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열 두 사도를 세우신 예수님 (마가복음 3:6-19)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1. 11. 29. 01:53

사도를 세우신 예수님

 

마가복음 3:6-19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 중에 둘을 부르시고, 그들을 사도 세우십니다. 사도(使徒) 어떤 특별한 일을 위해 보냄을 받은 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apostle”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헬라어의 보내다 (apostello)”라는 동사로부터 나온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4절에 보내사 전도도 하며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보내사라는 말에 해당하는 원어의 동사가 바로 “apostello”입니다. 예수님의 사도란 예수님의 도를 전하기 위해, 전도를 위해 보내심을 받은 사람 말합니다. 따라서 전도는 사도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사도를 부르신 목적은 이것 뿐이 아닙니다. 본문에는 가지 목적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14-15 말씀입니다. “이에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예수님께서 사도를 부르신 목적은 첫째,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시며, 둘째, 사람들에게 보내셔서 전도를 하게 하시며, 셋째,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를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가지 일들은 각각 예수님께 대하여, 사람들에 대하여, 그리고 귀신에 대하여 행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뜻은 하늘과 땅을 모두 아우르는 가히 우주적인 부르심이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지 일들은 어느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매우 중요한 사명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를 세우시기 상황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들을 부르셨는지, 그리고 그들에게 주신 사명들이 그렇게 중요한지를 이해할 있습니다. 지난 주에 공부한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마른 자를 일으켜 세우시고 그의 마른 손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바리새인들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악한 죄를 드러내시고 그들이 회개하도록 도우셨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마음의 완악함을 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더욱 완악해져서, 바리새인들은 헤롯당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님을 죽일까 의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시고 은혜를 베푸셨는데, 이들은 함께 하심의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하기는 커녕, 오히려 주님을 해하기 위해종교 권력 정치 권력 손을 잡고 힘을 합한 것입니다. 사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이 없었습니다. 대신 악한 욕심과 거짓과 살인심만 가득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종교 권력 이용하여 안식일 성전(회당)” 점령하고 악용했습니다. 본래 안식일은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쉼을 누리는 시간이며, 성전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곳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섬기는 자들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일을 수행하여, 사람들이 안식일에 성전에서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은혜를 누리도록 섬기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사람들의 신앙 생활을 무거운 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즐기는 대신, 이들이 만들어놓은 수많은 규례들에 짓눌려 힘들어하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악함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태복음 15:8).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마태복음 23:4).

 

우리 신앙의 핵심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입니다. 우리에게 이것보다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다면, 신앙은 이미 가장 중심부로부터 썩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2-3장에 예수님께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시는 편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들 처음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 초대 교회들 가장 선도적이며 모범적인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거짓말을 네가 드러낸 것과 네가 참고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요한계시록 2:2-3). 참으로 에베소 교회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교회에 책망할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처음 사랑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처음 사랑이란 시간적으로 처음 의미하기도 하지만, 중요함에 있어서의 첫째 가리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말씀하시고 계명을 가리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 사랑 처음 여기 나오는 첫째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가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 대해 그들이 처음부터 가졌던 가장 사랑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잃을 , 교회는 머리 되신 예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겉은 멀쩡하지만 깊은 속이 병들고 썩어가게 됩니다. 생명도, 기쁨도, 능력도, 사명도 없이 무기력한 덩어리 전락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다는 것은 단순히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삶이 예수님 위에 세워지고 안에서 살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함께 연합 여러가지 은유들을 통해 설명합니다. 예수님과 제자 사이의 관계는 포도나무와 가지 (요한복음 15), 목자와 (요한복음 10), 그리고 머리와 (에베소서 4:15-16) 관계로 비유됩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의 생명의 떡이 되시고 (요한복음 6:35), 빛이 되시며 (요한복음 8:12),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십니다 (요한복음 14:6). 이런 비유들은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이 존재하며, 살아가며, 삶의 열매를 맺는 모든 과정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 그리고 주님 안에 거하는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사람들 속에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싫어하며 독립하기를 원하는 본성이 숨어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둘째 아들처럼 수만 있다면 갖고 있는 모든 재산들을 챙겨서 아버지를 떠나 나만의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재산,” “ 능력,” “나의 선함과 지혜로움만을 사용하여 성공하고 이를 통해 이름 높이고자 하는 야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멸시하고,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반대의 삶을 삽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첫째 덕목 자신의 생명과 삶의 길과 영광(칭찬) 오직 예수님께로부터 구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과 함께 하며,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주께서 가시는 길을 같이 걸으며, 주께서 머무시는 곳에 같이 머무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과 떨어져서는 시도 살아갈 없는 심히 의존적인자신을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참으로 그의 모든 것이 되심을 몸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다른 목적은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런데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부르심의 목적은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의 명성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7-10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인기를 실감할 있습니다. 7절에는 갈릴리에서 무리가 예수님을 좇았다 합니다. 8절에 따르면,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왔다 합니다. 여기 언급된 지역들을 합하면 사실상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가 됩니다. 땅으로부터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의 몸을 만지려고 앞다투어 예수님께로 돌진을 해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들과의 몸싸움에 시달리다 못해 작은 배를 위에 띠워 사람들을 피하셔야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데, 예수님께서 굳이 제자들을 마을들로 흩어 보내셔서 전도하게 하실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그냥 앞에 나아오는 자들에게 설교를 하시면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듣고 앞에 나아오는 자들 예수님께서 맡기시는 (전도)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구분하십니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1813-1855)라는 덴마크인 신학자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매우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그는 예수님 주위로 모여드는 사람들 경계해야 부류를 언급합니다. 하나는 무리(crowd)”입니다. 떼를 지어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개인들은 모두 마음 속에 어떤 진리 있습니다. “마땅히 지켜야 도리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개인들이 모여서 무리를 지을 , 이런 개인들 속에 있는 진리가 쉽게 공동의 이익 오염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무리속에 얼굴을 숨기고, 마땅히 지켜야 도리를 잊어버리고 매우 염치없고 탐욕스럽게 움직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무리 지어 행동할 얼마나 무례하고 난폭한 지를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경배와 순종을 받으실 주님 아니었습니다. 몸에 손만 대면 병이 낫는 신기한 물건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하나인데, 나라에서 모여든 병자들이 몸을 만지기 위해 한꺼번에 주위에 몰려들어 서로 밀치고 당기며 아수라장이 모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들의 절박한 필요 생각하면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제자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무리속에서가 아니라, “ 사람으로서 주님 앞에 서며, 주님을 대면하고, 주님께 얘기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그는 진리 따라 주님 앞에서 행동합니다. 진리란 예수님께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는 주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편으로는 없이 겸손하며 조심스럽게, 한편으로는 없이 간절하고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시선만을 의식하며, 빛에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맡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는 예수님 앞에 단독자로 있는 사람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자들을 따르는 (follower)” 구경꾼(admirer)”으로 구분합니다. 제가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해 구경꾼이라고 번역했지만 키에르케고르가 “admirer”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놀라워하고, 감탄하며, 칭송하는 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8절에 허다한 무리가 그의 하신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합니다. 이들이 바로 구경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보고 듣고 놀라워하며 예수님을 칭송하는 자들입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라는 사실입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자매가 있습니다. 그녀는 연주회가 끝났을 허탈함과 공허함을 많이 느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즐기며, 박수를 치고, 연주회가 끝나면 다가와서 잘했다고 칭찬의 말을 건네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두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녀는 연주회를 준비하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밤을 새우며 고생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준비한 그녀의 피아노 연주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루 저녁 무료함을 달래는 구경거리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름다운 음악을 어떻게 들을 있게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으며, 자신이 그런 연주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더더구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매는 연주회가 끝난 허탈함과 공허함을 느낍니다. 만일 관객 어떤 사람이 와서 그녀에게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를 있는지 배우고 싶습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으며, 당신이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이렇게 말한다면, 아마도 피아노 연주자는 몹시 기뻐할 것입니다. 허탈함과 공허함도 전혀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와 구경꾼을 이렇게 구분합니다. 따르는 자는 자신이 칭찬하는 그것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구경꾼은 자신이 칭찬하는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둡니다 (A follower is or strives to be what he admires. An admirer, however, keeps himself personally detached). 점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과 예수님께서 부르신 제자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임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위대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위대한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길을 걸으셨으며, 이것을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도 예수님의 그것과 똑같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의 제자로 부르신 것은, 우리 각자가 길을 따르고 배우며, 길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가르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구경하며 박수나 치는 구경꾼으로, 또는 무리 속에 숨어서 몰래 욕심을 챙기기에 바쁜 거짓 신앙으로 결코 예수님의 제자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오직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길을 배우고 따르며, 예수님의 길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길은 마디로 십자가의 입니다. 사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 아니고 오히려 부끄러운 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만 길의 가치를 이해하고 따라 걸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16:24).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 하나는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가 있게 하려 하심입니다. 말씀과 관련하여, 앞에 다시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제어하시는 모습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11-12 말씀입니다.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니라.” 말씀은 참으로 특이합니다. 귀신들이 예수님을 보고 앞에 엎드리며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말하는 것도 그렇고, 예수님께서 그런 귀신들의 말하는 것을 금하시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의 말로 높임 받으시기를 거절하십니다. 마가복음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발견되는 다른 장면이 있습니다. 15장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을 당하시다가 소리를 내시며 운명하셨을 , 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로마군 백부장이 말했습니다. “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마가복음 15:39). 예수님께서 가장 낮아지신 순간에 이방인의 눈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발견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지신,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의 비밀입니다. 귀신을 대적하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를 지기까지 겸손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마귀의 시험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마태복음 4). 사단은 계속해서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4:3, 6). 예수님을 만난 귀신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면서 예수님을 높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겸손으로 덮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대해서,” 그리고 오직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그리고 오직 아버지의 능력을 믿고 의지함으로써하나님의 아들이 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십자가 죽으심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모든 마귀의 궤계를 파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제자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부추깁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자녀라면……,” “네가 만일 예수님의 제자라면……” 하면서 우리를 시험합니다. 이런 시험에 넘어가면, 우리 속에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높이고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수치를 무릅쓰고 겸손히 낮아져 십자가를 지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할 없게 됩니다. 결국 귀신을 내어쫓는 대신 귀신의 까불림을 당하며  조롱거리가 됩니다. 점에서 예수님께서 귀신의 높임을 금하신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영적 권세는 하나님께 대한 겸손한 순종에서 나옵니다. 야고보서 4:6b-7 말씀입니다.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께 순복할 , 우리는 마귀의 궤계를 쉽게 분별할 있으며, 이를 대적하고, 쫓아낼 있습니다. 우리를 높이시는 이는 사람도, 마귀도, 귀신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야고보는 말합니다. “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야고보서 4:10). 베드로전서 5:6절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예수님의 제자는 마음으로 그리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의 길을 배우고, 행하며, 전하는 자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른 길을 걷는다고 해도, 많은 멸시와 수치를 당한다고 해도,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 없어도, 겸손히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주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깊은 뜻을 생각하면, 부르심의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지 말로 형용할 없습니다. 우리가 뜻을 마음에 새기고 붙들어, 주님의 부르심이 헛되지 않고 생명의 열매를 맺기까지 매일을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