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 (갈라디아서 4:21-5:15)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1. 4. 21. 23:03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

 

갈라디아서 4:21-5:15

 

오늘 말씀의 주제는 자유입니다. 5:1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하게 하려고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자유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것이 왜 그렇게 소중한 것일까요? 이 질문들을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자유의 의미를 탐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유에 대한 사전적 정의들을 보면 대부분 “어떤 나쁜 상태로부터 벗어난 상태” 또는 “원하는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상태”로 자유를 설명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의 의미입니다. 자유란 독립적이며, 어떤 제약들에 매이지 않으며,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여기 어떤 강력한 존재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는 어떻게 그 존재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 강력한 존재의 힘이 미치지 않는 먼 곳으로 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강력한 존재를 제압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분리와 압도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자유를 얻기 위해 애쓰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유의 의미는 다릅니다. 자유의 참 의미는 그것과 정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자유는 분리나 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연합(unity)이며 순응(submission)입니다. 자유는 관계의 완전함에서 옵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의 상식과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관계가 불완전한 둘 사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 두 나라가 있는데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서로 경쟁하지만 그렇다고 정면 충돌을 피하고 싶습니다. 이럴 경우 그들 사이의 불완전한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많은 문제들을 피하기 위해 둘 사이에 많은 법들과 규정들을 둘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자유롭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완전한 관계에서는 그러한 법들이나 규정들이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자유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자유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완전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자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또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설명됩니다. 사실 이 관계는 우리가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랜 동안 하나님과 떨어져서살아왔으며 심지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벗어남으로써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이완전한 관계가 회복되었으며, 이와 함께, 우리의 자유 또한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었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갖게 된 이 자유를 충분히 이해하고 누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 자유를 보다 시각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정글의 왕 사자와 그것의 새끼들 사이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사진이나 비디오를 통해 우리는 이글거리는 눈,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강력한 근육을 가진 거대한 숫사자와 그 주위에서 즐겁게 뛰놀고 있는 어린 새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이 무시무시한 사자 왕을 가까이 하지 않지만, 그의 새끼들은 심지어 그 발톱 아래에서도 아무런 두려움을 갖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그들이 왕의 자녀들이며, 그 왕에게서 태어났으며, 따라서 그 본질이 왕과 같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어린 새끼들은 사자 왕에 대하여 자유롭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이 왕에게서 멀리멀리 벗어나 있을 때만 자유롭지만, 새끼들은 그를 향하여 자유롭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향하여 자유로우며, 따라서 아무것도우리를 두렵게 하거나 종 삼을 수 없습니다.

 

자유란 관계에 관한 것이며, 진정한 자유는 오직 동일한 염색체, 동일한 본성, 동일한 형상을 공유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갖는 자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염색체, 같은 본성, 그리고 같은 형상을 가짐으로 이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실상 우리는 그 본질에서 하나님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지만, 우리는 죄의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우리는 육신적입니다. 하나님은 강하시지만, 우리는 약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공통점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기란 참으로 난망입니다. 오히려 무서운 사자 앞에 선 어린 새끼 사슴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이러한 차이들을 극복하고 이 참된 자유를 얻고 누릴 수 있을까요?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이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을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우리가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 곧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를 갖도록, 그리고 그것이 이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완전한 관계가 되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다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이 깊은 골을 메우십니다. 우리는 자주 예수님을 ‘중보자’라고 부릅니다. 디모데전서 2:5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중보자로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장애물들을 없애셔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완전한 관계를 갖도록 일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첫째로,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으심으로써 우리 중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둘째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으시고 우리에게 하얀 의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법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본문 4:19절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수고를 하노니……” 예수님은 실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고린도후서 4:4절 말씀입니다. “그 중에 이 세상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을 위해 하려고 하는 것이 그들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율법의 저주로부터 벗어나며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향하여 자유롭게 나아가는 길을 여는 것입니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이 사도 바울의 말은 “내가 너희 안에 그리스도를 낳는 수고를 한다”고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해산하는 수고”는 은유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를 이해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오늘 말씀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4:31). 이것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을 끌어들였습니다. 22-23절 말씀입니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이스마엘은 애굽인 여종 하갈에게서 났으며, 이삭은 자신의 아내인 사라에게서 났습니다. 바울은 이스마엘이 ‘육체를 따라’ 났으며, 이삭은 ‘약속으로 말미암아’ 났다고 합니다. 여기서 ‘약속’이란 물론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합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잉태되고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태어났음을 의미합니다. 이삭이 잉태될 때, 그의 육친의 부모들인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가 들어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이삭의 탄생은 순전히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이삭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태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즉,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을 통해 나신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마리아는 남자를 모르는 처녀였습니다. 하지만 천사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과연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한복음 3:5,6). 여기서 예수님은 육과 영을 분명하게 구분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거듭남은 육체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 나의 새로운 생명의 씨가 되고 능력이 되는 것이며, 그 말씀과 영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정하신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즉, 순전히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우리의 죽은 육체는 우리의 탄생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습니다 (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과 그의 영으로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만드신 바이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는 참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습니다. 그 씨도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그 영도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이는 하나님의 형상과 그대로 일치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입니다.

 

본문의 5:1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하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 자유의 복음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미 자유를 주셨으며, 이것은 취소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자유에 굳게 서라”고 말합니다. 왜 우리는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씨름을 해야 합니까? 이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이 자유를 시기하는 악한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이들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서 있었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육체를 따라 우리를 판단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유일한 백성이라며 권세를 휘둘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라고 칭했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이들은 모세가 유일한 중보자이며 그를 통해 받은 율법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바울에 따르면 이 땅 위에 세워진 예루살렘은 시내산과 더 나아가 애굽인 여종 하갈에 해당합니다. 옛날의 중보였던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전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육체의 죄를 드러내고 정죄하며, 결과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도록 만듭니다. 자유를 주는 대신, 우리를 노예로 만듭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한 우리의 씨름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유일한 중보자이신 것과 또 그를 믿는 우리에게 이미 아들의 영이 되시는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과 아버지-자녀의 교제를 할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또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이 완전한 관계에 우리의 육체가 아무런 기여를 한 것이 없으며 할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외에 아무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수고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어느 누구도 “아들(딸)아 너는 이제 자유다!” 하시는 예수님의선언을 취소하거나 변경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중보자이시지만, 동시에 우리가 자유로운 삶을살도록 도우시는 중보자이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이 자유를 연습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8-30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사도 바울은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이 멍에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 예수님을 따르며 배우는 멍에입니다. 감사하게도 예수님은 온유하시며 겸손하십니다. 그리고 이 멍에는 쉽고 가볍습니다. 더 나아가 이 멍에를 짐으로 우리는 사랑과 지혜가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종의 멍에는 무자비하고 잔인하며, 우리를 온갖 비참함과 죽음으로 끌고 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멍에는 영광스러운 의의 옷이며 면류관입니다. 이 멍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궁전과 그 보좌로 곧 우리의 아버지의 집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