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마가복음 1:14-20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또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의 시골 마을인 나사렛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마가복음 1:9절에도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은 자신의 고향에서 복음 전파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 갈릴리 지방은 천대 받는 땅이었습니다. 이는 이곳에 이방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살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4:15절에서는 이 지방을 “이방의 갈릴리”라고 부릅니다. 또 요한복음 1장에서 후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다나엘이란 사람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하고 반문합니다. 이렇듯 갈릴리 땅과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그 당시 매우 종교적이었던 같은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곳에서 복음 역사를 시작하시고, 심지어 그곳에서 가장 하층민이라고 할 수 있는 어부들을 불러 자신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전하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께서는 이제 때가 찼다고 하십니다. 정한 때가 이르렀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때” 또는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Kairos”이며 다른 하나는 “Chronos”입니다. Chronos는 “양적인 시간”을 나타냅니다. 곧 한 시간, 일 분, 일 초 등 길이로 나타낼 수 있는 시간을 말합니다. 우리 각자가 갖고 있는 “수명”도 Chronos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시간인 것입니다. 반면에 Kairos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질적인 시간”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정해진 때,” “적절한 때,” “기회” 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요한복음 7:6절에 예수님께서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시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의 “내 때”는 “My Kairos”라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 때”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영광에 들어가시기로 정해진 때를 말합니다. 오늘 말씀의 “때가 찼다”는 말에서도, 때를 가리키는 말로 Kairos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어떤 중요한 시점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의 삶은 chronological 하거나 kairological 하다고 합니다. 좀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말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삶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잘 알다시피 노아는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가족과 동물들을 위해 거대한 방주를 지었습니다. 노아는 약 100년에 걸쳐 방주를 지었다고 합니다. 노아가 방주를 짓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마태복음 24:38-39a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 노아가 방주를 짓는 동안 사람들은 으레이 그러하듯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는” 일상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여기서 노아의 삶은 kairological하며, 그의 시대에 다른 사람들의 삶은 chronological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Kairos)에 일어날 심판의 홍수를 대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100년이라는 시간(Chronos)은 이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살아남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는 늘 그 때를 바라보며 매일 방주를 짓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경고 후에도 100년 동안이나 홍수 심판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은 맑고 세상은 평화로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때를 준비하는 삶을 사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일 쉬지 않고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가 방주를 준비하는 동안 점점 “때가 찼습니다.” 물론 노아도 다른 사람들 처럼 먹고 마셨을 것입니다. 그에게 3명의 아들들과 며느리들이 있는 것을 보면 (창세기 7:7), 장가 들고 시집 가는 일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항상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 때”였습니다. 그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그 때를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는 Kairological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노아에 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 (히브리서 11:7a).
노아의 삶에 비해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들에게는 기다리며 준비하는 “때(Kairos)”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훗날에 있을 홍수를 대비해 방주를 짓는 노아를 비웃으며 화창하고 평화로운 현재의 날들을 즐겼습니다. 그들에게 “때”는 채워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때”는 흘러가며 점점 비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흘러가며 비워지는 시간을 아쉬워하면서 최대한 그 시간을 즐겼습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시간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때 (Kairos)”가 아니라,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금의 일 분 일 초 (Chronos)”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시간들을 행복하고 윤택하게 보낼 것인가에 골몰했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에게도 졸업, 취업, 결혼과 같이 인생의 전기(turning point)가 되는 중요한 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크게 보면 이것들 또한 그들이 집중하여 살고 있는 이 땅에서의 시간(Chronos)의 일부일 뿐입니다. 이들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란 그들에게 주어진 생애 기간, 곧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날들입니다. 이 시간은 끝을 향해 달려가며, 매일 조금씩 줄어들며, 결국 죽음 속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이 chronological한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기서 “때”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말합니다. 그 때가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구절을 “천국이 가까웠다”고 말씀합니다. 곧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입니다. 하지만 이 천국은 우리가 이해하는 천국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을 굳이 정의하자면 “하나님께서 세상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예로 든 “노아의 홍수”의 경우, 홍수 이전의 세상은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했습니다” (창세기 6:11). 하나님께서 이런 세상에 개입하셨습니다. 먼저는 노아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하시고, 그에게 방주를 짓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세상을 오랫동안 참으시며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었을 때,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의 결과, 패역한 사람들은 홍수로 인해 멸망하였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방주를 예비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임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세상 역사에 깊이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오신 것은 “구원의 말씀”을 뿌리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열매”를 거두시고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십니다. 성경은 자주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추수(harvest)”로 비유합니다. 마가복음 4:26-29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다”고 하시고, 더하여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하십니다. 또 마태복음 13:30b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잡초)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마치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고 추수 때가 되어 열매를 거두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임하였으며 또 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때 곧 “Chronos”는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로 이어지며 계속되는 시간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때” 곧 “Kairos”는 모든 것이 갑자기 끝나고 전혀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갑자기 임하여 땅에 사는 모든 생명들을 휩쓸어버렸습니다. 추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주인이 일꾼들을 데리고 와서 밭에서 자라고 있는 곡식들을 거두어 가고 빈 땅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Chronos”의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평안한 매일이 변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행복한 삶을 위해서, 땅에 좋은 것들을 많이 쌓아두고 이것들을 자랑하며 즐깁니다. 자연스럽게 이들의 마음은 “땅”에 매여 있으며, 하늘을 보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때”를 애써 무시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반대로 노아와 같이 “Kairos”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은 늘 하늘을 바라봅니다. 하늘에 떠 있는 조각 구름만 보아도 “혹시 오늘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때인가?” 하며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는 땅에 많은 것을 쌓아두지 않습니다. 그 때가 이르면 이것들이 다 소용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땅에 매이게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혹시 그런 일이 있더라도 곧 회개하고 돌이켜 다시 그 때를 바라보며 방주를 짓는 일에 몰두합니다. 이를 생각하면 “회개”의 의미를 좀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회개란 땅에 있는 것들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돌이켜 하늘에 있는 것들을 사모하며 그 때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16-20절은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또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 Chronological한 삶과 Kairological한 삶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시다가 바다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고 있는 시몬 곧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를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자 이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또한 부르시자 야고보와 요한도 사람들과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이에 대한 제자들의 응답은 매우 간결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매우 드라마틱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부르실 때, 이들은 “곧” 예수님을 좇았으며 또 이를 위해 “그물과 배”를 버려 두었습니다. 어부들인 이들에게 배와 그물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하루 하루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순식간에 그것들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제자의 삶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어떤 사람에 예수님께서 와서 “내가 주를 좇기 전에 먼저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습니다”라고 하자 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그 때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Chronological한 삶과 Kairological한 삶을 함께 살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곧 예수님의 제자들이 늘 하던 것처럼 바다에 나가 그물질을 하면서 동시에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 나라는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세상이며, 내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입니다. 반면 “하나님 나라”는 하늘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우리에게 임하는 나라입니다. 이 둘은 함께 할 수 없으며,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가족들과 작별하는 시간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곧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다시 “지금은 Chronological한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때가 가까워졌을 때 Kairological한 삶을 살면 되지 않느냐?”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찼다”고 하시며,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상황이 급박함을 말해주며, 우리의 즉각적인 응답을 촉구합니다. 이 점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 반응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언젠가 어떤 학생과 대화를 나누는데 제가 말하기를, 노아의 홍수 때처럼 곧 예수님께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이 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그 친구는 “2000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베드로후서 3:8-10a절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한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더디 오시는 것은 오래 참으시며 우리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 기억할 것은 이것이 하나님께 결코 긴 시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으로 보자면 예수님의 말씀은 내일이나 모레 곧 이루어질 매우 급한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는 말씀은 우리의 “즉각적인 순종”을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오늘” 그리고 “지금” 뿐입니다. 히브리서 4:7절에는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고 하며, 또 3:13절에도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와 곧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는 오직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처음 오신 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간 개념으로 보자면,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시간은 겨우 눈 깜박할 정도의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것과 같이, 우리도 “즉시” 추수 때를 준비를 하는 Kairological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는 말씀으로 골로새서 3:2-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우리가 주님의 날을 기다리며 세상을 사는 것이 길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을 포함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늘에 감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아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방주를 지은 것처럼, 우리 또한 하늘에 있는 것들을 사모하며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날을 준비하며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이점에서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