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혈루증 걸린 여인을 치료하신 예수님
- 믿음의 원리들 (II) -
마가복음 5:21-43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오늘 본문을 기초로 몇 가지 믿음의 원리들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시고, 또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여자의 병을 치료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나 오랜 세월을 치료할 수 없는 병으로 시달린다는 것은 참으로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매우 감사하게도 이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계셨으며 또 이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삶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습니다. 믿음은 “원리”입니다. 곧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로마서 10:11절에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저”란 하나님께서 시온에 두신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부딪히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되십니다. 하지만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반석이 되십니다. 이 원리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지난 주에 배운 믿음의 원리들을 잠깐 돌아보자면, 첫째, 믿음은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곧 믿음을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영혼의 구원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둘째로, 믿음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믿음은 나와 예수님 사이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1:1의 만남이며, 그 사이에 다른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 셋째로, 믿음은 “겸손함과 간절함”으로 표현됩니다. 믿음이란 내 삶의 전부를 예수님께 맡기는 것이며, 이를 통해 가장 소중하며 나의 전부가 되는 것 곧 영혼의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만큼 믿음은 주님 앞에 겸손하고 간절해야 합니다. 넷째로, 믿음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곧 시간이 없다고 서두르거나,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 포기하는 대신 계속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때에 주님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오늘도 본문 말씀을 기초로 몇 가지 다른 믿음의 원리들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믿음은 “믿음의 말과 생각”입니다. 사람들의 말과 생각은 대체로 “두려움”으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생각을 하며 자신감과 확신을 갖고 살자고 다짐을 해도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고 나면 그런 자신감이 사라지고 생각이 부정적으로 변합니다. 결국 불행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며 부정적인 말을 내뱉음으로써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혈루증 걸린 여자는 12년 동안이나 그 병을 앓았습니다. 많은 의사들을 만났지만 치료를 받기는커녕 괴로움만 당하고, 재산을 다 허비하고, 아무런 효험도 없이 병은 오히려 악화되었습니다. 불치병 자체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그녀의 마음 속에 깊게 뿌리내린 불신과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들을 들은 후 주님께 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12년 가뭄으로 메말랐던 땅에 단비가 내린 후 파아란 싹이 꿈틀 돋아나듯이 소망의 생각이 돋아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그리고 과연 그녀의 생각대로, 곧 그녀의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믿음이란 다름이 아니라 “믿음의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사람들이 와서 말하기를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하였습니다. 이들은 마치 친절하게 예수님을 배려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헛걸음 하지 마시고 그만 돌아가시라”는 말입니다. 이는 또한 딸을 잃은 아빠의 아픈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소망의 불씨를 무자비하게 꺼버리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그의 마음에 믿음의 생각을 심으시고 소망의 불씨를 돋우셨습니다. 또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셨을 때 시끄럽게 울며 통곡하는 사람들을 보시고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이들의 반응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이들은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심히 통곡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실 때, 설령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더라도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마음의 위로를 받고 또 예수님께 감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태도를 돌변해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조롱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는 이들에게 죽음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 아이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가족들과 함께 슬픔을 나누는 것 같지만, 실상 그들의 애곡은 아이를 관 속에 집어 넣고, 그 뚜껑을 닫아 못을 박고, 그 위를 흙으로 덮고, 발로 쾅쾅 밟아 흙을 다짐으로 아이의 죽음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사실로 확정 짓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시끄러운 죽음의 행진을 막아 서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그리고 이들을 모두 내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말씀”으로 어두운 죽음의 기운을 흩으셨습니다. 그리고 누워있는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곧 “소녀야 일어나거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말씀대로 소녀가 잠에서 깨어나듯 일어나 걸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로마서 10:10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리고 앞에서 인용한 말씀 10:11절이 나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세상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믿음의 생각을 하고 믿음의 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과 생각을 조롱하며,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실패와 죽음과 절망으로 끝날 것인지를 몰래 지켜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지키고 우리의 입술을 지켜야 합니다. 계속해서 믿음의 생각을 하고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 구원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구주 예수님을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절대로 우리의 믿음을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 약속을 믿고, 늘 예수님과 그의 신실하신 사랑과 구원의 능력을 인정하는 믿음의 생각, 믿음의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은 믿는 자에게 창조적인 지혜와 능력을 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주인공 곧 회당장 야이로와 혈루증 걸린 여자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방식은 서로 매우 다릅니다. 한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간청하며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합니다.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이에 반해, 여자는 사람들 가운데 섞여서 몰래 예수님의 뒤로 다가와서 예수님의 옷에 살짝 손을 대었습니다. 병이 나은 후에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그 자리를 벗어나고자 하였습니다. 혈루증 여자는 앞서 야이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간청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아, 나도 저렇게 앞에 나가서 무릎을 꿇고 간구해야 하는 건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야이로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전혀 다른 “자신의 방식”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복음서에서 사람들에 예수님께 나아가는 모습들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마가복음 2장에 나오는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서 계신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지붕으로 올라가 구멍을 뚫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달아내렸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미워하는 다른 동료 바리새인들의 눈을 피해 밤에 몰래 예수님을 방문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장님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주의를 끌기 위해 큰 소리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쳤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세리장 삭개오는 키가 작아 예수님을 볼 수가 없자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길목에 서있는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들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폐가 되기도 하고, 때로 떳떳하지 않게 혹은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하고, 무례하게 생각될 수도 있으며, 사람들의 상식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기에 이들은 지혜롭고 창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자신들의 한계와 외부의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남들이 볼 수 없는 길을 보았습니다. 또 그 길을 걸어가는 중에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거나 의견을 묻지 않고 오직 “내 믿음”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행동을 평가하실 때는 오직 한 가지를 보십니다. 곧 그것을 “내 믿음”으로 했는지를 보십니다. 내 믿음이 없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합니다. 예수님을 좇는 많은 “무리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또 내 믿음이 없을 때 우리는 작은 장애물을 만나도 좌절하고 포기합니다. 딱 정해진 길 외에 다른 길을 찾아볼 창의적인 지혜와 용기가 없습니다. 또 내 믿음이 없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눈치를 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우왕좌왕하며 마음에 정함이 없습니다. 내 믿음이 없음은 마치 장님이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내 믿음”이란 내 마음 속에 오직 예수님만 홀로 환한 빛으로 켜져 있어서 내가 오직 이 빛으로만 인도함을 받으며 이 오직 빛을 향하여 나아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빛을 바라보는 한 우리는 길을 잃지 않으며, 길이 없어도 새 길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이 빛이 내 마음 속에서 꺼지면, 우왕좌왕하는 대신 차분이 앉아 기도하고 회개하면서 이 빛이 다시 켜지기를 기다립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는 자의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신기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됩니다. 같은 이야기가 없습니다. 믿는 우리 각자의 삶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지어내신 창조적인 예술품입니다.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는 우리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얻어집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의 중심 주제는 “믿음”입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자는 믿음으로 12년이나 된 난치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으며, 회당장 야이로는 믿음으로 죽은 딸을 다시 살려 받았습니다. 사실 오늘 이야기의 또 다른 주제는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이로의 죽은 딸은 말할 것도 없고, 혈루증 여자의 삶도 “생불여사” 곧 살아있으나 죽은 자와 같았을 것입니다. 26절은 이 여자의 형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 세상에 이것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녀의 삶은 “모든 면에서” 더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진 것입니다. 이것은 야이로의 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야이로가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는 그의 딸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Is dying”). 하지만 그가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가는 도중에 딸이 죽고 말았습니다 (“Is dead”).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마도 야이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때야말로 “참 믿음의 시작”이었습니다. 물론 야이로는 예수님께서 딸을 고쳐주실 것으로 믿고 그 앞에 나아와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딸이 죽기 전” 까지만 유효한 믿음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목숨이 붙어있을 때까지만, 곧 “가능성”이 남아있을 때만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믿음은 “두려움”에 쫓기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골짜기”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모든 가능성이 사라지고 끝이 났습니다. 절망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예수님은 여전히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참된 믿음은 “죽음” 위에 세워집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죽음까지도 그 발 아래 짓밟고 그 위에 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것을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사실 “믿음”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참된 믿음 곧 부활의 믿음을 갖는 자체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오직 우리가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얻어집니다. 베드로전서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에서 베드로는 시련을 통해 순전한 믿음이 얻어지는 것을 불로 연단하여 순수한 금을 얻는 것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이 순전한 믿음은 순금보다 더 귀한데 이는 그것이 우리에게 장차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주님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12년 혈루증으로부터 나음을 입은 여자나 죽음에서 부활한 야이로의 어린 딸도, 후에 다시 나이가 들어 이 땅에서의 생명을 마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 “금보다 귀한 믿음”이 있습니다. 이들이 여전히 육체의 생명을 따라 살았더라면, 다시 병에 걸리고, 다시 죽음에 이르며, 다시 절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이들은 이미 죽음의 강을 건너갔습니다. 이제 이들은 죽음을 딛고 서있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다시 죽음의 순간이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은 죽음을 이겨내는 부활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매일 반복됩니다. 그것은 매일 내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4). 모든 육체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그 죽음 위에 오직 온전한 믿음으로 다시 서는 것입니다. 장차 올 부활에 대해서 말하는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5:31). 바울은 이 땅에서의 생명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예수님 안에서 장차 올 부활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그의 삶은 늘 죽음의 냄새를 풍겼습니다 (고린도후서 2:16). 하지만 실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만 죽음을 짓밟고 조롱하며 믿음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좇아 사는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오직 죽음을 딛고 일어설 때만 참된 믿음이 됩니다. 죽음의 시련이야말로 참된 믿음의 시작이며, 매일 그 믿음을 새롭고 정결하게 하는 “불”이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은 예수님과 나 사이의 은밀한 비밀입니다. 혈루증 여자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몰래 손을 댔을 때, 예수님은 그녀의 은밀한 믿음을 알아채셨습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시며 그녀를 찾으셨습니다. 사실을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된 그녀는 예수님께 나아와 일어난 일을 모두 아뢰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그녀를 다독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웠을지를 생각하면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자신의 깊은 속마음과 몰래 한 행동까지 다 아시고, 더 나아가 그녀를 찾아 대면하시고 “딸”이라고 부르시며 은혜를 베푸시고, 칭찬하시고, 축복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녀는 예수님과 깊은 사랑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녀가 이제 알게 된 것은 이것이 “짝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마음 속 비밀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기대와 바람보다 훨씬 더 크고 놀랍게 주님께서 그녀에게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는 오히려 예수님께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시고 오직 그 부모와 세 제자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만을 데리시고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딸을 살리신 후에도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셨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은 예수님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그 사역을 하시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하신 것일까요? 왜냐하면 이 일은 예수님과 야이로 사이에 일어난 “믿음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을 보며, 자신들이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합니다. 야이로의 죽은 딸이 살아난 것을 본 사람들은 틀림없이 예수님의 능력에 탄복할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아이를 구경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자세히 분석하며 “죽은 자를 살리는 방법”을 연구할 것입니다. 하지만 늘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야이로의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이 믿음에 대한 예수님의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은 오직 그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보이지도 않으며 보여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야이로와 예수님만 아는 매우 은밀한 비밀입니다. 그리고 이 은밀한 믿음이 오늘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가장 중요한 “전부”는 쏙 빼버리고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가지고 아우성을 칩니다. 믿음을 축복하신 예수님의 착한 일이 사람들 가운데 “기이한 기적”으로 회자되고, 흥미로운 구경거리로 전락하게 됩니다. 몰래 믿음의 행동을 한 여자를 찾아내시고 축복하신 것과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신 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신 것은 서로 모순이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예수님께서 그녀의 “귀한 믿음”을 알고 계심을 그녀에게 드러내신 것이며, 후자의 경우는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귀한 믿음”이 한낱 사람들의 가십거리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시는 것입니다. 이 둘은 모두 “믿음이 오직 나와 예수님 사이의 은밀한 비밀”임을 잘 드러냅니다. 죄는 “사단과 나 사이의 은밀한 거래”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예수님과 나 사이의 은밀한 사랑”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보이거나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사이의 사랑도 오직 그 사랑의 가치를 알고 축복해줄 사람들과만 나누고 싶어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믿음의 진심을 가장 잘 알아주시고 축복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님 앞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그리고 오직 예수님의 알아주심을 바라며 은밀하게 주님을 향한 믿음을 키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믿음의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고 예수님의 은혜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믿음을 키워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가리켜 “밭에 감추인 보배”와 같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 각자가 가진 믿음은 내 영혼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천국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매일 하나님의 천국 잔치에 초대되며,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정말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믿음의 원리들을 잘 알고, 매일을 믿음으로 살며, 더 크고 순결한 믿음을 키워나가며, 그래서 매일 하나님 안에서 천국의 축복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