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내 영혼이 주를 갈급하나이다 (시편 42:1-11)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1. 10. 11. 04:16

영혼이 주를 갈급하나이다

 

시편 42:1-11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목마름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시편 42편에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탄식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꼬.

 

사슴이 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시편 기자 또한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의 영혼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그의 탄식은 시적이기보다는 사실적입니다. 이는 우리가 모두 목마름의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알고 있기에, 우리는 목마름 부정적으로 생각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목마름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매우 훌륭한 지표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무엇에 목말라 하는지를 봄으로써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있습니다. “갈망이란 대신, “필요 욕구 같은 단어를 사용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갈망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보다 깊고 강한 원함을 의미합니다. 물은 우리의 생명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목마름을 통해 우리의 깊은 내면 우리 영혼의 상태를 진단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자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목마름 가운데 처하게 하시고, 우리가 무엇을 찾아 갈급해 하는지를 보십니다.

 

인간의 필요와 욕구에 관하여, “매슬로의 욕구 단계(Maslow’s Hierarchy of Needs)”라고 하는 유명한 이론이 있습니다. 그의 동기 모델(Motivation Model) 따르면, 사람은 여덟 단계의 서로 다른 필요들을 갖는데, 가장 낮은 단계인 생리적 필요들 (Physiological Needs)”로부터 가장 높은 단계인 초월 (Transcendence)” 있으며, 가장 높은 단계에서 사람은 자기를 초월하여 이웃에 관심을 갖거나, 종교적 영적인 것들을 추구합니다. 모델은 사람이 이런 여러 단계의 필요들에 의해서 동기 부여를 받는다고 하며, 먼저 낮은 단계의 필요들이 채워진 후에 비로소 높은 단계의 필요들로 관심이 옮겨진다고 주장합니다. 모델에 따르면,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한 것은 가장 낮은 차원의 생리적인 욕구이며,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찾는 것은 가장 높은 차원의 초월적 욕구입니다. 둘은 은유적으로라도 함께 없이 매우 서로 다른 것입니다. 사이에는 여섯 단계의 간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그의 하나님께 대한 갈급함이 사슴이 물을 찾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의 갈급함은 가장 기본적인 필요이며, 동시에, 가장 고상한 욕구입니다.

 

저는 다른 모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왼쪽과 같이 나타낼 있습니다. 모델은 개의 층을 갖고 있습니다. 가장 아래 층에는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나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위에는 나의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생명을 유지하는 영혼이 있습니다. 그리고 위에 살아갑니다. “ 나에 관한 모든 것들 내가 누구이며, 내가 하는 , 내가 가진 , 내가 먹고 마시는 ,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 운전 면허증, 자격증들, 은행 계정들, 나의 과거, 현재, 미래, 나의 성공과 실패들 등을 모두 포함합니다. 매슬로의 모델에서, 사람의 생명은 음식이나 주거지와 같은 생리적 필요들의 충족을 통해서 유지됩니다. 모델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욕구들에 만족을 느낄 보다 고상한 욕구를 갖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을 금식하신 후에도, “사람이 떡으로만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것이라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4). 생명의 근원에 대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떡보다 앞세우셨으며, 심지어 40일을 금식하신 후에도 질서를 지키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매슬로의 모델에는 영혼의 생명과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나의 하나님 없습니다.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도 생명도 없이 다만 있을 뿐입니다. 그의 인간관은 진화론적입니다. 그의 모델에서, 사람은 기본적으로 동물과 다름이 없는 육체일 뿐이며, 오직 육체적 필요와 욕구들이 채워질 사람은 보다 고상한 가치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실상 이것은 죽음 위에 세워진 피라미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고상한 종교적 경건함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생명도 하나님도 없는 허영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가장 영광스러운 업적도 죽을 육체의 비참함을 덮을 없습니다. 이는 그들이 처음부터 죽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절망적인 사실은 그들이 거짓 소망에 속고 있으며, 하나님 없이 거짓된 만족에 젖어 있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필요가 채워지고 나면 사람이 하나님을 찾게 될까요?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대부분의 부자들은 경건한 신앙인이 되었을 것이며, 교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찾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마태복음 19:23-24).

 

매슬로의 모델에서, 음식은 초월적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필요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바울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라고 합니다. 그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말합니다. 바울에 따르면, 가장 기본적인 일에서 가장 고상한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오직 가지 동기(motivation)”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낮거나 높은 구분이 없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가장 엄숙한 종교 의식을 거행한다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 나의 영광을 위한 것은 전혀 아닙니다. “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담는 그릇이며 영광을 드러내는 거울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제가 앞에 제시한 모델을 다음과 같이 다시 그리고 싶습니다. 사람은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장

깊은 곳에 생명의 근원되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계시며, 위에 하나님의 의지하여 살아가는 속의 영혼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속에 구체화되어 세상에 드러나는 있습니다. 타락한 사람은 안에 하나님을 갖고 있지 않으며 생명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사람은 먹고, 마시며, 입을 것과 누울 곳을 찾음으로 생명을 구합니다. 또한 타락한 사람은 자존감, 자기 실현, 자기 의를 구함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 위에 세워진 피라미드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단지 허영일 뿐입니다.

 

시편 기자의 영혼은 하나님을 찾아 목말라 있습니다. 목마른 영혼은 참으로 축복입니다. 이것이 축복인 이유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그의 영혼을 만족케 하실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태복음 5:2),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5:6). 생명은 단순히 생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생명이란 만족과 기쁨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0b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의 목적은 그의 양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이 생명을 풍성하게 갖기를 원하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생명이 어떠해야 함을 아시며, 오직 하나님만이 그런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가리켜 생존하시는 하나님(living God)”이라 부르며 (2), 또한 생명의 하나님(God of my life)”라고 부릅니다 (8). 깊은 목마름 중에도, 그는 자신의 행복을 찾아 방황하지 않습니다. 그는 간절함으로 하나님의 때를, 하나님의 위로를, 그리고 하나님의 채우심을 기다립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생명의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의 영혼의 목마름은 그의 생명과 하나님을 하나로 묶어주는 강력한 접착제와 같습니다. 그의 영혼의 목마름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복으로 채워주실 커다란 그릇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가리켜 나의 하나님”(6, 11) 그리고 반석”(9)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해 그렇게 귀하고 놀라운 인격적 친밀함을 가졌습니다. 그는 자주 많은 무리들과 함께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갔으며,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기쁨의 찬송을 드렸었습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의 짧은 간증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유명했음을 짐작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인도했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기쁘고 장엄한 예배들을 지휘했었습니다. 실로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셨으며,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아셨으며, 또한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홀로 되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둘러싸고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말하며 조롱했습니다. 우리는 비슷한 고난을 하나님의 종들의 생애에서 발견할 있습니다.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를 사랑하시며 그에게 꿈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가 장차 그의 형제들을 다스리는 자가 것이라는 꿈들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그를 시기하고, 마침내 그를 죽이기를 꾀하며 말했습니다. “그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창세기 37:20b). 욥은 하나님의 시험을 받아 모든 것을 잃고 나아가 그의 몸에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에 그의 아내는 욥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겠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기 2:9).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을 , 그들은 주님을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마태복음 27:43).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고 증명하려고 합니다. 특히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빠져있을 , 이들은 매우 의기양양해 하며,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과의 친근함을 조롱합니다. “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 이들의 조롱은 우리의 가슴을 찌르며, 말문을 막히게 합니다. 원수들이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동안, 우리는 밤낮 눈물을 흘립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 영혼아 어찌하여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우리는 시편 기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외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합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을 핍박하는 원수들에 둘러싸여, 하나님께로부터 버리심을 받은 느낌이었나봅니다. 그들은 시편 기자를 비방하며 계속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며 찔러댔습니다. 이로 인해 영혼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죽음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영혼을 위로했습니다. “ 영혼아 어찌하여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이것이 시편 기자의 믿음이며, 또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반석이시며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의 믿음은 자신이 잊혀지고 버려졌다고 느껴질 때조차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난 중에 버려두십니다. 우리를 엄몰하는 성난 파도와 물결을 보내십니다 (7). 엄몰하는 물들은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시며 우리 속에 숨겨져 있는 거짓 소망들을 드러내고 씻어내기 위함입니다. 그런 폭풍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보고 계시며, 우리를 향해 인자함을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의 생명을 붙들고 계시며, 우리 영혼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우리의 원수들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며 조롱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안에 있으며 그의 생명싸개 안에 싸여 있습니다 (사무엘상 25:29).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며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소망은 매우 특별합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소망은 하나님 자신과 같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며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망을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소망이 특별한 다른 이유는 그것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며 다른 모든 가능성들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의 소망은 다른 모든 가능성들이 실패할지라도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거기 그냥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소망은 어둠 속에 빛나는 빛과 같습니다. 빛은 매우 밝아서 심지어 죽음의 그늘까지도 몰아내 버립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과 하나님 안에서의 소망으로 인도되는 기나긴 여정입니다.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묻습니다.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여기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라는 말의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꼬?” 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가장 소원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원컨데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간청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자가 없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얼굴을 보여주시는 대신, 모세를 바위 틈에 감추시고 그의 손으로 덮으시고는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간 후에 그가 하나님의 등을 있도록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3:18-23).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하나인 빌립은 예수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청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한복음 14:8-9). 나아가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위대한 소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같이 희미하나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3:12).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여 , 우리는 이상 목말라 하지 않게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여 , 우리의 목마름이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채워지게 됩니다.

 

우리의 유일한 목마름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며, 우리의 유일한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목마름과 삶의 목적을 품을 ,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우리 영혼 속으로 끊임없이 흐릅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는 우리 영혼의 만족을 약속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광을 자랑합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찾아 목말라 , 사람들은 만족하고 행복해 보입니다. 우리 영혼이 낮아질 , 그들은 풍요롭고 높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소망의 별빛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을 따라 우리의 여정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다 높은 지능을 가진 동물로 발전하는 진화 과정에 있는 동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신 하늘 본향으로 돌아가는 중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여 , 우리의 목마름도 그칠 것입니다. 때까지, 우리의 목마름은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수하고 거룩한 목마름으로 우리의 영혼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축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