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시고 전도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29-39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면 주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하신 일이 크게 두 가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전도”이고, 다른 하나는 “치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고, 설명하셨습니다. 장소와 대상을 가리지 않으시고 거리에서, 회당에서, 해변에서, 집 안에서, 우물 가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사람들을 치료하셨습니다. 눈 먼 자, 귀머거리, 벙어리, 문둥병자 등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예수님의 이 두 가지 사역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또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려온 각색 병자들을 치료하시고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후, 여러 마을들을 다니시며 전도하셨습니다. 39절 말씀은 결론처럼 예수님의 하시는 일들을 요약합니다.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더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위해 “전도”하시고 또 “치료”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이 둘 중 어떤 일에 더 높은 “우선 순위”를 두셨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귀신을 내어쫓으시자 예수님께 대한 소문이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든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서 계신 집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많은 사람들을 고치시고 또 많은 귀신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의 행렬은 다음 날에도 끝 없이 이어졌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고는, 기도하러 나가신 예수님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빨리 오셔서 어제 하시던 것처럼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시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예수님은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3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예수님께서는 집 앞에 모여드는 병자들을 고치시는 대신, 다른 마을들로 가셔서 전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할 일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전도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39절 말씀에서와 같이, 예수님은 전도를 하시면서 또 여전히 귀신도 내어쫓으셨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전도”를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시고 늘 그 일에 힘쓰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우선 순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이 오늘 설교를 통해 제가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질문입니다.
비슷한 뜻을 가진 몇 개의 속담들이 있습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영어에도 비슷한 속담이 있습니다. “A stitch in time saves nine.” 번역하자면, 제때 하면 한 바늘만 꿰매면 될 것을 늦어지면 열 바늘을 꿰매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격언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은 “작은 수고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방치하면 결국 더 심각한 문제가 생겨서 큰 손해를 보거나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필요한 대응을 해야 합니다. 그 대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 문제가 생기기 전에 그것을 “예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유식한 말로 “pro-action”이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 문제가 발생한 후에야 그것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re-action”이라고 합니다. 어떤 것이 더 나은 대응일까요? 물론 “pro-action”이 더 나은 대응입니다. 이를 통해 문제 자체가 아예 일어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앞의 격언들이 말해주는 것처럼 “pro-action”은 작은 수고와 비용으로 큰 손해를 막을 수 있기 때문에 “re-action”에 비해 매우 현명하고 올바른 대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pro-action”을 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언젠가 다른 설교에서 사용한 적이 있는 예화입니다. 세 명의 형제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의사였습니다. 이들은 각각 자신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의원을 열고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특히 둘째와 셋째가 어려운 병을 잘 고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둘째와 셋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 세 형제들 중에 누가 가장 뛰어난 의사입니까?” 둘째와 셋째는 뜻밖에도 그들의 맏형인 첫째를 언급하면서, “큰 형님이 가장 뛰어난 의사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되물었습니다. “아니 당신들 둘은 어려운 병을 잘 고치는 것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맏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까?” 그러자 이들은 대답했습니다. “큰 형님이 돌보는 사람들은 아예 어려운 병에 걸리지도 않습니다.”
과연 둘째와 셋째의 말대로, 첫째야말로 가장 훌륭한 의사입니다. 그의 돌봄 아래서 사람들이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있으니까요. 아마도 이 의사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한 생활 습관들을 가르치고 실천하게 한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병을 치료하는 “re-action” 대신 병을 예방하는 “pro-action”을 취한 것입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둘째와 셋째는 어려운 병을 잘 고치는 유능한 의사로 널리 인정을 받는 반면, 첫째는 그냥 그렇고 그런 의사로 취급된다는 것입니다. 첫째 의사에게는 또 다른 더 큰 어려움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병에 걸리지 않으니 의사로서 많은 돈을 벌 수도 없을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나쁜 습관들을 고치는 것은, “병든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병든 사람은 몸이 아파서 겸손한 마음으로 의사에게 와서 치료를 받지만, 건강한 사람은 의사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만큼 겸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병은 한 번 치료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생활 습관은 매일 매일 세밀한 돌봄이 필요합니다. 이런 어려움들과 손해들을 무릅쓰고 오직 사람들이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도록 의사가 “pro-action”에 힘쓴다면, 그는 정말 사람들을 사랑하는 진정한 의사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그런 의사이십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치료하시는 의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최고의 건강”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기에도 영광스러운 “온전함,” “의로움,” “거룩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전도를 통해서, 곧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심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간절히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천국”입니다. 아주 오랫동안 괴롭히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사람들은 “아! 이제 살 것 같다!”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각색 병들을 치료하시고 귀신들을 내어쫓으셨을 때, 아마도 사람들은 같은 환호를 질렀을 것입니다. 온 동네가 잔치 집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또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으로 누워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며 열병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러자 장모는 집에 온 손님들을 섬겼습니다.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을 때는 집안 분위기가 매우 무겁고 우울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건강해진 장모가 일어나 집의 여주인으로서 사람들을 섬기자 마치 100watt짜리 전등을 켠 듯 집안이 갑자기 환해지고,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웃음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천국”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괴롭히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주심으로써 그들에게 천국의 기쁨을 선물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역은 “re-action”입니다. 사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pro-action”이 필요한 “더 깊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마치 건강을 해치는 매우 나쁜 습관과 같습니다. 아직 몸에 나타나는 병이 없어서 자신을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 습관이 문제로 보이지 않습니다.하지만 의사의 눈으로 보면 이 건강에 해로운 습관은 그 자체로 “병”입니다. 사실은 보이는 “병”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이것이 “더 깊고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은밀한 곳에 숨어있어서 발견하기가 쉽지 않고, 또 너무 오래 되어서 뿌리를 뽑기가 어려우며, 이로 인해 많은 다른 병들이 생기고 또 생기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천국”도 없는 것입니다. 이 “더 깊고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38년동안 병에 걸려 누워지내던 한 사람을 치료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요한복음 5:14). 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 38년 된 병자의 진짜 문제는 그의 오래된 병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죄”입니다. 그의 병보다 더 오래되고, 그 병보다 더 깊게 그의 삶 속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으며, 심지어 더 나빠질 수도 있는 그의 “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매우 근심 어린 마음으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죄”란 무엇일까요? 죄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며, 무서워하고, 멀리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크고 심각한 문제이며,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다른 문제들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맥락으로 “천국”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란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하고, 사랑하며, 기뻐하고,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행복의 기초가 되며, 이 기초는 어떤 다른 문제나 불행에 의해서 절대로 흔들리거나 무너지는 법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절대적으로 행복한 사람이며 절대적인 천국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 잃더라도 “하나님과의 평화”를 지켜야 합니다. 이 “평화”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 우리 몸과 영혼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 하나님과 화목하면 우리는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천국의 행복은 변하거나 쇠하지 않는 “영원한 행복”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한 우리는 그것을 잃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 눈치 볼 필요 없이, 한 마음으로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 곧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다시 화목하게 하셔서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도록 하시려고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전도”하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하신다는 평화의 복음입니다. 사도행전 10:36-37절에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을 너희도 알거니와……” 이 말씀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을 가리켜 “화평의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누가복음 5장에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베드로가 밤새 바다에서 그물질을 했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자 그의 그물에 셀 수 없이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고기가 많이 잡혔을 때 베드로는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을 본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말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심으로써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고, 또 이 예수님 앞에서 “더 깊고 근본적인 자신의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 된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두려운 문제로 인해 그는 빨리 어디로든 이 예수님의 눈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숨겨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언젠가 다 겪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심판의 날에 여전히 하나님의 원수 된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은 참으로 극악한 고통입니다. 요한계시록 9:6절은 그 날의 괴로움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얼마나 괴로우면 죽기를 구하겠으며, 또 죽고 싶어도 죽을 수조차 없으면 그 괴로움이 얼마나 더욱 극심하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이 피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베드로를 향해서 예수님은 다정한 음성으로 “무서워 말라” 하셨습니다. 심지어 그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심으로 그를 예수님의 동역자(co-worker)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베드로를 곁에 가까이 두시고 그를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와 많은 얘기를 나누시며 교제하셨습니다. 허물이 있으면 온유하게 책망하시고,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면 변호하시며 보호해 주셨습니다. 마치 엄마가 아이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때를 씻고, 잽싸게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듯이, 그렇게 친절한 손길로 베드로의 죄를 씻어내시고 그 속에 정한 마음을 빚으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시며, “하나님의 평화”이셨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두려웠던 베드로가, 이제 바로 그 하나님 안에서 평화와 안식을 찾은 것입니다. 이 평안은 그의 영혼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며, 그 안을 환하게 비추며, 온갖 신령한 은혜들을 뿜어내는 참으로 신기한 평안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참 평안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전도”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축복입니다.
우리에게는 풀어야 할 문제들도 많고, 또 갖고 싶은 것들과 하고 싶은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고 또 원하는 것들을 얻을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아주 잠깐 우리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re-action”에 불과합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진짜 원인은 우리 영혼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님과의 불화”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평화의 소식”을 가져오셨습니다. 그 소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이며, 그 죄를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이며, 우리 안에 성령으로 임하셔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며,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 그리고 “하나님과의 평화”야말로, 모든 불행의 원인들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pro-action”입니다. 사람들은 다가오는 더 큰 재앙을 알지 못한 채, 눈 앞에 보이는 문제들에 매달려 일생을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평화의 메시지”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것을 구하기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과 그 하신 일들을 통해 나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해야 합니다. 끝으로 로마서 8:32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갖는 담대함입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이 담대함이 있어서 매일 하나님의 천국을 누리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