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네 손을 내밀라 (마가복음 3:1-6)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1. 11. 22. 01:52

손을 내밀라

 

마가복음 3:1-6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마른 사람의 손을 회복시키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안식일 지키는 문제를 두고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바리새인들의 악함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하는데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병든 자들을 치료하시고 죄인들을 섬기시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빛과 어두움이,진리와 거짓이, 선과 악이, 생명과 죽음이, 그리고 구원과 멸망이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나고 대조되고 있습니다. 사람은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 손을 내밂으로 구원을 받고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빛을 싫어하여 어두움 속에 머물러 거짓과 살인을 도모하며 죽음과 멸망에 이르는 길을 고집하였습니다. 같은 세상을 살면서 이렇게 서로 다른 삶을 있다는 사실이 두렵게만 느껴집니다. 더욱 두려운 것은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시대에 가장 경건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하루는 아내와 함께 근처 해변에 조개를 캐러 갔습니다. 해변에서는 썰물을 따라 바다 안쪽으로 들어가서 모래를 파면 어른 손바닥 크기의 조개들을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때가 맞지 않아 이미 밀물이 들어오고 있어서 조개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물속 모래바닥을 이곳 저곳 찔러보는데 얕게 묻힌 조개 마리가 손에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꺼내보니 매우 크고 묵직했습니다. 잡은 조개를 내내 들고 다니며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때가 되어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경험상 이렇게 조개가 그렇게 얕은 곳에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죽은 조개였습니다. 조개 속에는 대신 검은 모래가 가득 있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조개를 자리에서 내던지고 말았습니다. 죽은 조개를 내내 소중히 들고 다녔다는 생각을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이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죽어서 썩어버린 조개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장에 하나님께서 백성인 예루살렘 시민들과 유다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중에 망대를 세웠고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포도를 맺혔도다” (5:1a-2). “내가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이 어찜인고?” (5:4).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람들을 위해 모든 좋은 것들을 베푸시고, 정성을 다해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런데 기대하시던 좋은 포도대신 시고 딱딱하여 먹을 없는 포도 열린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시니 거기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손이 말랐다는 것은 발육 부진으로 손이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하고 오그라져서 사용할 없게 상태를 말합니다. 누가복음 6:6절에는 구체적으로 오른 마른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손으로 하는 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오른 손을 사용할 없어 생기는 불편함이란 이루 말로 없을 것입니다. 세수도 손으로 해야 하고, 넥타이도 손으로 매야 하고, 바지를 입을 벨트도 손으로 채워야 합니다. 대부분의 먹고 사는 일을 손으로 해야 하던 당시를 생각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사람에게 마른 단지 신체적 문제 아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에게 가운데 일어서라하시고, 손을 내밀라하십니다. 말씀에 비추어보면 그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뒷자리에 앉아 있었으며, 그의 마른 손이 보이지 않도록 감추고 있었음을 추측할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도 선뜻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반가움을 표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마른 문제는 그를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구석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늘 속에 홀로 앉아 가만히 자신의 마른 손을 보고 있노라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도 은혜 느껴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도 사랑으로 다가오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도 능력으로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던 그날도 불쌍한 마른 사람은 그렇듯 무덤덤한 마음으로 회당의 그늘진 구석에 자신을 숨기고 앉아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실 , 다른 종류의 마른 사람들 있었습니다. 이들은 손이 마른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마른, 마음이 완악한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고, 병자들을 고치시며, 사함을 선포하시고, 천국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즐거워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놀라운 일들을 보고 자신들의 귀로 놀라운 말씀을 듣는데도, 보고 듣는 것들이 그들의 마음에 전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이 마치 바윗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른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음식을 많이 먹어도 영양분이 그의 마른 손에 전달되지 않고, 따라서 그의 손은 여전히 말라 비틀어진 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완악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비처럼 쏟아져 내려도 은혜가 마음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그냥 흘려 버려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가장 , 가장 심각한 문제,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혀를 내두르시며 드시는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완악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너는 완악하며 목의 힘줄은 무쇠요 이마는 놋이라하십니다 (이사야 48:4). 정말 표현이 무시무시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듣지 않고, 믿지 않고, 돌이키지 않고, 고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하실 있는 유일한 일이란 그들이 자신의 고집대로 행하여 죄의 열매를 맺고 맛을 보도록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고 가옥들에는 사는 사람이 없고 토지가 전폐하게 되고 사람들이 여호와께로부터 멀리 옮겨지고 가운데 폐한 곳이 많아질 때까지그렇게 하십니다 (이사야 6:11-12).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완악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말씀을 듣지 않아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다시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같은 악한 마음으로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스라엘은 참으로 마른 입니다.

 

2절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았습니다. 6절에 바리새인들이 나가서라는 말을 보면, 사람들은 바리새인들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마음 생각을 아시고, 마른 사람을 사람들 가운데 세우시고는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어느 것이 옳으냐?” 예수님의 질문은 그들의 감추어진 악한 속마음을 드러내시고 회개하도록 도우시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가던 길을 가겠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불쌍한 사람의 손을 회복시키시는 이적을 보이셨는데도 그들은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완악한 마음이 더욱 악해져 바리새인들은 회당을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님을 죽일까 모의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의롭고 경건한 종교지도자들이었지만, 속은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무덤 속과 같았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종인 것처럼 행세를 했지만, 사실은 마귀의 종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단 마귀를 지칭하는 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첫째는 거짓말장이 (liar)” (요한복음 8:44) 또는 시험하는 (tempter)” (마태복음 4:3), 둘째는 참소하는 (accuser)”이며 (요한계시록 12:10), 그리고 마지막으로 살인자(murderer)입니다 (요한복음 8:44). 사단이 하는 일이란 사람을 거짓말로 미혹하거나 시험에 빠뜨려 죄를 짓게 하고, 죄를 근거로 사람을 정죄하고 참소하며,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단의 속성을 생각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행동이 얼마나 마귀적인지를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축복하시기 위해서 주신 안식일 규례 이용하여,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하고, 송사하고, 죽이고자 했습니다. 심지어 일을 위해 불쌍한 마른 사람 한낱 미끼로 이용했습니다. “완악한 마음 참으로 무서운 병입니다. 몸이 굳는 병보다 마음이 굳는 병이 훨씬 두렵습니다.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나의 굳어가는 마음을 주물러 회개하고 부드럽게 하여, 주님의 은혜가 마음 깊이 스며들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것입니다. 몸은 마르고 늙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어린 아이의 새살처럼 통통하고 보드랍게 가꾸고 지켜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른 사람에게 가운데 일어서라말씀하셨습니다. 나아가 그에게 손을 내밀라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 서서 그의 마른 손을 앞으로 내민다는 것은 아마도 사람이 전에 번도 본적이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뒷자리에 앉았으며, 그의 손은 보이지 않게 등뒤로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앞에 서게 하시고, 그의 마른 손을 앞으로 내밀라고 하십니다. 마른 사람에게는 참으로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이 아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른 손을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치료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위해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사람의 마른 같이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사람을 짓누르고, 두렵게 하며, 긴장시킵니다. 작은 일이나 사소한 마디에도 쉽게 오해하고, 마음에 상처를 받으며, 화를 냅니다. 사람들과 벽을 쌓고 고립되어 홀로 어두운 생각에 사로잡혀 고통을 당합니다. 이런 고통의 중심에는 감추어진,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마른 있습니다. 뒷자리에 앉아서 뒤로 그것을 감추고 있는 , 마른 평생 사람의 영혼을 옥죄며 숨통을 막고 인생 자체를 마르게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죽일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가운데 일어서라하시고, “ 손을 내밀라하셨습니다. 참으로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어둠 속에 숨어서 영혼의 피를 빨아먹고 있는 마른 문제를 이제 예수님의 앞에 드러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가 내밀매 손이 회복되었더라말씀합니다. 마른 사람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손을 예수님 앞에 내밀자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바리새인들과는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바리새인들은 마귀적이어서 몰래 엿보고, 송사하고, 죽이는 일을 도모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른 사람의 감추어진 마른 드러내시고 그것을 치료하셨습니다. 불쌍한 영혼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감추인 것들을 빛에 드러내시고, 치료하시고, 용서하시고, 회복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가리켜 요한복음 1:14절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하며, 17절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것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깊은 속을 아십니다. 속에 숨겨져 있는 마른 문제를 아십니다. 나를 부끄럽게 하고, 두렵게 하고,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해 높은 벽을 쌓게 하는 아주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와 그것을 내밀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의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사슬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우리는 오늘 말씀과 비슷한 이야기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를 만났습니다. 여자는 전에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은 다른 남자와 살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은 여자의 과거를 문제 삼아 그녀와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여자 또한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며,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시간에 혼자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목마름 불쌍히 여기시고 그녀에게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남편을 불러오라하셨습니다. 그녀에게남편 문제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람의 마른 문제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처음 보는 유대인 남자가 혹시 자신의 숨겨진 과거를 알까 두려워 몹시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갑자기 남편을 불러오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하며 황급히 자신의 속사정을 덮어 감추려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녀의 속사정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남편이 아니니 말이 참되도다” (요한복음 4:17).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과거를 드러내심과 동시에 그녀가 아파하지 않도록 그녀에게 말이 옳도다,” “ 말이 참되도다하시며 다독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그녀의 깊은 속에 고여있는 썩은 고름을 짜내고, 상처를 소독하고, 깨끗한 거즈로 예쁘게 싸맨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참았어요! 잘했어요!” 하시며 칭찬까지 해주십니다. 여자는 난생 처음으로 아주 신기한 느낌을 맛보았습니다. 그녀의 깊은 속에 숨어서 그녀의 영혼을 찌르며 고통스럽게 하던 남편 문제 오간데 없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 홀가분하고, 편하고, 자유로웠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고, 이해하시고, 용서하시고, 심지어 칭찬하시고 높여주시는 예수님 앞에서 이제 이상 감출 것도, 부끄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4:29). 그녀에게 나의 행한 모든 그동안 그녀를 어둠 속에 가두고 짓누르던 무거운 사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마치 그것이 남의 새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자유롭고 공공연하게 사람들 앞에 일을 떠벌리면서 이를 통해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마도 전혀 사람이 여자를 보고 여자가 드디어 미쳤구나!”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미친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온전하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5절에 그가 내밀매 손이 회복되었더라합니다. 어떤 성경 사본은 다른 손과 같이 (as the other)”라는 말이 추가되어 있으며, KJV같이 유력한 영어 성경은 그의 손이 다른 손과 같이 온전하게 회복되었다(his hand was restored whole as the other)”라고 부분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이스라엘을 마른 이라고 언급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은 하나님께 온전한 되십니다. 성경은 자주 하나님의 도우심을 가리켜 강한 손과 (mighty hand and stretched arm)” 표현합니다 (신명기 4:34, 5:15 ). 신명기 5:15 말씀입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어살았습니다. 매일 고역으로 인한 탄식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안식일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팔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온전하게 하실 그들이 참된 안식을 누릴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깊은 속에 나를 두렵게 하고 부끄럽게 하는 죄의 짐을 지고 있을 , 우리는 참된 안식을 누릴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강한 손과 되십니다. 앞에 나아가는 자를 구원해 주시고 참된 자유와 안식을 누리게 하십니다. 나아가 우리를 예수님을 닮은건강하고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으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손을 내밀라하십니다. 이는 정말 생명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매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모든 부끄러운 죄의 짐을 들고 되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절대로 우리를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치료하시고 칭찬하십니다. 우리를 주님과 같이 온전한 사람으로 빚어가십니다. 우리에게 이런 예수님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감사드리고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