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마가복음 1:2-8)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1. 7. 26. 00:52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마가복음 1:2-8

 

우리는 지난 주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들의 그리스도가 되심을 배웠습니다. 타이틀은 예수님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을 구원하시고 다스리시는 구주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나의 구주 되시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먼저 필요한 일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광야에 길을 내는 입니다. 길이 없는 광야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황량한 들판에 보이는 것은 오직 크고 작은 바위들과 모래와 먼지 뿐입니다. 물도 흐르지 않고, 당연히 풀도 나무도 자라지 않습니다. 가파른 언덕과 깊은 계곡들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광야에 평탄한 길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나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광야란 길이 없는 곳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길이 있는 이상 광야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길이 무엇인지, 어떻게 길이 만들어지는지, 그리고 길이 필요한지를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많은 은유적 표현들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공기(바람),” “,” “,” “,” “,” “나무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매일 일상에서 보고, 만지고, 경험하는 매우 친숙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모두 영적인 의미들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영적인 세계가 먼저이고,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를 모델로 해서 우리가 지금 몸담고 사는 세상을 만드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명에 필수적인 요소들(elements) 바람이나 물이나 등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개념들을 유추해낼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단어들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의 저자가 주의 길을 예비하라 , 길이 우리가 매일 걷는 길이 아님은 쉽게 짐작할 있습니다. 다른 은유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길도 영적인 길이며 영적인 의미들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의 이며 생명의 입니다. 옳은 길이며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오늘 말씀 또한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들어야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광야 서로 반대가 되는 말입니다. 앞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광야 길이 없는 벌판이며 따라서 적막하고 황량합니다. 반대로 길이 있는 곳은 이상 광야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다니며, 생명의 활동들이 일어납니다. 성경에는 광야와 길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입니다. 사람이 범죄하였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들 하나는 땅을 저주하신 것이며, 다른 하나는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막으신 것입니다. 창세기 3:17-18a절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나무 실과를 먹었은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것이라하셨습니다. 그리고 같은 2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천사들과 화염검을 두루 세우셔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십니다. 말씀은 범죄한 사람이 처한 상황을 매우 보여주고 있습니다. 맑은 물이 흘러 넘치며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과실이 풍성한 에덴 동산을 떠나 가시덤불과 엉겅퀴만 무성한 거친 광야 쫓겨났으며, “생명나무로 가는 막혀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난 우리 사람들의 슬픈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비록 광야로 쫓겨났지만 여전히 풍요로운 낙원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아마도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세상은 이런 꿈을 이루려는 사람들의 노력에서 얻어진 결과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풍요롭고 안정되고 평화로운 세상이라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더라도 여전히 낙원으로 보일 있습니다.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우리 나름대로의 길들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 13:10절에 이런 흥미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 소알까지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입니다. 당시 이들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키우는 양과 소들의 수가 많아지자 땅이 비좁아 이상 함께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롯에게 제안했습니다. “ 앞에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하면 나는 하고 네가 하면 나는 하리라” (창세기 13:9). 롯에게 먼저 선택할 있는 권리를 것입니다. 당시 그들에게는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현재 머물고 있는 가나안 산지이며, 다른 하나는 산지의 동쪽 아래로 넓게 펼쳐진 요단 들이었습니다. 바위 투성이의 험한 가나안 산지에 비해, 요단 들은 요단 강이 굽이쳐 흐르는 비옥한 평야였습니다. 물이 넉넉하고 땅이 비옥하니 모든 것이 풍부했을 것입니다. 롯은 멀리서 이곳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의 눈에 요단 들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같았습니다. 당연히 롯은 척박한 가나안 산지 대신 여호와의 동산 낙원 같은 요단 들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남았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롯은 좋은 것을 택하고, 아브람은 나쁜 것을 택하여 손해를 합니다. 하지만 앞에서 인용한 10 말씀에 눈을 끄는 대목이 있습니다. “……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은 물이 넉넉하여 낙원 같던 요단 평야의 진실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땅은 비록 여호와의 동산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부르는 생지옥이었습니다. 창세기13:13절은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죄인이었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곳 사람들은 다가오는 멸망의 재앙을 알지 못한 그곳에서 하나님을 떠나 자신들만의 낙원을 누리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롯은 이런 사람들로 가득한 평지 마을로 내려가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롯은 여호와의 동산 같은 요단 들을 택한 반면 아브라함은 광야 같은 가나안 산지에 남았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이곳이야 말로 여호와의 동산이었습니다. 창세기 13:4절에 따르면 이곳은 아브람이 처음으로 여호와께 단을 쌓은 이며 그는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합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동산같은 요단 들을 롯에게 양보하고 대신에 여호와 하나님 택하였습니다. 그는 사람이 없는 한적한 광야에서 조용히 여호와 하나님께 단을 쌓고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남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세기 13:14-15).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낙원을 찾아 평지로 내려가는 대신 험한 산지에 머물러 있으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찾는 아브라함을 너무너무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꼭대기에 세우셔서 동서남북을 바라보게 하시고 사방으로 그의 눈이 미치는 지평선 끝까지를 모두 그와 자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계신 그곳이 바로 여호와의 동산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낙원의 기쁨이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땅을 보여주시며 그것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무슨 부러울 것이 있겠습니까? 그는 광야에 있지만 실상은 천국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어보면 광야는 참으로 특별한 곳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람이 범죄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광야는 고생스러운 삶의 여정 상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광야를 싫어합니다. 가능하면 사람들이 많고 물자가 풍부하고 모든 편의 시설들이 갖추어진 도시에서 즐겁고, 풍요롭고, 안락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반면 광야에서의 삶은 고생스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로 고역을 하다가 모세의 인도를 받아 땅을 탈출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신 곳은 광야였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고, 길도 험하고, 도처에 사나운 원수들이 도사리고 있는 광야였습니다. 이런 광야에서 그들은 40년의 기나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광야 길이 너무 고생스러워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심하게 불평하였고 심지어 옛날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때를 그리워할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스라엘 사람들이 조금씩 조금씩 변했습니다. 그들도 아브라함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에 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생스러운 삶으로 인해 하나님을 불평하고 떠나는 대신, 오히려 고난 중에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신명기 8:2절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십 동안 너희로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음이 어떠한지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말씀은 광야의 의미를 매우 명확하게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광야는 고난 중에 우리의 마음 속에 숨겨진 죄가 드러나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법을 배우는 곳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이끌어내시고 40 동안 그들을 훈련하신 목적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눈으로 보았을 광야란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는 사막과 같은 땅입니다. 그리고 길도 없는 험한 들판을 걷는 고생스러운 삶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광야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기에 광야는 다름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거하실 없이 거칠고 악한 우리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바로 광야 같은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길을 내신 입니다. 일은 오직 광야에서만 가능합니다. 이는 오직 광야에서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낮추시고 시험하실 있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과정을 거쳤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40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쳤습니다. 다윗 또한 사울에 쫓겨 다니며 많은 날들을 황무지, 마온 황무지, 엔게디 황무지 같은 광야에서 숨어살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조차도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아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신 것은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고속도로처럼 펼쳐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으시고 오직 길을 걸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말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것이라.” 예수님은 광야에 계시면서 40일을 굶으신 상태였지만, 그의 마음 속에 닦여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조금도 굽거나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 길을 곧바로 걸어가셨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예수님 자신이 바로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시고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듯이, 하나님께서 광야 같은 우리의 거친 마음 속에 하나님의 곧은 , 의의 , 생명 길을 내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말씀 되시며 길이 되시는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듯이 이란 그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길이란 우리가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가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만약 끝에 아무것도 없거나 위험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면, 사람들은 길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위험표시를 붙여서 사람들이 다니지 않도록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이란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일까요? 앞에 언급한 창세기 3 말씀에 하나님께서 범죄한 사람들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쫓으시면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막으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근본적인 의미입니다. 길을 걸어서 끝까지 생명을 얻게 되는 길이 바로 (The Way)”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신 길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는 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받는 죄사함 성령 세례입니다. 예수님의 죄사함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가 되었습니다. 은혜에 관하여 히브리서 10:19-2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길이요 휘장은 저의 육체니라 하나님의 다스리는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놓으신 길은 새롭고 이며, 길을 통해 우리는 담대하게하나님께 나아갈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시고 역사하시는 통로가 되십니다. 요한복음 1:51절에 예수님께서 제자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말씀은 창세기 28:12절에 야곱에 꿈에서 이상을 인용한 것인데, 야곱이 것은 사닥다리가 위에 섰는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가 사닥다리 위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사닥다리대신 인자 예수님 자신이 들어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하늘과 땅을 오가며 일하기 위해 예수님을 사닥다리 사용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일은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와 같은 우리 마음 속에 길이 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길을 통해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며, 길을 통해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십니다.

 

길이 어떻게 우리 마음 속에 닦이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은 세례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합니다. 소리는 영원한 말씀 되시는 예수님을 전하는 소리입니다. 따라서 우리 속에 길을 닦는다는 것은 소리를 듣는 입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광야 같은 우리 마음 속에 길을 닦는 작업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창세기 3 말씀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나무의 실과를 먹었은 …….” 하시며 책망하십니다. 아담의 죄의 시작은 아내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40 동안 광야에서 훈련하신 이유에 대해서도, 그들을 시험하사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목적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 듣지 않나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고, 마음에 새기고, 기쁘게 순종할 우리 속에 길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길은 생명의 길이며, 우리를 하나님의 동산 낙원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길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요! 우리가 모든 환난과 유혹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기울여 듣고 순종함으로 매일 길을 걷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