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주만 하나님이시니이다
시편 86:1-17
오늘 우리는 시편에 있는 다윗의 기도들 중 하나를 함께 공부하고자 합니다. 이 시편은 다윗의 간절한 간구로 시작됩니다: “여호와여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오니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구약 개론이라는 과목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강의 첫 시간에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구약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해보라고 했습니다.이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사무엘서(사무엘상/하)였습니다. 사무엘서는 그 전체로 다윗 왕의 전기(biography)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전기이기도 합니다. 이는 다윗의 삶에 하나님께서 깊이 스며들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애의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낮은 비천함에서 가장 높은 영광에 이르기까지, 가장 추한 죄에서 가장 눈부신 아름다운 순간까지, 다윗의 모든 시간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얼굴을 생생하게 비추는 맑은 거울과 같습니다. 다윗을 읽음으로써 저는 하나님을 읽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사무엘서를 좋아하는 이유였습니다.
시편 86편에 기록된 다윗의 하나님께 대한 기도를 읽으면서, 저는 다윗을 거울보다는 거푸집(mould)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오니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그는 마치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빈 그릇처럼 외칩니다. 곤고하고 궁핍한 영혼으로 그는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도우심과 위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는 가장 명료한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충만하시고, 나는 비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께서 나를 그의 생명으로, 그의 기쁨으로, 그리고 그의 영광으로 채우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이야기이며, 또한 재창조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땅이 창조되기 전 상태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됩니다. 창세기 1:2절 말씀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시기 전에, 땅은 어둡고, 공허하며, 질서가 없이 혼돈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땅에 역사하시고, 그것을 빛과 생명으로 채우셨습니다. 하늘과 바다와 육지의 모든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가득 채우셨습니다. 이것은 재창조의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빌립보서 2:7a).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기뻐하시고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골로새서 1:19). 예수님의 비우심과 하나님의 채우심으로 인해, 예수님 자신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골로새서 1:15).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우리를 채우시기 위해서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비우시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마가복음 2:18-20).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신랑, 곧 그들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빼앗기는 날에 금식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금식의 목적에 대해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금식이란 다른 무엇으로 채우기 위해 자신을 일부러 비우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을 비우기 위해 일부러 금식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떠나보냈을 때, 그들은 이미 깨끗하게 비워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때, 제자들은 주님과 하나가 되는 참으로 놀라운 기쁨을 누렸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천국의 생명과 희락과 영광을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시고, 그들의 가슴 한 가운데 메울 수 없이 거대한 구멍을 남겨놓았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비워지고, 이제 채우심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하심이 반드시 “끼니를 거른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제가 믿기에 제자들에게 금식이란 예수님을 떠나보낸 제자들의 빈 마음이며,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시는 것으로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손으로 친히 준비하신 바 그들의 이 빈 마음과 하늘을 향한 간절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채우시며 그들 속에 예수님을 똑 닮은 하나님의 형상을 빚으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다윗의 기도로 돌아가서 그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저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 들고 나아간 세 가지 기도 제목에 대해 얘기하고자 합니다. 다윗은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주의 종을 구원하소서” 기도합니다 (2절). 그는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기도합니다 (4절). 그는 또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기도합니다 (11절).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기쁨을 위해, 그리고 그의 삶의 길과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기도제목들을 통해 우리는 다윗이 얼마나 근본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고민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끌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정말 감당할 수 없이 무거운 문제였습니다. 다윗의 기도를 거꾸로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의 삶이 하나님 없이 얼마나 비참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생명도, 빛도, 기쁨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공허하고 어두우며, 그래서 그만큼 비참한 것입니다. Nancy Guthrie라는 저자가 그녀의 책 “God Does His Best Work with Empty (하나님은 빈 마음에 최선의 일을 하신다)”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It’s amazing how heavy the weight of emptiness can feel, how much room it can take up in our souls, how much pain can be caused by something that isn’t even there.” (공허한 마음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그것이 우리의 영혼 속에 얼마나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지, 그리고 있지도 않은 무엇인가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초래하는지를 생각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다윗은 곤고하고 궁핍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안에는 깊고 어둡고 우울한 빈 공간, 온 우주라도 담을 만한 공허함 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이 이 공허함을 채우실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채워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윗의 기도를 기초로, 저는 우리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세 가지 요소들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쁨, 그리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맡기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구원하시며 보호하시기를 믿었습니다. 다윗은 심지어 어린 소년일때조차 용사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양떼를 지키며 사자나 곰 같은 들의 사나운 짐승들로부터 양들을 지켰습니다 (사무엘상 17:34-35). 하지만 그는 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사울 왕의 신하들 중 하나가 다윗에 대해 왕에게 이렇게 말하며 추천합니다: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악기를) 탈 줄을 알고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사무엘상 16:18). 다윗은 용감한 용사였으며,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저는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유명하게 되었는지 잘 모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나는 주님께 경건하다”고 하며, “내가 주를 의지한다”고 하며,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는다”고 합니다. 이 말들은 다윗이 얼마나 간절하고 끊임이 없이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에 맡겼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의 헌신만큼 신실하게 하나님께서 다윗의 생명을 지키시는데 자신을 헌신하셨습니다. 다윗이 들짐승로부터 그의 양들을 지킨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모든 위험들로부터 다윗의 생명을 지키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밤낮 주무시지도 않고 다윗을 지키시는 그의 경호원이셨습니다. 이것을 믿고, 다윗은 그의 생명을 위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을 의지하는 대신 항상 하나님께 나아왔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기 위해서, 그는 세상에서 피난처 찾기를 거절했습니다. 다윗의 삶은 우리에게 사도 바울의 간증을 생각나게 합니다: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0-31). 여기서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함은 매일 자살을 시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살기 위해서 세상과 연결된 모든 생명줄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 생명을 힘입어 다윗과 같이 용맹한 용사가 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그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누구이든 또는 무엇이든, 내가 나의 생명을 위해 의존하는 것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어떤 다른 신도 그의 앞에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명에 관하여, 다윗은 신실하게 고백했습니다. “오직 주만 하나님이시이다.”
다윗은 또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우러러 볼 때,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십니다. 그리고 그의 인자하신 얼굴이 우리의 영혼을 만족하게 합니다. 우리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감추어진 죄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얼굴 보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참된 기쁨과 만족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오면, 우리는 부끄러움을 잊고 고통스러운 공허함을 떨치기 위해서 술이나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것들을 마십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의 가장 추악한 죄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들어올리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는 선하사 용서하시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다윗은 스스로 용서받을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순간에도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했습니다. 죄인의 유일한 기쁨은 하나님의 용서하심입니다. 우리 영혼의 평안과 기쁨을 위해 다른 길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부끄러움과 고통으로 심하게 얼룩져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영혼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고, 그의 풍성한 긍휼과 용서하심을 기다릴 뿐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이야말로 당신이 우리의 기쁨이 되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추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아버지가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듯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대문 밖에 나와 먼 곳을 바라보며, 아들이 마음을 돌이켜 집으로 돌아오기를 애태우며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미 아들을 환영하시기 위해 가장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기쁨이 되십니다. 시편 37:4절에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때 우리가 비로소 기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 최고의 기쁨이 되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기뻐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보좌에 좌정하시며, 밤낮으로 영원토록 넘쳐흐르는 신기한 기쁨으로 우리 영혼을 채우십니다. 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쁨으로 사는 다윗이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오직 주만 하나님이시니이다.”
다윗이 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이다.” 하나님을 자신의 최고의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다윗은 또한 하나님의 길을 배우며 그 진리를 따름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길을 본받음으로써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 삶의 의미이며 목적입니다. 다윗은 단순히 “길,” “진리”라고 하지 않고, “주의 길,” “주의 진리”라고 합니다. 그는 무엇이 옳고 그르며,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판단함에 있어서, 자신의 판단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였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매우 부당하게 보일 때에도 그랬습니다. 사울 왕은 시기심에 사로잡혀 다윗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불의한 사울 왕에게 복수를 하고 그의 정치적 라이벌을 제거할 좋은 기회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왕을 경외함으로써 하나님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다윗을 죽음 직전까지 낮추시고, 때로는 그를 크게 높이셨습니다. 이런 격심한 혼돈 속에서 다윗은 항상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를 여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다윗을 기뻐하셨습니다. 이 다윗에 대하여, 선지자 사무엘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무엘상 13:14). 다윗은 참으로 하나님의 기쁨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따라서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진심으로 소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 때도 기쁘지만, 또한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때 마음에 기쁨을 느낍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라디아서 1:10). 바울은 이 둘을 동시에 할 수 없으며, 이것이든 저것이든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 또한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가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리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가 일심으로 경외하며 전심으로 찬송 드릴 분이십니다. 그와 같은 순종과 예배로, 다윗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순종과 예배로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오직 주만 하나님이시니이다.”
다윗에게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신에 관한 것이나 하나님께 관한 것이 아니고 바로 그의 원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교만하며 다윗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강포하게 행하며 다윗의 생명을 노렸습니다. 이들을 가리켜 다윗은 “자기 앞에 하나님을 두지 않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고 찬양할 때, 그는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무시하며 교만하고 강포한 자들의 눈에 띄는 공격의 표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들과 씨름하는 대신 여전히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주여 내게로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하나님을 무시하며 교만하고 강포한 원수들과 비교할 때,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온유합니다. 심지어 그는 복수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미워하는 원수들이 부끄러워하도록, 하나님께 “은총의 표징”을 보여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가 세상에서 갖는 모든 문제의 최종 해결책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세상의 영광을 좇아 그들과 경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겸손한 자리를 충성스럽게 지킵니다. 그가 기도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의 징표를 보이셔서 그로 하여금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한 그리고 세상의 대적들을 이기는 참된 해결책이며 참된 승리입니다. “표징”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기적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원수들의 입을 닫아버리는 예수님의 부활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징표를 가지고 우리는 세상을 잠잠하게 하며 우리 영혼에 평안과 안식을 줄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아버지의 막내 아들이었으며, 그의 직업은 들에서 아버지의 양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궁핍하고 초라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심으로, 전심으로 하나님의 채우심을 구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다른 어떤 것이 그의 빈 마음을 차지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의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자리잡았습니다. 참으로 그의 삶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이루신 기적 같은 표징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으로, 다윗은 그의 빈 마음에 하나님의 형상을 빚어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생명과 기쁨과 영광을 담도록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빈 그릇입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그릇을 어떻게 채우셨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기까지 매일 예수님의 피로 우리 영혼을 씻으며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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