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마가복음 2:18-20
오늘은 금식에 관하여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금식” 자체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그렇게 흥미로운 주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 금식은 경건한 신앙인들에게는 필수적인 종교 행위들 중 하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18절) 라고 말씀합니다. 이 두 그룹은 당시에 유대인 사회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매 주 일정한 때를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금식을 했던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8절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이 비유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자신의 경건한 신앙 생활을 이렇게 자랑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누가복음 18:12). 실제로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 금식을 했다고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 또한 그들의 스승인 세례 요한의 금욕적인 광야 생활(마가복음 1:6)을 본받아 자주 금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더구나 마가복음 1:14절에 보면 “요한이 잡힌 후”라는 말이 나옵니다. 헤롯 왕이 자신의 동생인 빌립의 아내를 빼앗아 취한 것에 대해 세례 요한이 “옳지 않다”고 책망하자 이에 앙심을 품은 왕이 요한을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마태복음 14:1-4). 그런데 이런 암울한 시대에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만찬을 즐기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 2:15). 요한의 제자들에게나 바리새인들에게나 예수님의 이런 모습이 합당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작정하고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이들의 의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9절).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혼인집 손님들”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혼인집 손님”을 문자적으로 원문과 가장 가깝게 번역한 영어 번역은 “children of the bridechamber”(KJV)인데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신부 방의 젊은이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유대인의 혼인 풍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정혼을 하게 되면 두 사람은 법적으로 부부가 되지만, 처음 일년 동안은 동거하지 않고 각자 자신의 부모님 집에 살면서 혼인 예식을 준비합니다. 일년의 정혼 기간이 차면, 신랑은 친구들과 함께 신부 집으로 와서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인도하여 갑니다. 이 때 신부를 신랑 집으로 인도하여 가는 사람들은 신랑과 함께 간 그의 친구들입니다. 이들을 “children of the bridechamber”라고 부릅니다. 오늘 말씀에 “혼인집 손님”이라고 언급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은 신부를 신랑 집을 인도하여 가는 것과 더불어, 7일 동안 계속되는 혼인 잔치 자리에서 그 “혼인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다른 모든 일들을 제쳐두고 오직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를 즐기는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 이들에게는 심지어 유대 사회에서 매우 엄격하게 지켜지는 안식일 규례들이나 다른 종교적 의무들조차 면제되었다고 합니다. 이 혼인집 손님들이 온 몸과 마음을 바쳐 해야 할 단 한 가지 의무는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를 기뻐하며 즐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지금 “신랑”이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혼인집 손님들이며, 따라서 금식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이 금식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이를 것이며, 그 때에 그들이 금식할 것이라 하십니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십자가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며 또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십니다. 이에 땅에 남은 제자들은 신랑 되신 예수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가운데 금식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이 그들이 금식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금식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다릅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예수님께 대한 그리움 때문에 금식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금식을 할까요? 금식을 하는 종교적 이유들 중 하나는 “금욕을 통해서 육체의 정욕을 다스리기 위한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이것을 억제함으로써 보다 고상한 것들에 마음을 집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요한의 제자들은 이런 이유로 금식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골로새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골로새서 2:16). “폄론한다”는 말은 “판단한다” 또는 “정죄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부연합니다.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2:23). 사도 바울에 따르면, “금식”과 같이 먹고 마시는 것들을 정한 규례들은 “육체를 좇는 것” 곧 “육체의 정욕”을 억제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단지 몸을 괴롭게 함으로써 경건하고 겸손한 모양을 연출하는 사람의 지혜에 불과합니다. 대신에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머리 되신 예수님”께 붙어 있으라고 강권합니다. 이는 예수님 안에 신성(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의 모든 충만이 거하시며, 오직 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도 하나님으로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 금식이 육체의 정욕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무익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무슬림 사람들은 “라마단”이라고 하는 절기를 지키는데 이 기간 동안에는 음식이나 흡연이 금지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단지 해가 진 후부터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만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과식과 폭식을 하며, 이로 인해 식량 소비가 평소보다 훨씬 많아지고, 과식으로 인해 병원을 찾는 환자들의 수도 늘어난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금식 기간”이 아니라 “축제 기간”인 것입니다. 기독교 전통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요즘 “카니발 (carnival)”이라는 말은 보통 “축제”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본래 카니발은 교회 절기 중 하나로 “금욕적인 생활”을 통해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카니발이라는 말 자체가 “고기를 멀리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한글로는 “사육제(謝肉祭)”라고 번역되는데, 이는 “고기 먹기를 삼가는 기간”이라고 풀어서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카니발”의 의미는 이런 본래의 취지와는 정반대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금욕은 커녕 오히려 사람들의 정욕이 가장 노골적으로 발산되는 쾌락적이고 퇴폐적인 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과연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이런 것들은 ……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전혀 없습니다.”
더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또 금식 자체를 “의로운 행위”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앞에 인용한 예수님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규칙적인 금식 행위를 자신의 “의(righteousness)”로 여기며 이를 하나님 앞에, 그리고 세리에게 뽐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7:16-18).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당시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할 때, 슬프고 흉한 얼굴을 하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지금 금식을 하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보이며 사람들의 칭찬을 구했던 것 같습니다. 본래 금식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행위”입니다. 요엘 2:12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이런 본래의 의미를 생각하면, 금식을 자랑하며 그것을 “자기 의(self-righteousness)”로 삼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바리새인들의 행동은 금식하는 사람으로서 합당한 태도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금식”은 한편으로는 육체의 정욕을 억제하고 다스리기 위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더 높은 경지의 의로움에 이르기 위한 종교 행위로서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금식 행위는 그 자체로서 그 당시 사람들의 신앙 생활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금식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경건한 신앙인들과 세속적인 일반인들을 구분 짓는 시금석 같은 것이었습니다. 과연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하고 물을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이들의 생각을 깨뜨리십니다. 예수님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금식을 안해도 된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금식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혼인집 손님들의 유일한 의무는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며,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이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금식을 한답시고 얼굴을 흉하게 하고 잔치 자리에 앉아 있다면, 그는 혼인 잔치의 기쁨을 망치는 자이며, 신랑은 그를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혼인 잔치에서는 어떤 슬픔이나 걱정의 기색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아니 깊은 마음속에서조차 그런 그늘들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혼인 잔치의 기쁨이 바닷물처럼 이 모든 것들을 다 덮어버리고 오직 기쁨과 즐거움만 차고 흘러 넘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기쁨은 “극한의 기쁨”이며, “궁극적인 기쁨”이며, “천국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의 함께 하심이 우리에게 그런 기쁨이 되실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죄사함”을 베푸시며, 우리에게 “완전한 의로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사람들이 금식을 하는 것도 양면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정욕 곧 “죄”를 억제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경건함 곧 “의”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금식을 통해 죄로부터 벗어나며 의로움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금식은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으며, 사람을 의롭게 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오히려 금식을 통해 이런 것들을 얻고자 하면,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외식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겉만 번지르르할 뿐, 속은 죄의 정욕으로 가득하며, 연약하며, 번민하며, 끊임없이 사단 마귀의 까불림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안에 “기쁨”이라고는 정말 약에 쓸래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신랑이 그 신부를 맞이하는 것과 같습니다. 에베소서 5:25-27절에서 사도 바울은 남편들이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그의 신부가 되는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 우리는 다만 가난하고, 외롭고, 정결하지 못한 처녀에 불과합니다. 금식을 한다고 해서 이런 처지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새벽 기도나 십일조나 교회 절기들을 빠짐 없이 잘 지킨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죄의 짐은 더욱 무거워지고, 마음의 괴로움은 더욱 심해져 갈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신부로 맞으사,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통째로 주십니다. 우리를 물로 씻으시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십니다. 주님 앞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세우십니다. 아무 흠도 티도 없는 정결하고 아름다운 신부로 단장하십니다. 세상에 이런 복이 있을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과의 연합으로 우리는 어떤 다른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극한의 기쁨,” “궁극의 기쁨,”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를 것이며, 그 날에 주님의 제자들이 금식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이나 요한의 제자들이 말하는 “금식”과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비록 잠시 동안이지만 “신랑과 함께 하는 기쁨”을 빼앗겼습니다. 이들은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이 지극한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떠나시면서, 이 기쁨 또한 소망의 약속으로만 그들의 마음 속에 남게 되었습니다. 기쁨이 컸던 만큼, 그들의 마음 속에 남겨진 빈 자리 또한 다른 무엇으로는 절대로 채울 수 없이 깊고 크고 공허했습니다. 아무리 즐거운 일이 있어도 즐겁지가 않고,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맛있지가 않고, 아무런 부족함이 없어도 만족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냥 빼앗긴 신랑을 그리워하며, 그 신랑을 다시 만날 간절한 소망 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빈 마음을 이 신랑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허리에 띠를 띠고 깨어서 주님을 다시 만날 그 날을 기다렸습니다. 어떤 다른 세상의 즐거움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신랑을 다시 만나며 성대한 혼인 잔치에 참여할 그 소망으로만 그 마음을 채웠습니다. 현재로서는 이것이 그들의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금식”입니다. 신랑을 빼앗긴 자가 세상의 즐거움을 모두 잊어버리고 오직 신랑에 대한 그리움으로 간절하게 그 신랑을 다시 만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 생활의 본질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 같이 하나님을 찾는” (시편 42:1)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갈망입니다. 또 우리의 신앙은 신랑 되신 예수님을 향한 신부의 그리움과 기다림입니다. 우리가 금식하는 것은 이 주님을 향한 간절함이 너무 크고 강해서 입맛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 간절함이 채워지지 않고서는 먹고 마시는 즐거움이 참된 기쁨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참된 행복은 오직 우리의 머리 되시며, 우리의 신랑이 되시는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거룩함도, 우리의 지혜도, 우리의 능력도, 우리의 생명도, 우리의 평안과 기쁨도 오직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서만 완성되며 온전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님을 갈망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금식은 내 죄 문제를 해결하고 나를 의롭게 할 수 없습니다. 금식은 다만 내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나를 거룩하게 단장하신 예수님을 사모하는 내 마음의 간절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곧 금식은 주님께 대한 내 마음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 행위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 행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향한 그리움과 기다림의 표현입니다. 이 간절함으로 우리는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고, 이웃도 사랑하고, 열심히 전도도 하는 것입니다. 이 간절함이 우리의 소망이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힘입니다. 그리움과 기다림은 “아픔”이지만, 매우 기쁜 “아픔”입니다. 이는 우리의 소망이 산 소망이며 영원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간절함과 이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매일 우리 마음을 채우며, 우리 삶의 발길을 주님께로 인도하기를 기도하며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