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마가복음 2:1-12
마가복음 1장을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서론이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마가복음 2장은 본론의 시작 혹은 “갈등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공부했던 마가복음 1장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은 매우 고무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시며, 또 이를 본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몰려들었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 죽 이어진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매우 쉽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장 곧 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본색을 드러내십니다. 말하자면 인사치레를 끝내시고 이제 “이 땅에 오신 용건”을 꺼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으로 예수님과 사람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큰 갈등을 일으킵니다. 마가복음 2장은 크게 3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2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13-17절에서는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인 18-28절에서는 금식과 안식일 규례에 관한 사람들의 “어찌하여……” 로 시작되는 질문들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 부분의 핵심적인 키워드를 꼽는다면, 각각 “죄,” “죄인,” 그리고 “율법”입니다. 마가복음 2장은 예수님께서 죄를, 죄인을, 그리고 율법을 어떻게 다루시는가에 대해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것들에 얽힌 문제들을 해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죄와 죄인과 율법을 다루시는 예수님의 방법은 세상의 그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을 잘 이해하고 그 은혜를 받아 누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죄와, 죄인과, 율법을 어떻게 대하시고 다루시는 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앞 장에 예수님께로부터 고치심을 받은 문둥병자가 이 일을 널리 전파함으로, 예수님께서는 한동안 동네를 나와 한적한 곳에 머물러 계셔야 했습니다. 수일 후에 예수님은 다시 가버나움 동네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문 밖에 있는 이들조차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여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어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 앞으로 그를 데리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예수님께서 머물고 계신 집의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워있는 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갑자기 천정이 무너져 내리고, 그 구멍으로 병자가 내려오는 것을 본 사람들은 아마도 놀라며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저희들을 반갑게 맞이하셨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고 합니다. 이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예수님께 보여드린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찾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근본적인 의미는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을 가장 명확하게 정의한 말씀을 꼽는다면 아마도 히브리서 11:6절일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란 그가 계신 것을 믿으며,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공교롭게 “계시다”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1절에는 “예수께서 ……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하고 또 5절에는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계셨습니다. 또 병상에 누워있는 중풍병자를 보고 있으면, 이런 사람도 예수님께서 고치실 수 있을까 하는 의심도 생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찾는 이들의 믿음은 이런 눈 앞의 장애물과 마음 속의 의심보다 훨씬 더 강했습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이것들을 극복했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찾으며, 주님이 보이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길이 없으면 새로 길을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지붕을 뚫어가면서까지 말입니다. 혹자는 이를 가리켜 “지붕을 뚫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사실 지붕을 뚫는 믿음을 가진 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 지붕을 뚫고, 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와 율법”의 장벽이 매우 두텁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벽을 깨뜨리시고 그 사이로 새 길을 열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우리는 이 “중풍병자”와 마찬가지로 전혀 무능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길을 내시고, 또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히브리서 10:19-20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여기서 “성소”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며, “휘장”은 성소로 들어가는 길을 막고 있는 일종의 분리막입니다. 이 휘장으로 인해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이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그 사이로 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생겼습니다 (마태복음 27:51). 히브리서 기자는 이 휘장이 곧 “예수님의 몸”이라고 합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지붕”을 찢어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을 낸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찢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내신 것입니다. 이전의 “휘장”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분리의 벽”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의 육체가 새로운 “휘장”이 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휘장은 “분리의 벽”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길”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몸을 찢어 열어놓으신 이 새 길을 통해 담대하게 하나님을 찾으며 그 계신 곳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보시고 그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들은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이들의 마음 속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과 서기관들의 이 대화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좀더 쉬울 듯 합니다. 여기 “중풍병”과 “죄”가 있습니다. 죄는 모든 병과 문제들의 근본 원인, 곧 그것들의 “뿌리”입니다. 그리고 “중풍병”은 그 죄가 발현되어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는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중풍병을 고치시는 권세가 있으시고, 또한 그 병의 뿌리가 되는 “죄”를 사하시는 권세도 있으십니다. 그리고 이 “죄 사함의 권세”는 더 큰 권세입니다. 이 권세야말로 신적인 권세이며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인자 (son of man)”라고 부르십니다. 이 호칭은 다니엘 7:13-14절에서 온 것입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인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가졌으며 그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입니다. 이 인자는 하나님께서 장차 이 땅에 보내실 구원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구주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인자가 되십니다. 인자 되신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이보다 더 크고 중요한 권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모든 문제들의 뿌리가 되는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권세입니다. 곧 “죄를 사하는 권세”입니다. 뿌리를 뽑는 권세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께 주신 권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 되신 자신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은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며, 또 그 이익이 즉각적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기적들을 보면서 놀라워하며 바로 예수님의 권능을 인정하고 그 주위로 모여듭니다. 하지만 “죄를 사하는 권세”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우선 그 결과를 눈으로 볼 수 없으며, 그 이익이 즉각적이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권세는 “더 큰 권세”이며 서기관들의 말대로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어떤 약들은 열을 내리거나 기침을 멈추게 함으로써 단순히 증상들만을 완화시킵니다. 이런 약들은 그 약효가 바로 나타나서 좋은 약으로 호평을 받을 수 있지만 그 효과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이는 병의 원인을 치료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들만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죄사함은 우리에게 있는 모든 질병들과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입니다. 하지만 이 치료는 사람들 사이에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죄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으며, 우리에게는 더 급하고 중요한 다른 문제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 문제”는 나의 비밀한 사생활이며, 하나님이라도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되는 “성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은 항상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죄의 뿌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 뿌리를 뽑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죄사함”의 은혜가 없이는 모든 다른 축복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삼위 하나님 곧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삼위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서로 동등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가운데 하시는 일에 따라서 구분되실 수 있습니다. 한 성경학자에 따르면, 성부 하나님은 주로 창조의 권능(creative power)을 행사하시며, 성자 하나님 곧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권능(redemptive power)을, 그리고 성령께서는 완성의 권능(perfective power)을 행사하신다고 합니다. 물론 삼위 하나님은 늘 함께 일하시지만, 삼위의 각 하나님께서 중점적으로 맡아 담당하시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맡으신 일은 구속(redemption) 곧 죄사함이며, 당연히 이 일을 행하시기 위한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의 죄사함을 기초로 해서만 성령께서 한 영혼을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으로 완성(perfection)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죄사함”으로 귀결됩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1:21절에 하나님의 사자가 요셉에게 나타나 그의 아내 마리아의 몸에서 날 아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또 마가복음 10:45절에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대속물이란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드려지는 희생 제물을 말합니다. 또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잔을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27-28).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사역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이 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 안에만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죄 사함을 통해서만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됩니다. 사람들에게도 나름대로 죄 문제를 다루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주의하십니다 (마태복음 16:6). 사람들이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크게 바리새인의 방식과 사두개인의 방식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외식(hypocrisy)”함으로 죄 문제를 덮습니다. “외식”이란 속 안에 있는 죄를 감춘 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겉으로만 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거짓된 자기의(self-righteousness)로 하나님을 속이고 내면의 죄 문제를 감출 수 없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세속적인 삶”으로 죄 문제를 잊고자 합니다. 이들은 영적인 세계, 영원한 세계, 부활, 하나님의 심판 등을 부인합니다. 사람은 그냥 이 땅에서 육체로 살다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죄 문제”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오늘 먹고 마시자”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5:32). 하지만 술과 세상 향락에 취해서 모든 것들을 잊고 지낸다고 하더라도 “죄 문제”는 여전히 그의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더 심하게 그 영혼을 괴롭히며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이렇게 외식으로 죄를 감추거나, 아니면 세속적인 삶을 통해 죄를 잊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진통제나 마취제처럼 “아주 잠깐” 우리에게 평안을 줄 수는 잊지만,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 문제는 오직 예수님의 죄사함을 통해서만 해결됩니다.
사람들은 죄를 감추거나 잊어버림으로써 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시고, 그것을 치료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치료하시고, 귀신들을 내어쫓으시고, 제자들을 부르신 것처럼 우리는 여러가지 모양으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은혜들은 결코 죄 사함의 은혜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문제가 온전히 드러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의 크기는 곧 내가 용서받은 죄의 크기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누가복음 7:47). 예수님께서 그 앞에 나아온 중풍병자를 치료하시면서, 이것을 드러내시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일어나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 더 큰 선물, 가장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저와 우리 각자가 이 예수님의 죄 사함의 의미를 깊이 깨달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신비한 은혜 속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