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믿음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서 11:6)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1. 4. 16. 09:16

믿음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서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오늘은 믿음에 대해서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단어들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흔히 쓰여지는 만큼 이 말의 깊고 강력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이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갖고 있는 믿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믿음은, 예를 들어, 돈이나 스마트 폰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돈의 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돈은 단순히 종이조각이나 은행 계좌에 적혀 있는 숫자가 아닙니다. 돈은 실로 힘(power)입니다. 돈이 있으면 우리는 최소한 살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먹고 사는 염려에서 벗어나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마음껏 즐길 수 있습니다. 스마트 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전화기는 단순히 하나의 기계가 아닙니다. 전화기가 있으면 전화 통화 뿐만 아니라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 서핑도 하고,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고, 게임도 할 수 있습니다. 전화기를 이용하여 돈을 버는 일도 흔합니다. 또 전화기는 우리를 방대한 지식과 정보의 바다에 연결시켜주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 회사들, 학교들, 기관들을 접근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믿음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9:2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만큼만 있어도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태복음 17:20). 히브리서 11장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한 많은 구체적인 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1:33-3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이는 정말 놀랍습니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할 수 있게 하는 것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런 일들은 세상의 모든 돈, 기술, 지혜를 다 모으더라도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돈은 이 세상에서의 힘이고 지혜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저 세상 곧 하나님 나라에서의 힘이고 지혜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모든 좋은 것들과 연결시켜주는 스마트 폰과 같습니다.

 

믿음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사전에 따르면, 믿음은 어떤 것 또는 어떤 사람에 대한 완전한 신뢰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에 대한 저의 신앙적 이해를 기초로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싶습니다. 믿음이란 자신의 생명을 위해 어떤 것/어떤 사람을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죽음을 무릅쓰기까지 붙들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믿음이란 어떤 기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의 친구에게 어떤 중요한 부탁을 하면서 너만 믿는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 친구에 대한 당신의 믿음이란 부탁한 일을 그 친구가 아주 잘 해줄 것이라는 당신의 기대입니다. 만일 그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그 친구에게 그런 신뢰를 가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 믿음은 내 쪽에서 감수해야 할 비용을 수반하기도 합니다. 이 비용이란 인내심, 긴 시간의 기다림, 여러 부정적인 징조들에도 불구하고 기대를 지키기 위한 씨름 등을 포함합니다. 모든 종류의 믿음이 다 이 두 요소 곧 기대와 비용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바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믿음은 어떤 것 또는 어떤 사람에 대한 완전한 신뢰입니다.  완전한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듭니다. 이 말이야말로 크리스천들의 믿음에 적합합니다. 어떤 신뢰를 완전한 신뢰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가장 높은 기대를 갖는 것이며, 이를 위해 가장 높은 비용을 감내하는 신뢰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높은 기대는 무엇이며 가장 높은 비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생명입니다. 저는 크리스천의 믿음에 대한 긴 정의를 제시했습니다. 사실 이 정의는 간단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즉 크리스천의 믿음이란 생명을 맡기면서까지 생명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드리면서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하실 아버지를 신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드려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완전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우주적 진리이며 다른 하나는 개인적 확신입니다. 우주적인 진리는 믿음의 내용(content)이며, 개인적인 확신은 그 내용을 담는 용기(container)입니다. 위대한 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관해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하늘에 떠 있는 모든 천체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천동설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관찰한 바를 근거로 갈릴레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당시 카톨릭 교회는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그의 주장을 취소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극심한 위협에 직면한 갈릴레오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주장을 번복하였지만,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And yet it moves)." 여기서 우주적 진리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갈릴레오는 이 진리를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고 마음 깊이 확신했습니다모든 믿음은 이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곧 우주적 진리와 그 진리에 대한 개인적 확신입니다.

 

그러면 이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요? 물론 둘 다 중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주적 진리는 내용이며 개인적 확신은 그 내용을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이것은 보석과 그것을 담고 있는 보석함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이 보배란 바울이 흔들림 없는 확신으로 붙들고 굳게 믿고 있는 우주적 진리 곧 그리스도 예수님에 관한 복음입니다. 보석함의 가치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자 안에 담겨 있는 보석에 있습니다. 만일 그 상자가 비어있거나 그 안에 담긴 보석이 가짜라면, 그 보석함은 매우 초라해 보일 것이며 그것의 반짝이는 장식들도 전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 갈릴레오가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주장하고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었다면, 그는 결코 위대한 학자로 존경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그가 마음에 품고 확신하던 그 우주적 진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의 진정성과 가치는 그 믿음의 내용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에 대해서 얘기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항상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설명하지도 못한다면, 그 믿음은 가짜이며 무의미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은 실상 믿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해로운 착각일 수 있습니다. 사실 진정한 믿음이란 그것의 내용 곧 진리로부터 유발된 것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꼭 붙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붙들고 있는 힘은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힘은 바로 당신이 붙들고 있는 그것의 가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귀하면 귀할수록 그것을 붙드는 당신의 힘도 그만큼 강해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6절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말씀은 믿음이란 무엇인가 또는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중요한 것은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 배우는 바 그 내용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며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믿는 자의 기대가 무엇이며, 또 그가 치러야 할 비용이 무엇인지도 말해줍니다. 그 기대는 이며,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의 내용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며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어떤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많은 크리스천들까지도 믿음을 자주 자신들의 문제와 연결 지어 생각합니다. 몸이 아플 때는 곧 나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시험을 앞두고 있으면 합격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직장을 찾고 있는 경우, 좋은 곳에 취직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 중심의 믿음에서,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대리인 정도로 취급되며, 문제가 해결되면 바로 퇴장하고 잊혀집니다. 이런 믿음은 문제 주위를 맴돌며 그것의 해결책을 찾아 방황할 뿐입니다. 문제 중심의 믿음은 하나님 자신을 찾지 않으며, 따라서 그 방향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마침내 잘못된 결국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믿음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과 그 분이 주시는 영광스럽고 존귀한 상을 찾아가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또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리고 그 분이 계신다면 그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심을 단순히 호기심의 문제로 보며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쓰여있는 모든 말씀들은 모두 나와 나의 생명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라”(요한복음 6:35) 하십니다. 이 말씀은 나는 너에게 생명의 떡이 되느니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향하여 계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방식은 우리 인간을 포함하여 세상의 피조물들이 존재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존재하시는 지를 설명하는 몇 가지 공통적인 수식어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다음 몇 가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한 분이신 참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계신 것을 믿을 때, 우리는 그 계심의 이러한 면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소리를 들으시며 그것에 반응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아시며 나의 모든 것을 살피십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나를 지키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신경은 나를 향해 온전히 깨어 계십니다. 우리 주변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들, 친구들, 동료들, 그리고 전화기와 SNS 계정에 있는 많은 이름들…… 이들은 정말 살아있는 것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잠들어 있거나, 자신의 일로 바쁘거나,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수 없을 만큼 이기적입니다.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 내 주위에 살아있는 존재는 거의 없습니다. 이들은 살아있더라도 내게 대해서는 죽은 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은 실제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내게 대해 살아계심을 묘사하는 여러 말씀들이 있습니다.이사야 49: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인이 어찌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아들을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 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시편 121:4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마태복음 6:31-3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말라 이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줄을 아시느니라. 또 누가복음 12:6-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이 말씀들은 모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얼마나 섬세하시고 신실하신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시며 매우 조용하고 평화롭게 일을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항상 나와 함께 계시며, 그가 내 안에 살아 계심은 나 자신의 존재보다도 더 확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심의 또 다른 특징은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특히 매우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개의 대안들을 갖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의 안전을 위해서 어떤 추가적인 도움들을 유지하기를 원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다른 신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유일하시며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아주 많이 강조합니다. 예를 이사야 46:9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같은 이가 없느니라. 호세아 13:4절에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하나님 여호와라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의 계심을 믿을 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으며 다른 구원자도 없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신들을 갖는 것을 싫어하시며, 오직 당신만이 우리의 유일한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열왕기상 18:21절에 선지자 엘리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undivided heart)으로 주의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시편 86:11).

 

하나님의 계심에 관해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참되시다(true)”라고 할 때 이것은 그가 모든 면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이 되심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사람을 피아니스트로 소개를 받았다면 우리는 그가 진짜 피아니스트인지를 알고 싶어할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가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것을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가 피아노를 아주 능숙하게 연주하면 우리는 그를 진짜 피아니스트로 인정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이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특히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보이심으로 자신의 참되심을 입증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4:4절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에스겔 39:28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전에는 내가 그들로 사로잡혀 열국에 이르게 하였거니와 후에는 내가 그들을 모아 고토로 돌아오게 하고   사람도 이방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안정된 삶을 위해 돈이나 권력이나 명성을 의지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생명을 구하는 데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영광을 받으실 분도 오직 하나님 뿐이십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존재하는 이는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모든 다른 것들은 일시적으로 조건적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그것들은 오늘 있다가 내일 사라질 것들입니다. 심지어 있더라도 무능하고 무익하며, 따라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심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심은 어떤 조건에도 매이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도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자체가 스스로 계신 자(I AM WHO I AM)”입니다. 그는 영원하시며 불변하십니다. 그는 알파요 오메가이십니다. 그는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장차 오실 분이십니다 (요한계시록 4:8). 이것이 하나님의 계심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완전한 신뢰를 받으실 만하십니다. 또한 하나님 이외에도 어느 것도, 어느 누구도 이런 완전한 신뢰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이란 말은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사실 믿음이란 말이 종교적으로만 쓰이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인간 관계에서도 자주 사용됩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신뢰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믿을만함을 칭찬하고 높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와 같은 행위에 대해 경고합니다. 예레미야 17:5절 말씀입니다. “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사람은 그저 육체에 불과합니다. 육체란 약함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그 능력에서 뿐 아니라 지혜, 의로움, 신실함, 자비로움 등 모든 면에서 약합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예수님의 12 제자들 중 가장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시기 전날 밤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마태복음 26:34). 그리고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베드로는 그의 가장 사랑하는 주님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셨지만 유대인과 로마 제국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 두 법정은 당시 세상에서 가장 종교적이고 도덕적이며 정의로운 법을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법으로 죄 없으신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한 것입니다. 육체의 최선도 여전히 하나님 보시기에는 최악인 것입니다. 육체에게 필요한 것은 신뢰가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용서의 사랑인 것입니다.

 

본 설교의 시작 부분에 저는 믿음을 돈과 비교하여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믿음은 영적인 화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상점에서 100달러 짜리 지폐를 내면 점원은 그것이 진짜인지를 검사합니다. 그리고 진짜인 것으로 확인되면 받아줍니다. 우리의 믿음 또한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확인하십니다. 베드로전서 1:7절 말씀입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보다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것이니라. 하나님은 계시며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유일한 참 하나님이심은 변하지 않은 진리이지만, 우리는 때로 아무런 보이는 소망도 없이 죽음 같은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마태복음 27:46) 하고 부르짖으실 때가 그랬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아버지 하나님을 믿으시며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누가복음 23:46). 그리고 이 믿음과 순종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 곧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구하시는 것입니다. 정금보다 더 순전한 믿음으로 예수님은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으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참된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