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나를 따라 오너라 (마가복음 1:16-20)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1. 8. 30. 00:54

나를 따라 오너라

 

마가복음 1:16-20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크리스천이 되면 우리의 삶에 여러가지 변화들이 생깁니다. 제가 젊은 시절에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처음 겪게 변화들 하나는 술과 담배를 끊은 것입니다. 퇴근 시간이나 주말에 여가를 보내는 방식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회사 회식보다는 교회 모임 참석이 빈번해지고, 앉아서 책을 읽거나 성경을 공부하는 시간도 많아졌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전의 친구들과는 조금씩 관계가 소원해지고 대신에 새로운 사람들이 주위에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런 보이는 변화들은 크고 근본적인 변화 따라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라고 있습니다. 크고 근본적인 변화 겪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음의 소원입니다. 이것은 이라고도 있고, 크리스천들은 자주 비전이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생기는 가장 변화는 이것입니다. 마음의 소원 바뀌는 것입니다. 소원이 막연하기도 하고, 너무 크기도 하고, 때로는 보이지 않아서 앞으로 무엇을 위해살아야 할지가 불분명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분명한 것은 우리 마음 깊은 속에서 원하는 바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우리가 전혀 다른 길에 들어섰음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마음의 소원 전혀 바뀌지 않았다면 내가 가진 신앙이 참된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만나면 대해서 얘기하고 싶어합니다. 우리 앞날에 기대하는 바들, 장래에 이루고 싶은 것들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정말 흥분이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꿈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장래 꿈이 무엇이냐?” 하고 질문하는 것이 조심스럽다고 합니다. 어릴 꿈을 품었다가도 점점 그것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꿈이 오히려 부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 미래 꿈을 이루는 기대보다는 불확실한 두려움으로 가득한 어두움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런 두려움을 갖고 있다면 꿈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어려움이 있습니다. “ 좋은 것이지만, 실상은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무엇을 꿈꿔야 하는지, 나한테 꿈을 이룰 능력과 지식이 있는지,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희생과 노력이 필요한지, 꿈의 성취가 정말 인생을 의미 있고 행복하게 만들 것인지 등의 질문들은 하나같이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사건은 꿈에 관하여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들을 가르쳐 줍니다. 교훈들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꿈은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발견됩니다. 둘째, 의미 있는 꿈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셋째, 예수님을 따르고 배우는 것이 꿈을 이루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들은 바다에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어부들이었습니다. 이들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시몬과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조금 가시다가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일하게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며, 동시에 그들에게 주신 또는 비전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제자들의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이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보다시피 그들은 자신들의 본업인 고기잡이 일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 ,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소망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무엇을 꿈꾸었었나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게 것이라고 생각했던 같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원하는 것을 누리며 행복하고 무난하게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서울에 있는 유수한 대학교를 졸업하고 유력한 대기업에 취직한 것만으로도 이미 성공이었습니다. 자랑할만한 꿈을 이룬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에서 갖는 꿈이란 모두 이런 것입니다. 요한1 2:16 말씀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아버지께로 좇아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것이라.”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꿈들은 모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런 것들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이런 꿈을 갖게 만듭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이런 것들을 기대하며, 친구들은 대화 속에서 이런 것들을 자랑하거나 부러워합니다. TV 인터넷에서 쏟아내는 드라마, 광고, 프로그램들이 모두 우리의 가슴 속에 세상의 불어넣습니다. 우리는 갖고 있는 보이지만, 실상 그것은 꿈이 아니고 기만적인 착각(deceptive illusion) 불과합니다. 앞서 인용한 요한1 2:16절에 이어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세상도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서론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자가 되었을 우리에게 일어나는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변화는 바로 마음의 소원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생기는 이유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예수님의 으로의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하십니다. 말씀은 제자들에게 두신 예수님의 또는 하나님의 드러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의 마음의 소원이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13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목적은 자기의 기쁘신 입니다. 그리고 뜻을 위해 우리가 소원을 갖고행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나의 소원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복이 있을까요? 저는 절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뜻을 마음의 소원”으로 품고 산다는 것은 나의 삶을 하늘보다 높은 고상함으로 끌어올리는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은 언제나 축복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세기 12:2-3).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찾아볼 있습니다. 그것은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시는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예수님의 부르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선하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낚는 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로운 마음의 소원입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라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종교들이 구원 대해서 말합니다. 하지만 구원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와 구원을 어떻게 얻느냐 하는 것은 종교마다 다를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의 상식적인구원관을 간단히 요약하면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간다 말할 있습니다. 이것으로구원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됩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통해 추구하는 구원 핵심은 천국에 가는 이라기보다는  나의 마음과 성품이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이르는 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이러한 예를 찾을 있습니다. 레위기 11:45절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마태복음 5:48절에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시며, 누가복음 6:36절에서는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하십니다. 더하여, 로마서 14:17절은 하나님 나라 천국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말씀들은 모두 우리가 어떤 점에서 구원을 얻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드러냅니다. 구원이란 우리의 내면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성품들에 관해 우리 각자에게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수준 있습니다. 완전함에 이르는 것이 우리가 참으로 사모해야 구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하십니다. 말씀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부르심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심이 사람 부르신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 부르시는 것임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신 것은 물론 사람을 축복하시고자 함이지만, 나아가 그를 통해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베드로를 인도하셨는지를 생각해보면 부르심의 의미를 깊이 이해할 있습니다. 누가복음 22:31-32절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는 동안 베드로가 극심한 사단의 시험을 겪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시험을 이기고 믿음을 지키도록 그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시며 도우신 것처럼, 베드로 또한 형제들을 믿음 위에 굳게 세우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에서도 우리는 같은 뜻을 발견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주께서 아시나이다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어린 양을 먹이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베드로를 양육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사랑을 배운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양들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주님으로부터 믿음과 사랑을 배웠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것은 많은 영혼들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부르심의 진리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그를 통해 만민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것은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왕 바로의 압제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며, 다윗을 왕으로 부르신 것은 그를 통해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고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무엘하 6:12). 하나님의 마음 깊은 곳에는 밤낮 마음을 사로잡고 괴롭히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잃어버린 영혼들입니다. 하나님께는 이들이 전부입니다. 심지어 이들을 위해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이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입니다. 꿈을 꾸시면서 우리에게 아들을 보내시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주 조금이라도 있을까요? 그럴 있기를 바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로 물고기를 잡던 어부였습니다. 그의 삶은 뜨거운 햇볕과 거친 바람만큼이나 투박하고 피곤하고 무료했을 것입니다. 매일 그물을 던져 잡아 올린 마리의 물고기와 그것을 시장에 내다 팔고 얻는 동전 닢이 그가 매일 기대할 있는 소소하고 소박한 즐거움이었습니다. 대대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와 같은 어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렇게 많은 어부들 하나였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오셔서, 그를 보시고,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르심에 응답한 베드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으며,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누가 피라미떼처럼이나 많은 어부의 이름을 기억이나 하겠습니까?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인해 인류 역사에 영원히 빛나는 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그렇게 높이 끌어올리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게 것일까요? 그것은 달리 설명할 수가 없고, 예수님의 말씀이 그의 영혼을 사로잡아 빠져나갈 없이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가지 비유들을 통해 천국을 설명하셨는데, 그것들 하나는 그물의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13:47-4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그물을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마치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듯이, 세상을 향하여 천국 복음을 던지십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복음의 말씀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그물에 걸리지 않습니다. 여전히 깊고 어두운 바다 속에 머물며 소소한 육체의 즐거움들에 골몰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의 부르심은 그저 수면을 스치며 사라지는 공허한 메아리 불과합니다. 하지만 말씀의 그물에 걸리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강력하게 영혼을 사로잡아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그물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말씀을 들은 걸로 하면 되는데 그게 안됩니다. 주님을 부인하려고 하면 중심이 불붙는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고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 20:9). 베드로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그물과 배를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예수님을 따라 급히 길을 떠났습니다. 이들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꾸게 것입니다.

 

꿈이란 깊은 마음의 소원입니다. 그것은 내가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속에 내가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밤낮으로 나를 생각하시고 나의 구원을 꿈꾸십니다. 나를 높이셔서 아버지의 완전함에 이르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더욱더 나를 고상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 속에 같은 하나님의 꾸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를 부르시는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하시는 부르심의 뜻입니다.  우리가 꾸어야 꿈은 하나님의 완전함에 이르는 입니다. 우리가 꾸어야 꿈은 하나님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꿈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에게 꿈을 주시는 분이시며, 꿈을 이루는 길이 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꿈을 주시며 꿈을 이루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