 걸음씩 가까이 나아갑니다. “소망이란 나은 미래 말합니다. 그런데 미래의 가장 끝은 항상죽음입니다. 사람이 가진 소망은 모두 죽음 안에 갇혀 있는 소망입니다. 죽음의 절망에 삼켜지고 기억조차 되지 않을 소망입니다. 사람들은 절망을 향해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말과 삶과 생각은 절망으로 깊이 물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소망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병이 죽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인해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일으키시기 위해 마르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자 마르다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께서는 죽음너머에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십니다. 우리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생명을 주심으로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사실 말씀은 우리 마음에 닿지 않습니다. “내가 죽게 생겼는데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 오히려 문제의 핵심을 잘못 짚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마치 아브라함은 대를 이을 아들조차 하나 없어 불평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뭇별들을 가리키시면서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하심과 같습니다. 키에르케고르라는 분이 재미있는 말씀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한다 (“He who loves God without faith reflects on himself, while the person who loves God in faith reflects on God.”)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목숨 전부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부지하는데 마음을 쏟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광 전부입니다. 자신의 목숨도 영광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망합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야말로 모든 것의 끝입니다. 먹고 마시는 작은 일로부터 죽고 사는 일까지 하나님의 영광 위해서 하며 (고린도전서 10:31),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로마서 5:2). 하나님께서는 결코 영광을 드러내시는데 실패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특히 그의 영광을 믿고 바라는 자들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소망은 죽음을 너머서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 믿는 자가 갖는 진정한 소망이 됩니다. 우리의 끝은 죽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끝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죽음은 미래의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현재의 삶을 죽음의 두려움으로 채웁니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현재형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말씀하셨습니다. 말을 들은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며칠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0:31). 이는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무서운 기억을 떠올리면서 말했습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이제 유대는 그들에게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하시며, 그를 깨우러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나사로가 그냥 잠들어 쉬는 것으로 생각하고 여전히 유대로 가기를 싫어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느니라하시며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하면서 결연히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러 가신다고 하시는데, 도마는 죽으러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길에는 죽음의 늪이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들은 길을 바라보며 두려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말씀을 하시지만, 제자들에게는 말씀이 죽음의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르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기껏해야 같이 죽자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두려움 우리로 하여금 위험한 것들을 피하고 안전한 생명길로 인도할 것으로 생각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반대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죽음의 두려움이 결국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민수기에 나오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들은 가나안 땅에 사는 거인들과 견고한 성읍들을 보면서 깊은 두려움과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두려움의 말들을 내뱉습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민수기 13:31).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수기 13:33). 이들은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을 저주하며, 자신들을 격려하는 지도자들을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대신 광야에서 죽도록 하셨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광야에서 길을 잃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것입니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낮이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여기서 낮과 밤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가리킨다고 있습니다. 낮은 우리 안에 믿음이 있을 때를 말하며, 밤은 우리가 두려움에 빠져 있을 때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 예수님의 빛이 우리 안을 환하게 비춥니다. 그리고 우리는 빛을 따라 구원과 생명의 길을 걷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두려움에 빠져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컴컴합니다. 마치 사방에 우리를 해치려는 적들이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답답합니다. 이렇게 두려움에 쫓겨 방황하다가 결국 실족합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이길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의 되신 예수님의 빛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의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14-15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인도하시는 목적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가지신 가장 관심은 그들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그곳에 가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기뻐하십니다. 마치 나사로의 죽음을 반기시는 듯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사로가 죽었는데 무서운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유대 땅으로 다시 가자고 하십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고, 사람의 상식으로는 맞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이 이렇게 되도록 섭리하시는 것일까요? 이는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밝은 예수님의 속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거기에도 여전히 죽음 있지만 두려움은 없습니다. 심지어 죽음조차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섭리의 대상일 뿐입니다. 우리 마음이 어두울 ,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 임할 ,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일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을 기뻐하십니다. 말인즉슨, 믿음 안에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요한1 1:5절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오직 영광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래야 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는 밝은 대낮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믿음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생명을 쥐고 있다고 믿어지는 권세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으나 어떤 자들은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습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죽이기를 모의하였습니다. 12:10절에 따르면, 대제사장들이 심지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했다고 나옵니다. 이는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가서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대제사장은 최고의 권력자입니다. 그들의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죽음은 이런 권세자들의 강력한 무기로 사용되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뒤에는 사단 마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을 ,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대신 권력자들을 더욱 두려워하고, 예수님의 말을 듣는 대신 이들의 말을 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입니다. 본문의 57절에 따르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 예수님께 대한 사회 분위기를 미루어 짐작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권력자들이 두려워 조용히 숨을 죽이고 살았을 것입니다. 이렇듯 죽음은 사람들을 억누르고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죽음은 권세를 행사하는 권력자들을 앞세워서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특히 오늘 말씀에서처럼 권력자들이 종교 지도자들이면 권세는 훨씬 파괴적입니다. 이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 이는 우리가 세상의 권세자들 대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세상의 권세자들이 우리 몸을 죽일 있는 자들임을 인정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두려운 것은 우리 앞에 살아있는 권세이며 이들의 위협은 매우 즉각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진정한 권세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셨을 , 상황은 끝이 나고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힘이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실컷 울면서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장례식도 이제 마지막 단계입니다. 나사로의 몸은 이미 썩어가고 있습니다. 다들 집에 돌아갈 시간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늦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말씀은 순수한 생명의 말씀이며, 또한 우리의 순전한 믿음을 요구합니다. 어떤 인간적인 가능성이나, 사람의 지혜에 따른 설명이나, 주변 상황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냥 우리가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고 믿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이 모든 면에서 마무리 늦게서야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오신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혼자이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하십니다. “내가 나사로를 다시 살리고 그에게 생명을 주겠다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라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가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이런 우리 생명의 보전을 위해서 도움을 주신다고 생각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다고 믿는 생명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리고는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 이것은 은유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대로 진리입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으며, 우리에게 필요한 생명은 예수님 안에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참으로 죽고 모든 것이 끝났을 , 우리의 눈이 열립니다. 부활이요 생명 되신 예수님을 있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단과 세상 권세자들은 우리에게 죽음의 권세를 휘두르면서, 마치 우리가 자인 것처럼 우리를 죽이겠다고 위협을 합니다. 하지만 생명이 안에 있지 않고 예수님 안에 있음을 깨닫을 , 그들은 이상 우리를 죽음으로 위협할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부활과 생명의 씨를 심으셨습니다. 신기하게도 씨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 그리고 세상에 대해 죽었을 자라납니다. 사실, 우리의 죽음은 우리 안에 심겨진 생명의 씨가 자랄 있는 토양이 됩니다. 그리고 씨는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세상에는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 가졌지만 죽음의 두려움 가운데 살며, 사단과 세상 권세자들의 노예가 되어 영원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의 생명을 버렸지만,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안에서 영광스러운 소망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남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아는데 마음을 드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