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40-45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할 말씀은 예수님께서 한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섬기신 것으로 복음서에 기록된 사람들은 대부분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 (누가복음 8:2), 간음하다 잡혀서 돌에 맞아 죽게 된 여인 (요한복음 8장), 38년동안 병상에 누워서 지내야만 했던 병자 (요한복음 5장), 장님으로 태어나서 평생 앞을 본 적이 없는 사람 (요한복음 9장), 심지어 죽어서 관 속에 누워있거나 (누가복음 7장) 무덤 속에 묻힌 사람까지 (요한복음 11장)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문둥병자 또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불행의 가장 끝자락까지 내몰린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주님의 깨끗하게 하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와 죽음”이라는 불행한 문제를 안고 살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이런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이들에 비해 더 심각한 문제 속에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문제의 심각함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이 문둥병자처럼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으며, 예수님의 긍휼하심과 치료하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불행의 가장 끝자락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만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우리는 위에 열거한 병자, 귀신들린 자, 죄 지은 자, 죽은 자,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문둥병자와 똑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오직 이 끝자락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게 되며, 비로소 예수님을 구주로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한 문둥병자입니다. 구약 성경에 문둥병은 “부정한 (unclean)”병으로 규정되었습니다 (레위기 13:3).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 입술을 가리고 스스로에 대해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야 하며 또 공동체에서 쫓겨나 혼자 따로 살아야 했습니다 (레위기 13:45-46). 이런 구약의 규정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문둥병”이라는 말이 풍기는 더럽고 추하고 무서운 느낌을 영화나 소설이나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를 통해서 많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 학자들은 자주 사람들의 “죄”를 “문둥병”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이 둘이 매우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문둥병은 그 병의 증상이 결국 피부에 발현되지만, 병의 원인은 피부 깊은 곳에 숨겨져 있으며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죄도 “죄의 본성”이 마음 깊은 곳에 흐르고 있으며 오랜 시간을 두고 결국 그것이 열매로 드러나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일 수 있습니다. 문둥병이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고 무서운”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죄도 하나님과 사람들의 눈에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고 무서운” 것입니다. 또 문둥병에 걸리면 자신에 대해 “부정하다”고 외치며 공동체에서 쫓겨나 혼자 살아야 하는 것처럼, 죄는 우리 마음 속에 “수치심”과 “두려움”을 일으키며,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께 대하여 벽을 쌓고 홀로 외로운 삶을 살게 만듭니다. 가장 큰 문제는 문둥병이 불치의 병인 것처럼, 사람의 죄 또한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둘은 모두 우리의 육적, 영적 생명의 소망을 끊어버리며, 이 절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와서 그 앞에 꿇어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문둥병자에게는 지켜야 할 규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부정하다”고 여기며,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혼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와서 엎드려 “깨끗하게 하심”을 구하였습니다. 아마도 늘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나, 그들 앞에서 자신이 지켜야 할 규례들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깨끗하게 되길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그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예수님께서 계셨습니다. 이것이 이 문둥병자의 마음 속에 있는 전부였습니다. 오직 이 소원을 갖고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우리는 심지어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도 “규례”를 생각합니다. 그것은 체면이나 예의나 염치 같은 것입니다. 부끄러움이나 죄책감 같은 것들입니다. 이 문둥병자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늘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숨기고 가리는 것이 습관처럼 몸에 배여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빛”을 보았습니다. 그분의 눈빛은 인자했으며, 그분의 능력은 거침이 없어서 모든 질병과 귀신들이 그 앞에서 꼬리가 빠지도록 급히 쫓겨나갔습니다. 이 문둥병자의 눈에 예수님은 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고 압도하는 “스펙터클(spectacle)” 자체였습니다. 놀랍게도 이 예수님을 바라보자, 자신도 깨끗함을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이전에 그에게 “깨끗함”이란 하늘 저 건너편에 있는 “외래어”였습니다. 온 몸이 문둥병으로 뒤덮인 자신을 보면서, 단 한번도 “깨끗함”이란 말을 자신의 생각 속에 담아본 적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은 인자하셨으며, 그 능력이 한이 없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에게 “깨끗함”의 소망이 생겼습니다. 이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소망이 강한 빛으로 그의 영혼 깊은 곳을 비추었습니다. 이제 그에게 다른 것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체면이나 염치나 부끄러움도 없었습니다. 그냥 그 빛에 이끌려서 예수님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문둥병자는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문둥병자의 이 기도는 “신앙”의 측면에서 매우 순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오로지 예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의 의지하여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측면에서 순수하지 못한 기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가능성”을 계산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 “자기 의”를 내세워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곁눈질을 하며 “두 마음”을 품을 수도 있으며, 또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는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둥병자의 기도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도는 순수하게 예수님을 향한 기도였으며, 주님의 긍휼을 의지하는 기도였으며, 주님의 전능하심을 의심치 않는 기도였으며, 또 마음이 소원이 너무 분명하여 뒤로 물러설 수도, 다른 길로 갈 수도 없는 기도였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어떻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었을까요? 간단히 말해서, 그는 자신에게 “절망”하고, 예수님에게서 “소망”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이 문둥병자의 영혼 속에 주님을 향한 “순수한 믿음의 기도”을 빚어낸 것입니다. 레위기에 있는 문둥병자에 관한 규례들 중 흥미로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레위기 13:13절 말씀입니다. “….. 문둥병이 과연 그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다 희어진 자인즉 정하거니와……” 여기서 “정하다”는 말은 “깨끗하다”는 말입니다. 문둥병이 온 몸에 퍼졌으면 가장 부정한 상태로 보아야 마땅한데,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를 “깨끗하다”고 하라 하십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경우를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죄가 완전히 드러나 더 이상 감출 것이 없는 상태”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매우 아이러니컬하게도, 하나님의 눈에는 이것이 비로소 “깨끗한 상태,” “의로운 상태”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요한1서 1:8-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는 “죄의 가장 끝자락까지 내몰린 부정한 자신”을 발견할 때, 비로소 겸손히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게 되며 “깨끗함”의 소원과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이 절망과 소망을 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의롭고 깨끗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문둥병자의 간구를 들으신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사람들도 이 문둥병자를 보면 불쌍히 여기고, 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대로 자비를 베풀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자비하심은 세상 사람들이 베푸는 “동정심”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의 자비하심은 “품으심”과, “함께 하심”과, “구원하심”입니다. 41절에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민망히 여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20절 보면, 재물을 허랑방탕하게 허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오는 둘째 아들을 멀리서 보고 “아버지가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쓰여 있는데, 여기서 “측은히 여겼다”는 말씀이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민망히 여기셨다”는 말씀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문둥병자를 대하시는 마음은,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대하는 그것과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리고 우리 각자를 있는 모습 그대로 껴안으시며 품으십니다. 찡그리시거나, 꾸짖으시거나, 싫어하시는 법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그 앞에 나아온 것으로 기뻐하시며, 받으시며, 품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셨습니다. 그의 몸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조차 꺼려졌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더구나 그 몸에 손을 댄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것은 함께 하고 나누기를 원하지만, 어려운 일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가능한 멀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문둥병자의 몸에 손을 대심으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손길은 이 문둥병자가 처음 느껴보는 사람의 체온이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그의 병을 가져가십니다. 이사야 53:4-5절 말씀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와 함께 하시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라는 존재는 다름이 아니고 우리의 질고(병과 연약함)이고 슬픔이며, 또 우리의 허물이고 죄악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은 이런 질고와 슬픔, 허물과 죄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부담스러워하고, 멀리하며, 진정한 “함께 함”을 나눌 수 없어 외롭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의 질고와 슬픔, 우리의 허물과 죄악과 함께 하시며, 그것을 가져가시며, 우리 대신 고난을 당하시며 우리에게 평화와 나음을 주십니다. 세상에 이런 진실한 친구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나와 함께 하실 수 있는 참된 친구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께서는 기쁘신 마음으로 문둥병자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를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 그의 기쁘신 뜻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다른 사람의 은혜를 구할 때가 있고 또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한두 번”에 그치고, 갖고 있는 문제의 무거움에 비해서 해줄 수 있는 것도 매우 미미하며, 또 사람들의 친절한 마음은 아침 이슬처럼 쉽게 사라져버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자비하심에는 끝이 없으며 그 능력 또한 한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것을 아주 기쁘고 즐겁게 베푸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을까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직업이 바로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이야말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삼위 하나님께서 힘과 뜻을 모아 이루어가시는 최고요 최우선의 프로젝트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죄인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면 하늘에서 이를 보고 하나님께서 그 천사들과 함께 기뻐하십니다 (누가복음 15:7, 10, 32).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그의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내시면서 엄하게 경계하셔서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곧장 제사장에게 가서 그의 몸을 보이고 제물을 드려 그의 몸이 깨끗해졌음을 신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회복되어 정상적인 삶을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나가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이 더욱 예수님께 모여듦으로 결국 예수님은 동네를 나오셔서 한적한 곳에 계셔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사방에서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성경 기자는 문둥병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생긴 불편함을 언급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둥병이라는 천형이 무거운 바위처럼 짓누르던 그의 몸과 마음이 예수님의 은혜로 이제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그는 이제 저주 받은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에게는 “제사장의 certificate”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감사와 기쁨이 그대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증거하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냥 그 사람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는 과거에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이었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어두운 곳들을 찾아 숨어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가 받은 은혜를 나누고 증거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의 증거를 받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사방에서 몰려들었습니다. 그의 선한 영향력은 정말 놀랄만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이 문둥병자와 같이 그 삶이 활짝 피어납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그리고 역사 속에서 그와 같은 예들을 수 없이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밝은 빛이 되어 세상을 비추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문둥병자도 하나님께서 켜 놓으신 그 빛들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비록 짧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의 인생 역정을 매우 드라마틱하게 잘 보여줍니다. 불행의 끝자락에서 더 이상 소망이 남지 않은 불쌍한 영혼과, 그 영혼을 구원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구주 예수님이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놀랍고 감동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매우 자비로우시며 또 능력이 많으신 구주이십니다. 늘 우리를 기쁘게 맞으실 준비를 하시고 두 팔을 벌려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소망 없음을 인정하고, 겸손히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가난하고 약한 몸과 마음을 주님의 풍성한 은혜로 채우십니다. 그리고 이 은혜야말로 우리의 기쁨이며 능력이며 생명이 됩니다. 나의 삶이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 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