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편 103)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1. 12. 27. 04:44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편 103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벌써 일년의 시간이 지나고 해를 끝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난 날들을 돌아보면 뿌듯함 있지만, “아쉬움 느껴집니다. 이런 느낌은 우리가 생애를 마감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마감하는 순간에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울 있는 그런 뿌듯함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이 지은 여러 시편들 하나입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자신의 영혼에게 말합니다. “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속에 있는 것들아 성호를 송축하라!”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무려 40년이나 땅을 통치했습니다 (열왕기상 2:11).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다스렸으며, 이웃 나라들과도 평화를 누렸습니다. 다윗은 이런 자신을 기리기 위해 자신의 이름과 업적을 새겨놓은 공적비 세울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그런 뿌듯함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갖게 되는 감회는 오히려 죄악,” “질병,” “파멸 같은 어려움들로 점철된 회한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난의 여정에서 그의 많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끝까지 지켜낸 가지 미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 그의 앞에 모시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경외하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은혜는 다윗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이 생겼습니다. 샘에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송의 샘물이 흘러나왔습니다. 맑고 향기로운 찬양이 끊임없이 솟아났습니다. “하나님께 감사그리고 하나님께 영광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흘러 넘쳐 세상을 적시는 강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넘어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흘러왔습니다.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속에 있는 것들아 성호를 송축하라!” 여기서 송축한다 말은 찬양한다라기보다는 축복한다 뜻에 가깝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도 NIV 번역은 “Praise the Lord” 여호와를 찬양하라 말을 번역하고 있지만, KJV, ESV, RSV 같은 유력 번역본들은 모두 “Bless the Lord” 여호와를 축복하라 말을 번역합니다. 창세기 12:2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여기서 복을 주어라고 하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송축하라 말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원어로 “Barak”인데, 이것은 오바마 대통령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축복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있는 것은 아닌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축복을 필요로 하시지 않을 것이니까요. 혹자는 우리가 하나님을 축복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일하신 복의 근원이 되심을 인정하고 베푸신 모든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가장 마음에 닿는 설명이라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로부터 기대하시는 가장 기대(Greatest Expectation) 아마도 그것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일한 복의 근원이 되심을 인정하고 그가 베푸신 모든 은혜를 기억하며 이를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다윗은 성호를 송축하라 하며, “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합니다. 말씀들이야말로 여호와를 송축하라 말의 뜻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고 있습니다. “성호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은택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좋은 일들 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송축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좋은 일들을 기억함으로써 그의 거룩한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축복이며 우리의 찬양인 것입니다. 요한1 4:19절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 속에는 사랑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축복 관해서도 진리입니다. 우리가 축복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축복하셨음이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랑을 알고 기억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사랑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직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받아서 누리고 기억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든 은택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3-5 말씀에서 다윗은 자신의 영혼(“”)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다윗이 앞에 내세우는 것은 모든 죄악 모든 입니다. 말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모든 은택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비록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기는 하지만, 다윗은 안에 자신에 대한 자랑 조금 섞어 넣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모두 죄악 질병뿐이었습니다.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자신을 생각할 악하고 약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은택을 기억하고 드러내는 자리에 자신의 모든 죄악과 자신의 모든 질병을 또한 기억하고 드러냈습니다. 오늘 본문의 13-15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날이 풀과 같으며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다윗의 눈으로 보기에 인생 너무나도 측은한 존재입니다. 본질이 진토 먼지입니다. 날은 풀의 그것처럼 매우 짧고, 날에 누리는 영화도 들에 꽃처럼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렇게 측은한 존재인 사람에게 있어서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심과 같다고 고백합니다. 고백은 다윗이 그의 연약함 중에 얼마나 간절하게 하나님을 구하고 의지했는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얼마나 신실하고 친절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그의 모든 병을 치료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왕에게서 위대함 봅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봅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그의 모든 죄악과 질병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위대한 왕이 있었던 비밀인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영화로움 속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떠났을 , 그는 죄악과 약함으로 부서지고 흩어질 먼지 불과했습니다. 그가 약한 만큼, 그의 생애 전체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었습니다. 긍휼하심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그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그의 모든 병들을 고치시도록 항상 다윗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삶의 비밀입니다. 우리의 삶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셨도다” (4). 다윗은 그의 생애 동안 죽음을 넘나드는 위험한 고비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는 군인인지라 (역대상 28:3), 적들과의 전쟁을 많이 치렀습니다. 그를 시기하여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사울 왕이 다윗의 생명을 위협했습니다. 심지어 다윗은 어릴 적에도 홀로 들에서 아버지의 양떼를 지키는 목동의 일을 했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푸른 초원이 넓게 펼쳐져 있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사자나 같은 사나운 들짐승들이 호시탐탐 양들을 노리는 척박하고 외진 들판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7:34-35). 다윗은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다 간증합니다 (사무엘상 17:37). 하나님께서 다윗을 모든 위험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싸개 속에 싸서 안전하게 보호하셨습니다 (사무엘상 25:29). 다윗은 하나님께서 인자와 긍휼 자신에게 씌우셨다고 고백합니다. “(crown)”이란 승리와 영광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경기가 끝났을 , 또는 전쟁이 끝났을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상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의의 면류관” (디모데후서 4:8), “영광의 면류관” (베드로전서 5:4), “생명의 면류관” (요한계시록 2:10) 등이 믿음의 싸움을 이긴 신자들이 장차 마지막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받을 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가리켜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머리 위에 씌우신 면류관이라고 부릅니다. 다윗의 삶은 결코 생명 없었습니다. 이는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안으로는 많은 죄악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밖으로는 여러 악한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22장에 기록된 다윗의 노래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22:4-5). 하지만 다윗은 오히려 무서운 파멸의 구덩이에서 자신을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이기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그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그의 생명이며, 그의 자랑이며, 그의 영광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그의 면류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마감하는 자리에서 무엇을 자랑할 있을까요? 세상의 영화는 들의 같습니다. 인생을 마감하는 자리에서 그것은 자랑이기보다는 오히려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있는 것은 오직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베푸신 하나님 아버지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입니다. 그리고 인자하심은 크고 (11), 영원합니다 (17). 참으로 감사하고 자랑스럽게도 하나님께서 크고 영원하신 인자와 긍휼을 우리 머리 위에 왕관처럼 씌우셨습니다.

 

5 말씀입니다. “좋은 것으로 소원을 만족케 하사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영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며, 그의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짧은 말씀으로도 시편 기자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함이 따뜻하게 전해지는 느낌입니다. 잠언 13: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 소원이 이루는 것이 생명나무니라.” 사람들에게는 어떤 소원 또는 소망이 있습니다. 목마름이나 배고픔을 채우고 싶은 생리적인 필요도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성과를 내고 싶은 성취 욕구도 있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밖에도 우리 마음 속은 크고 작은 소원들로 가득합니다. 우리의 삶은 이런 필요들과 소원들을 채우기 위한 노력이며, 그것이 채워지는 만큼 우리의 삶이 행복하고 풍요로워진다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영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신다 고백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행복한 위해서 믿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소원을 이루어주시도록 믿고 맡겨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첫째 이유는 우리 속에 나쁜 소원들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원의 성취는 우리에게 만족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절망을 가져옵니다. 창세기 4:7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내게 만족을 주는 좋은 무엇인지를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만족을 주십니다.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원을 품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머무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더디게 일하실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맡기며,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행복에 대해 시편 84:10-12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의 궁정에서 날이 다른 곳에서 날보다 나은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집에서 문지기로 하루를 사는 것이 악인의 집에서 호의호식을 하면서 날을 사는 것보다 복된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의 값으로 사신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참으로 주님은 우리의 삶을 좋은 것으로 채우시기를 간절히 원하시며, 그렇게 하실 있으며, 반드시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하시는데 있어서 결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것은 겸손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이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축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복이란 무엇인가 알아야 합니다. 둘째, 복의 근원 복이 어디에서 오는가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다윗의 고백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구분이 모호해집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은혜들 복들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들보다도 부족한 자신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깊이 사로잡힌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다윗이 그의 인생에서 받은 진정한 축복은 다름이 아니라 자비하신 하나님을 만난 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형용하여 그려내는 캔버스와 같았습니다. 그의 영혼이 하나님으로 채워진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84:4).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우리가 거하는 고향 같습니다. 곳에 가면 쉼을 얻고, 힘을 얻고, 만족함을 얻고, 새롭게 됨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름을 찬송함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지난 동안 살아온 삶이며, 앞으로 살아갈 삶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그의 은택을 누리며, 이름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복입니다. 우리 복의 근원이 되시며, 또한 우리의 복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합니다. 새해에는 자비하신 하나님을 가까이 동행하며, 베푸시는 은택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향한 찬송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샘처럼 솟아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