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하나님의 사랑이신 예수님 (마가복음 3:20-35)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1. 12. 13. 05:01

하나님의 사랑이신 예수님

 

마가복음 3:20-35

 

제가 오늘 설교의 제목을 하나님의 사랑이신 예수님이라고 붙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과 약간 동떨어진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제가 말씀을 묵상하면서 받은 은혜를 따라 그렇게 정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진실하고, 순수하고, 지극합니다. 사랑은 조건이 없고, 신실하며, 일방적입니다. 그래서 변하지 않습니다. 마치 흔들리지 않는 태산과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은 우리의 생명이며, 우리의 능력이며, 우리의 기쁨이고 평안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대한 사람들의 사랑은 조건적이며 쉽게 변합니다. 호세아 6:4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사랑이) 아침 구름이나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마음을 다해 극진히 사랑하시는데, 저들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마치 아침 구름이나 이슬처럼 아주 잠깐 있다가 금방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들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아침구름이나 이슬 같을까요? 호세아 선지자의 말에 따르면이는 저희가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의 수하를 음란하듯 떠났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5:12). 흥미롭게도, 호세아 선지자는 쉽게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 우상을 따르는 이들의 존재 자체를 가리켜 저희는 아침 구름 같으며 쉽게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우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다 합니다 (호세아 13:3).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향하여 정함이 있고, 사랑을 의지하고 뜻을 순종하여 살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 만큼이나, 그리고 하나님 자신 만큼이나 안정되고, 평안하며, 축복됩니다. 시편 125:1 말씀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마음에 정함이 없으면, 마음은 쉽게 흔들리고 의심하며, 유혹에 쉽게 미혹되고, 작은 일에도 쉽게 두려움에 빠집니다. 참으로 아침 구름 같고, 금방 사라지는 이슬 같고, 바람에 날려가는 쭉정이 같고,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와 같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사랑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많은 고생을 하며 각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말씀이 진리임을 실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공부하고 배움으로써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 쌓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가지 중요한 지식을 얻을 있습니다. 첫째는 20 말씀입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3장의 앞부분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바닷가에서, 그리고 산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고, 제자들을 부르시는 일들을 하셨습니다. 각처에서 몰려든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많은 일들을 하시고 이제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아마도 퇴근 하신 같습니다. 얼마나 피곤하실까요? 이제는 발도 씻으시고, 저녁도 드시고, 휴식도 취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럴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신 후에도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고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본문에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집에 계신 동안에도 계속해서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을 영접하시고 섬기신 같습니다. 최소한 먹을 시간은 있어야 하는 아닌가요?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너무하다 싶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온유하시고 친절하시길래 사람들이 이렇게 염치없이 앞에 나아올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정말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런 장벽 장애물 없어 보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관계가 없습니다. 부모-자식, 남편-아내, 형제 자매와 같이 가까운 사이에도 지켜야 예의가 있고, 넘지 말아야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함부로 찾아가거나 심지어 전화를 그렇게 해서도 안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어떤 예의도 요구하지 않으시며, 어떤 선도 긋지 않으십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무조건적인 초대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한복음 7:37b-38). “내가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5).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10:9). 예수님의 초대의 말씀들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유일한 것은 내게로 오라” “나를 믿으라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침노(advancing)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12). 말씀은 거의 우리의 무례하고 염치없는 침범 부추기시는 것으로 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피곤하신 중에도 앉아 식사를 하시며 쉬시기보다는 밖에 모인 사람들이 문을 깨부수고 들어와 앞에 나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시며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붕을 깨부수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 칭찬을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2:4).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이사야 65:2).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종일 죄인이 자기에게로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둘째로, 28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는다 하십니다. 말씀은 성령을 훼방하는 얼마나 무거운 죄인지를 설명하시기 위한 것이지만, 말씀 자체로 우리에게 말할 없이 놀라운 소식이 아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완전함 예수님께서 어떤 죄인들을 섬기셨는지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중에는 이기적인 세리장 삭개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세속적이거나, 욕심이 많거나, 교만하거나, 의심이 많거나, 두려워하거나, 무정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까지 예수님을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정말 용서하기 힘든 배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위에서조차 자신을 못박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가복음 23:34). 지금 예수님께서 위하여 기도하시는 사람들은 당장 앞에서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며 나를 조롱하고 있는 악인들입니다. 그들의 죄로 인해 예수님께서는모든 잃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진심으로용서하시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말 예수님의 용서의 한계는 어디일까 가늠할 없습니다. 한계가 없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와 모든 훼방하는 훼방 사하심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용서하신다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사야 1:1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하십니다. “변론한다 말은 누가 옳고 그른지에 대해 판단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만나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시면서 우리 마음 속에 숨겨진 죄들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죄를 정하여 벌을 주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고, 이와 함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심지어 죄가 주홍같고 진홍같이 아주 선명한죄일지라도, 눈처럼 양털처럼 하얗고 깨끗하게 씻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주홍같은 죄를 선명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또한 죄가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눈처럼 깨끗하게 씻어졌습니다. 용서의 사랑 또한 무조건적인 초대입니다. 그냥 오라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죄를 드러내시고 깨끗하게 하시는 용서의 사랑입니다.

 

셋째로, 27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 성령의 은혜 안에 살게 되는지를 설명하십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집을 늑탈하리라.” 말씀에서 강한 사단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세간 권세 아래 잡혀 있는 우리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령께서 강한 사단을 결박하시고, 그에게 잡혀 있는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보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태복음 12:28). 예수님께서 사단 마귀를 결박하시고 그가 다스리는 어둠의 나라에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성령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로 옮기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나라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나라가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집이 없고……” (24). “나라라는 말의 성경 원어는 “Basileia”인데, 말의 뜻을 어원적으로 풀이하면 능력의 근원(the foundation of power)”으로 이해할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개인은 그가 속한 나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가 사람의 능력의 근원이 됩니다. 나라 국력에 따라서 강한 나라의 국민들은 존중되고 보호받는 반면, 약한 나라의 국민들은 멸시를 당하고 제대로 보호를 받지도 못하며, 심지어는 나라를 잃고 난민이 되어 이곳저곳을 유랑하기도 합니다. 영적 세계에는 오직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또는 천국이며, 다른 하나는 사단 마귀의 권세 아래 있는 어두움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우리 개인들의 삶은 그가 속한 나라에 따라 전혀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 여자가 낳은 중에 세례 요한보다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하시고는 더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하십니다 (마태복음 11:11). 말씀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 가운데 임하는 천국 얼마나 놀랍고 영화로운지를 드러냅니다. 오늘 말씀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성령의 권능입니다. 누가복음 4:14절에, 예수님께서 사단 마귀의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셨다 말씀합니다. 그리고 권능으로 예수님은 강한 사단을 결박하시고 그의 세간을 늑탈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권능을 모든 천국의 시민들에게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처음 하신 일은 그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20:22-23 말씀입니다. “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하시니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린도전서 4:20). 말씀들은 우리 능력의 뿌리가 성령의 권능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우리는 생명으로 거듭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며 (요한복음 3:5), “의와 평강과 희락 누리며 (로마서 14:17),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며 (에베소서 2:18), 예수님의 일군이 되어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로마서 15:16). 참으로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크고 좋은 사랑의 선물이 되십니다 (누가복음 11:13).

 

넷째로, 33-35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그리고 자신을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 모친과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님의 친모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예수님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으로 맞아주십니다. 말씀을 거꾸로 이해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자는 그가 친모나 친동생나 친누이일지라도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피로 맺어진 관계보다 각별한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붙드십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으로만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며, 관계를 돈독하게 하십니다.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당신을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1:27). 당신같이 훌륭한 아들을 낳고 기른 당신의 어머니는 참으로 복을 받으셨네요!” 하는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참으로 있는 여자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있는 여자가 것은 예수님을 낳고 기른 어머니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가 있는 여자가 것은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하며 (누가복음 1:38)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셔서 십자가를 지고자 하실 ,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그의 인간적인 충성심 따라 예수님을 붙들고 말리며 길을 가로막고 서서 주여 그리 마옵소서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꾸짖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아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태복음 16:23). 요즘 뉴스에 친인척 비리 이익 카르텔이라는 말들이 자주 나옵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들이 아니더라도 세상의 관계들 모두 하나님의 대신 악하고 이기적인 사람의 욕심 추구합니다. 이런 관계를 맺고 유지하고자 많은 죄를 짓고, 혼란에 빠지며, 경쟁하고, 두려워합니다. 이렇게 악하고 이기적인 세상을 생각할 , 예수님의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 말할 없이 위로가 되며 생명이 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 우리는 예수님의 친밀한 식구이며 그가 계신 방에서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길을 배우며 주님과 함께 하기를 힘씀으로써 더욱 하나님의 뜻에 가까워질 있습니다. 참으로 먹고 먹기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복입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너무나 순결하고 순수해서 우리가 아무런 의심 없이 마음껏 먹고 마셔도 해롭지 않은 맛있는 음식과 음료와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악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훼방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의 씨를 뿌리는 자들입니다. 물론 이들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22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에 지폈다 하며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더러운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며 나라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들자, 예수님의 높은 인기를 시기하고 이를 경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도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종교 권력을 휘두르는 가짜 목사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입니다. 현재 예수님께서 일하시고 계신 갈릴리의 시골 마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 매우 특별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공부도 많이 하고, 영적인 문제에 대한 경험과 지식도 많고, 따라서 모르는 것이 없는 전문가들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참으로 파괴적인 위력 지녔습니다. 이들의 말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하신 많은 착한 일들을 순식간에 마귀의 둔갑시켰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하신 예수님 더러운 귀신이 들려 미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하는 짓을 가리켜 성령을 훼방하는 라고 하시며, 죄를 짓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한다 하십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예수님께 대해서 사람들에게 증거하시는 입니다 (요한복음 15:26).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요한1 5:5),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가운데 육체로 오셨으며 (요한1 4:2),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1 5:1). 이것이 진리의 성령께서 증거하시는 진리이며, 우리 믿는 자들이 알고, 믿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 요한1 4: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나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오늘 말씀에서도 우리는 진리의 성령님과 미혹의 사단을 구분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미신 사랑의 팔이 되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과 죄로 인해 잠시 사랑을 싫어하거나, 귀하게 여기지 않거나, 잊어버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마귀의 훼방하는 죄를 범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귀신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나라를 거스리는 용서받을 없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순수한 것일수록 더럽혀지기가 쉽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순수한 사랑을 의심하는 거짓된 말들과 생각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사단 마귀가 사람들의 마음에 뿌린 것이며 퍼져나간 것들입니다. “ 혀가 사람을 잡는다,” “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한국 속담이 있습니다. 영어 속담에도 나쁜 소식은 날개가 달려있다 (Bad news has wings)”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쁜 , 의심의 , 거짓말에 솔깃하고,  그래서 이런 말들은 쉽게 회자되고, 널리 빠르게 퍼지고,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스며들어 마치 진리인양 자리를 잡습니다. 이런 훼방하는 말들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쉽게 미혹되고 마치 바람에 날리는 구름이나 연기처럼 불안하게 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우리가 어떻게 태산 같은 하나님의 사랑 견실하게 정착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사랑하시는 자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예수님 앞에 서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쉽게 훼방하는 말들을 분별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태산 같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평안함을 회복하며 빛의 자녀들로 안정된 삶을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이십니다. 우리의 삶이 진리에 깊이 뿌리 내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