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마가복음 2:23-28)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1. 11. 15. 02:12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마가복음 2:23-28

 

오늘 말씀은 안식일 규례를 두고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생긴 갈등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전에 설명한 바와 같이, 마가복음 2장은 ,” “죄인,” 그리고 율법 어떻게 보고 그것들을 어떻게 대하고 다루는지에 관하여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충돌을 보여줍니다. 이것들을 살펴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어떤 차이들이 있는지를 관찰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이해할 있습니다. “ 관하여,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7)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10) 하십니다. 죄인 관하여, 바리새인들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6)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17)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율법 관하여,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4) 따지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하십니다. 오늘은 율법의 규례 사이에 두고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사건의 배경이 되는 가지 사실들에 대해서 짧게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이삭을 잘랐습니다. 아마도 이삭이 여물어 추수를 앞두고 있었던 같습니다.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가 고픈 나머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낱알을 입에 털어 넣었던 모양입니다. 밀밭은 필시 다른 사람의 소유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규례들 중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 마음대로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가하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 것이요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 그러나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 말지니라” (신명기 23:24-25).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이나 밀밭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맛볼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여름 수고한 농부의 수확에 손해가 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지혜로우십니다. 사람들을 위하시며 돌보시는 아버지의 따스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의 규례에 따르면,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가다가 이삭을 자른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삼은 것은, 제자들이 이삭을 자름으로써 안식일에 일을 했다 것입니다. 안식일에 관한 법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10계명중 4계명으로 출애굽기 20:8-11절에 걸쳐 길게 나와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 너나 아들이나 딸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육축이나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목적은 세상에서 고생하고 수고하는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입니다. 심지어 종이나 육축이라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예를 들어 제자들을 변호하십니다. “다윗이 자기와 함께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이것은 사무엘상 21장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다윗이 그를 시기하여 죽이려는 사울 왕에게 쫓기어이라는 곳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납니다 (아히멜렉은 아비아달 대제사장의 아버지입니다). 다윗은 몹시 배가 고팠던 자신과 자신과 함께한 자들을 위해 급히 먹을 것을 청합니다. 이에 제사장 아히멜렉은 그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제단 위에 드려졌다가 물려낸 진설병을 줍니다. 레위기 24장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시기를, “너는 고운 가루를 취하여 둘을 굽되” (5a) 하시고, 항상 안식일에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지니” (8a) 하시고, 떡은 아론과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 (9)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진설병을 제사장 아히멜렉은 몹시 배가 고픈 다윗과 일행을 긍휼히 여겨 그들에게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정죄에 대한 예수님의 변론에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27-28 말씀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말씀에서 예수님은 사람 안식일 규정보다 앞에 놓으십니다.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목적이 아니며, “사람을 위하는 목적입니다. 안식일 규정은 사람을 위하기 위한 수단 불과합니다. 안식일이라도 사람이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며, 병이 나면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안식일 규정 때문에 배가 고파도, 몸이 아파도 참아야 한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 예수님 자신을 안식일 규정 위에 두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안식일에도 주인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주인이란 영어로 번역하면, “Lord,” “Master,” “Owner,” “Disposer,” “Controller” 등의 뜻을 갖습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일에도 예수님은 사람들의 주님이 되십니다. 안식일 규정이란 다만 주님이시며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의 사람들을 쉬게 하시며 기쁘게 하시는 일에 사용되는 도구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도구 마치 주인이며 지배자인 것처럼 권세를 휘두르며 사람들을 정죄하며 짓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George Orwell (1903-1950)이라는 영국의 작가가 있습니다. <동물농장>, <1984> 등의 유명한 소설들을 남겼으며, 언론인, 문학 평론가 등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그가 1946년에 <Politics and the English Language>라는 짧은 에세이가 있습니다. 아마도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번쯤 읽어봤을 법한 유명한 에세이입니다. 그가 에세이를 이유는 자신의 언어인 영어 매우 나쁜 방향으로 퇴락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경향을 되돌릴 방안들을 제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지적한 당시 (지금도 마찬가지이

지만) 영어 사용의 문제점은 크게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미지의 진부함(staleness of imagery)”이며 다른 하나는 정확성의 결핍(lack of precision)”입니다. 그리고 이런

제들이 생겼는지에 대한 이유로 그는 쓰는 사람들의 게으름, 무관심, 또는 무지를

합니다. 작가가 글을 그에게는 글로 표현하고 싶은 어떤 생각이 있습니다. 그는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거기에 맞는 단어들을 찾아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작가들이 그런 수고를 하지 않고 기존에 있는 상투적인 어구들 사용하여

대충 글을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레고 (LEGO) 블록들을 이용하여 어떤 형태를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표정을 레고 블록들을 이용하여 표현한다면, 그냥 있는 블록들을 연결하고 쌓으면 되니 쉬울 수는 있지만,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수만 가지의 서로 다른 표정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쁜 표정,” “화난 표정,” “슬픈 표정 정형화된 서너 가지 이미지로 단순화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또 예를 들어 제가

속에 생각하고 느끼는 가을의 이미지 표현하고 싶습니다. 지금 제가 갖고 있는 가을이라는 계절에 대한 생각과 느낌은 자신의 나이, 관심사, 과거의 경험, 현재의 상황 등을 반영함으로,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것과는 사뭇 다른 독특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생각과 느낌을 살릴 있는 단어들을 선택하여 정확하고 창의적인 글로 그것을 표현해야 것입니다. 만일 제가 그것을 귀찮아하고 그냥 가을은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천고마비의 계절입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생각과 느낌을 정확하게 표현한 글이 전혀 아닙니다. 그냥 흔해빠진 상투적인 문구들 모아서 짜집기를 것에 불과합니다. 말을 통해서는 제가 가을이라는 계절에 대해 어떤 생각과 느낌을 갖고 있는지를 다른 사람들이 전혀 수가 없습니다. 만일 글을 쓰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런 식이라면, 언어는 생각과 느낌을 전달하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퇴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George Orwell 지적하는 당시 영어의 문제점이며, 생각에 문제는 고쳐지기보다는 오히려 악화되고 있는 같습니다.

 

저도 제가 전하는 설교를 먼저 글로 쓰는지라 자신을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설교 쓰기를 시작한 것은 오래 전으로, 때는 예수님을 믿은 얼마 아주 젊은 나이였습니다. 제게 성경을 가르쳐 주신 선배가 있었는데, 그분은 제가 성경 말씀을 기초로 설교를 쓰고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설교에 대해서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는 당신의 설교는 성경 말씀을 올바로 전하고 있습니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당신의 설교는 당신의 생각을 올바로 전하고 있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모두 “Yes”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기억에 질문에 대해 자신있게 “Yes”라고 대답한 적은 별로 없었던 같습니다. 당시 이제 예수님을 믿게 제가 설교를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아무리 뚫어지게 보고 있어도 특별히 사람들에게 설교로 전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제가 있는 일이란 다른 훌륭한목사님들이 써놓은 설교들을 읽어보거나 신학자들이 책들을 뒤적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말들이 있으면 옳다구나 싶어서 설교에 사용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설교를 쓰면 결국 제가 설교는 다른 사람들의 말들과 생각들을 모아서 짜집기를 해놓은 괴상한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저에게 당신의 설교는 성경 말씀을 올바로 전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설교는 당신의 생각을 올바로 전하고 있습니까?” 질문은 정말 뼈를 때리는 아픈 질문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선배는 설교가 하나님의 생각 나의 생각 만나는 접점(contact point)” 되기를 원했던 같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생각으로 전해지고, 그리고 생각이 설교로 쓰여져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설교란 하나님의 생각을 담은 생각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도구라고 있습니다. 일을 제대로 하려면 먼저 성경 말씀으로부터 펄펄 살아있는 하나님의 생각 생생하고 정확하게 생각으로 담아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 다음 다시 생각을 생생하고 정확하게 드러내는 단어들을 선택하여 글로 표현하는 과정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생각을 올바로 전하는그리고 나의 생각을 올바로 전하는설교를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과정은 결코 쉽지 않으며, 입에서 내가 나도록 기도하고 고민하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만일 과정을 생략하고 쉽게설교를 쓰고자 한다면, George Orwell 영어의 퇴락에 관해 지적한 똑같은 문제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에서도 반복되고, 이로 인해 기독교 신앙 또한 퇴락의 위험에 놓이게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설교란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만나는 접점(contact point)”이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사는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만날 있는 그런 접점들을 여럿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안식일이며, 하나는 성전입니다. 안식일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며, 성전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성경에서는 안식일을 가리켜 거룩한 이라고 하며 (출애굽기 20:11), 성전을 가리켜 거룩한 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28:43). 이것들이 거룩한 날이며, 거룩한 곳이 될까요? 이는 다름이 아니라 시간에 곳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드리며, 즐거워하며, 안식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과 성전은 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시며 축복하시기 위해서 만드신 도구들입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관해 강조하신 것들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로,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 머리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것인지를 정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생각의 핵심은 바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George Orwell 영어의 사용에 관해 지적한 것은 이라는 도구가 작가의 생각 정확하고 참신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선배가 제가 설교에 대해 묻는 질문 또한 제가 설교라는 도구가 하나님의 생각 정확하고 참신하게 전달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 대해 염려하시는 것은 그들이 집행하고 있는 안식일 규례들이라는 도구가 하나님의 정확하고 참신하게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갈등이 끊이지가 않았습니다.

 

골로새서 2:16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여기서 폄론한다 말은 판단한다,” “정죄한다 말입니다. 더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것을 의지하여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골로새서 2:17-19). 말씀에서 머리 예수님을 가리키며, “ 교회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을 가리킵니다. 몸의 지체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서로 연합하고, 성장할 있는 유일한 비결은 그것들이 머리에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안식일 같은 뜻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안식일에 모든 일을 중단하고 쉬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사람들이 그들의 머리 되신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공급받으며, 하나님의 사람들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규례를 집행함에 있어서 머리 되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위하여안식일을 집행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머리 되신 하나님도 떼어내고, 몸이 되는 사람들도 떼어냈습니다. “안식일 남겨놓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얼마나 중요한지를 과장하여 설명하며, 온갖 자잘하고 복잡하고 숨막히는 규정

들을 계속해서 덧붙여 나갔습니다. 물건을 들어서도 안되고, 불을 지피거나 꺼서도 안되고, 베틀에 실을 걸거나 빼서도 안됩니다. 이삭이나 꽃이나 열매나 잎을 따서도 안됩니다. 글자를 이상 쓰거나 지워서도 안됩니다. 외에도 아주 많습니다. 규정대로라면 안식일에 사람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없이 송장처럼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마치 호박 속에 갇혀 화석이 곤충과 같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롭게 쉬기는 커녕 안식일은 이제 숨이 막히도록 무섭고 답답한 억눌림의 시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 제거되고, 바리새인들의 악하고 게으른 욕심이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George Orwell 따르면,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참신하고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진부하고 부정확한 문구들을 사용함으로써 언어가 퇴락하는데, 이렇게 퇴락한 언어는 다시 사람들의 생각 나쁜 영향을 미쳐서 그들이 정확하고 참신한 생각을 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합니다. “안식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나 거룩하게 지킨다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안식일 규례들 통해서 이해합니다. 이런 규례들을 통해서 보는 거룩하신 하나님 엄격하시며 잘못을 철저히 징계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거룩하게 지킨다 것은 무서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며 무거운 짐을 지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퇴락한 언어가 사람들의 생각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퇴락한 안식일 규정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아주 나쁜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거룩하다 말은 쉽게 말하면 좋다,” “훌륭하다 말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떤 사람에 대해 사람 훌륭한 사람이야!”라고 소개할 있습니다. 훌륭하다는 말은 여러가지로 이해할 있습니다. 마음이 너그럽거나, 지혜와 지식이 뛰어나거나, 어떤 분야에 탁월한 능력이 있거나, 업적을 세웠거나 등등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하나님의 모든 좋으신 성품들을 모아서 한마디로 요약한 말이라고 있습니다. 이에 혹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Holiness) 가리켜 성품들의 성품(Attribute of attributes)”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핵심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아니라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사랑입니다. 물론 이런 설명들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해하기란 난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배우고 거룩하심에 참예하도록 (히브리서 12:10) 우리에게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거룩한 되시는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자체가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셨기 때문입니다. George Orwell 말을 빌자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각이 있는 그대로 정확하고 참신하게 말씀으로, 그리고 삶으로 우리에게 표현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하셨듯이, 우리가 하는 모든 신앙 행위들 또한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 있는 그대로 정확하고 참신하게 표현하는 말이며 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 의식 없이 그냥 전통으로 내려오는 습관들, 다른 교회나 교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것들, 세상에 좋아 보이는 것들을 모아서 짜집기한 신앙생활을 있습니다. 머리 속의 생각과 상관 없이 고장 라디오처럼 기도문과 신조들을 읊조리고 찬송가를 부르는 예배를 드릴 있습니다. 머리 되신 예수님을 붙드는 대신 이런 도구들 마음을 쓰고, 그것들을 과장하며, 모양만 경건한 신앙생활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머리 되신 주님 안에 거하는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있습니다. 유대인의 안식일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각에 다다를 있습니다. 머리 되신 예수님을 붙듦으로써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신 사랑에 접붙임을 받고, 거기에 우리 인생의 뿌리를 내릴 있습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 그리하셨듯이, 우리가 하는 모든 신앙 행위들은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 정확하고 참신하게 표현하는 말이며 일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는 모든 신앙 행위들은 이웃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살아있는 신앙이 회복될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