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 (에베소서 5:22)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1. 7. 9. 21:47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

 

에베소서 5:22

 

성경 말씀은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저자들에 의해 쓰여졌습니다. 또한 이들은 모두 2000 이상 오래된 글이며 그것들이 쓰여진 시대적, 역사적, 문화적 배경 또한 독특하다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씀들이 오늘날 사람들의 삶에 적용하기에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 또한 그렇게 생각되기 쉬운 말씀들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아내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교회의  여자 전도사님이 에베소서 5 말씀을 설교하게 되었는데,  본문 말씀에 22절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도사님은  말씀에 따라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렇게 설교하기를 주저했습니다.  대신 그는  사도 바울이 이런 권면을 하게 되었는가를 당시의 남성 중심적 시대 상황에 비추어 설명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의 권면은 단지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상황을 고려하여 기독교에 대한 남편들의 거부감 피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정치적인 기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드러내야 하는 사람이 오히려  말씀을 사람의 사술(邪術)” 전락시키고 있는 참으로 슬픈 모습이었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말씀을 듣고 마음에 거부감이 드는 것은 다만  전도사만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아내들 비슷한 느낌을 가질 것입니다.  그럴까요? 이는 어떤 남편들이 아내의 복종을 감사하고 같은 자세로 아내를 사랑하는 대신 복종하는 아내를 종처럼 부리며 심지어 학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이렇게 불의한 남편을  아내에게도  바울의 권면이 여전히 유효한지 의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아내들에게 복종 권합니다. 그것도 주께 하듯 복종하기 권합니다. 매우 진실하고 헌신적인 복종입니다. 이것은 마치 지극히 비싼 향유 같습니다 (요한복음 12:3). 그런데 그런 값진 향유를 부족한 남편에게 쏟아붓는 것은 정말 내키지 않는 일입니다. 심지어 남편이 이런 아내의 헌신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운다면 더더욱 싫습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의 권면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난감한 말씀입니다. 말씀을 좀더 현실적으로 바꾸거나 아니면 오늘날의 시대에 맞지 않는 것으로 여겨 옆으로 치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성경에는 이것 말고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예수님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하십니다 (마태복음 5:44).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하시고 누구든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하십니다 (마태복음 5:39). 이런 말씀들은  편으로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어떠함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다른  편으로 사람들의 악함을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악하고 이기적인데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오늘 제가 하고 싶은 말씀의 포인트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들을 ,  말씀과 함께 우리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사람들의  먼저 마음 속에 떠올립니다. 세상은 악하고 이기적이고 교만하며 무정합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이런 세상을 매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죄의 실상을 매우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것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연스럽게 세상의  생각하며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아버지께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셨는지를 짐작할 있습니다. 하지만  순종의 과정에서 예수님께 십자가의 고통보다  견디기 어려운 난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시기하는 종교 지도자들무책임한 빌라도, 잔인한 로마 군병들, 그리고 무지한 백성들이 힘을 모아서  없으신 주님을 잔인하게 죽인 것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보고 유대인들은 조롱하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27:40).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십자가의 고통 속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견디시면서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이 순종의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사랑할  없는 이유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런 이유들을 무시하면서 묵묵히 하나님의 사랑의  순종한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심한 고통을  이기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관계들을 맺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다름이 아니고 이런 관계들의 모임입니다. 어떤 관계는  중요하고 오래 계속되며, 어떤 관계는  중요하고 일시적입니다. 이런 다양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게 되고  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과 이해심이 많은 부모님 밑에서 성장한 자녀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자신에 대해 좀더 건강하고 밝은 정체성 갖게  것입니다. 비록 그렇더라도  개인은 홀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그곳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일하며, “세상의   경험하고 견뎌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을 살고 나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시편 90:10). 이것이 우리 각자가 자신의 인생을 살면서, 그리고 숱하게 들어온 이야기들을 통해서, 그리고 오랜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깨닫게 되는 세상이며 인생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전혀 다릅니다. 이는 우리 깊은 곳에 하나님의 나라 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둘이서 삶을 영위하는 공간입니다.  세계는 성전이나 이나 나라 혹은 산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나와 하나님  사이에 매우 특별하고 은밀한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대해 모든 면에서, 특히  사랑에서 완전하십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세상의   견디는 과정이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 경험하고 배우는 과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상급이니라” (창세기 15:1).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1). 아브라함과 다윗은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이리 저리 치이고 방황하는 위험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마음 속은 성한 곳이 없이 원수들이 남겨놓은 상처들과 응어리들로 가득할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방패요 지극히  상급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완전하신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아무런 부족함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커서 이들 또한 사랑의 거인 되어 버렸습니다. 원수들 조차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하나님 주니어(Jr.)” 되었습니다. 이들은 비록 원수들이 들끓는 세상 가운데 있었지만, 실상 하나님과 함께 천국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원수들조차 하나님을 대하듯 대하였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들이 아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권면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권면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주께 하듯 하라 합니다. 바울이 기대한 것은 아내들과 주님 사이의 깊고 순전하고 완전한 사랑의 교제입니다.  사랑의 관계야말로 모든 관계의 ()” 되며, 또한 다른 사랑의 관계들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지혜와 능력이 됩니다. 아마도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일 것입니다. 서로 진실하게 원하고 사랑하며, 그 사랑의 흐름에 아무런 막힘이 없다면  둘은  몸과  마음  것이며 어떤 다른 것도  둘을 나눌  없을 것입니다그리고  연합 자체가 무한한 기쁨이 되며 무한한 생명의 에너지를 쏟아낼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친부모자식보다도  가까우며,  평생의 반려자인 남편/아내보다도 더 친밀합니다. 성경에는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을 그리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49:15 말씀입니다. “여인이 어찌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스바냐 3:17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애틋하고 간절한지요! 비록 나를 향한 짝사랑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안에 계시며, 내가 얼굴을 돌려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당신의 사랑을 받아주기를 기다리십니다. 내가 주님의 얼굴을  ,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안에 임한 천국이며, 세상의 어느 누구도 어떤 것도 손상시킬  없고빼앗을 수도 없는 천국입니다. 하나님과  둘이서 누리는 완전한 천국입니다. 그리고  천국 안에서 우리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기쁘고 힘있게 순종할  있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참으로 귀하고 복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