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 (누가복음 16:1-15)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0. 8. 23. 11:07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

 

누가복음 16:1-15

 

오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들 중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비유는 그 정확한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유명합니다. 우리가 이제 읽은 바대로 이 비유의 이야기는 매우 단순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그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부자는 청지기가 자신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에 청지기를 불러서 그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곧 직업을 잃게 된 청지기는 실직 후의 삶을 대비하여 한 가지 계책을 마련했습니다. 그것은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삭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채무자들을 한 사람씩 불러서 그들의 빚을 상당액씩 심지어는 절반까지 줄여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직업을 잃고 갈 데가 없을 때 이 빚진 자들이 그들의 집으로 자신을 들여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있을 수 있는 일이며, 따라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부분은 8절 말씀입니다. 이 청지기의 주인은 그가 한 일을 알고는 오히려 이 불의한청지기를 칭찬했습니다. 이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의 미래의 삶을 대비해야 한다며 주인의 재산에 심각한 손해를 끼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인은 그의 행동을 지혜롭다고 여기며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청지기의 행동에 대한 주인의 칭찬을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분명히 해야 할 점들이 있습니다. 우선 이 비유는 재산이나 소유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금전적인 이득이나 손해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9절에 이 비유를 적용함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친구영원한 처소를 우리가 추구할 궁극적인 목표로 언급하시는 반면, “불의의 재물곧 세상의 재산을 일시적인 수단으로 취급하십니다. 이것은 13절에서 더욱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4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이 말씀 또한 이 비유가 돈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 됩니다. 곧 우리는 이 비유의 초점이 돈이나 부유함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또한 도덕성에 관한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 주인이 어떻게 자신의 재산에 막대한 손실을 입힌 이 청지기의 행동을 칭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아해 합니다. 비록 돈이나 재산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더라도, 불의함은 불의함일 뿐입니다. 또한 이 주인은 자신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이유로 이 청지기를 해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소유물을 허비한 청지기의 허물은 이 청지기의 지혜로운 행동에 대한 주인의 칭찬과 모순될 만큼 심각하게 다뤄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 청지기의 도덕적 결함이 이 비유의 중요한 요점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는 훌륭한 배경을 제공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요점이란 청지기의 지혜와 그 지혜로움에 대한 주인의 인정입니다. 제가 아는 한, 놀랍게도, 복음서에서는 도덕성이 중요한 문제로 다뤄진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정반대의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바 유명한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그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허비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5:13). 이 이야기에서 비슷한 습관을 가진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그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그처럼 부도덕한 삶을 살다가 거지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이 쓸모 없는 아들을 위해 큰 잔치를 열고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이로 인해 첫째 아들은 매우 화가 났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들과 함께 먹어버린 동생에 대해서 화가 났으며, 또한 그런 몹쓸 녀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고 즐거워하는 아버지에 대해서 화가 났습니다. 이 첫째 아들이야말로 그의 높은 도덕성을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아들입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 이 큰 아들의 착함을 칭찬하시기 위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1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이 비유의 요점은 청지기의 지혜와 또 주인이 이 지혜를 인정하고 칭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이 청지기는 지혜로웠을까요? 간단히 말해서 그는 미래를 예측하고 또 그것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지혜였습니다. 이 지혜를 가지고 그는 현명하게 행동하였으며, 또 그 열매를 수확했습니다. 성경에서 지혜란 앞날을 예측하고 그것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애굽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하며, 요셉은 7년의 풍작과 7년의 대기근이 있을 것임을 예언하고 그것을 준비하였습니다. 선지자 다니엘 또한 느부갓네살 왕의 불가사의한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미래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높은 지혜와 통찰력을 가진 자들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지혜와 분별력이 없음을 인하여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그들은 모략이 없는 국민이라 그 중에 지식이 없도다 그들이 지혜가 있어서 이것을 깨닫고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였더라면……” (신명기 32:28-29).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들은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을 시작하시면 외치셨던 최초의 말씀 안에 다 요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15). 참된 지혜란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이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에는 무엇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지혜들로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우리가 어떻게 내일을 준비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혜란 오늘을 희생하여 미래를 준비하며 영원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까워오는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충성됨(being faithful)”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떤 청지기입니다. 옛날에 청지기라는 직책은 매우 양면적인 성격을 띠었습니다. 어떤 집의 살림을 맡고 있는 청지기는 그 집의 식솔들에게는 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주인에 대해서 노예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런 청지기의 지위를 잘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애굽왕 바로의 신하 보디발에게 노예로 팔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심을 본 보디발은 요셉에게 자신의 집과 모든 소유물을 통째로 다 맡겼습니다 (창세기 39:4). 그는 모든 일들을 요셉에게 일임하고 간섭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여전히 노예들 중 하나였지만, 그는 사실상 보디발 집을 다스리는 왕이었습니다. 애굽왕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임명할 때에도 똑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는 요셉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창세기 41:40-44). 어떻게 해서 요셉은 노예로서 그렇게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가 주인의 이익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심지어 주인 자신보다도 더 주인의 이익에 충실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인의 관심사에 대한 요셉의 충성됨이 그를 왕과 같은 권세를 가진 총리의 자리까지 높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라는 신학자의 말을 한 마디 인용하겠습니다: “권세란 왕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권세란 어떤 명분(cause)을 위해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희생하겠다는 단호한 의지적 결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Authority does not mean to be a king, but by a firm and conscious resolution to be willing to sacrifice everything, one’s very life, for a cause.”) 맞습니다. 청지기의 권세란 주인의 이익을 위해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치겠다는 견고하고 자발적인 헌신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청지기로 창조되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시라” (창세기 1:28). 이것은 특히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진리입니다. 누가복음 12:42-43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주인의 청지기가 된 우리의 삶은 결코 주인의 관심사와 분리되어 살 수 없습니다. 그 반대로 우리의 삶은 생명을 버리는 데까지 주인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드리는 헌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의 관심사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오늘 이야기의 불의한 청지기가 행한 일을 통해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하나씩 불러서 그들의 빚을 상당량 삭감해 주었습니다. 성경에서 빚진 자(debtor)”는 자주 죄인(sinner)”, 그리고 (debt)”(sin)”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주인이 예수님을 의미한다면, 이 불의한 청지기가 한 일은 주인의 관심사와 매우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빚진 자들에게 주인의 용서의 은혜를 나누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우리 크리스천 청지기들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집안의 식구들에게 천국의 음식을 먹이기 위해 하나님의 집을 맡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천국의 음식이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Henry Hon이라는 크리스천 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는 예수님을 사람들 속에 심음으로써 그 예수님께서 사람들 속에 다시 나시며 자라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관심사들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경제적인 부와 도덕적인 선함일 것입니다. 이것들이 우리의 가장 우선되는 이익입니다. 이 둘을 모두 가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이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들은 돈을 사랑했으며, 동시에 (righteousness)”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구한 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위선적인 자기의(self-righteousness)”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불의한 청지기는 바리새인들의 재물 사랑 및 위선적 자기의와 반대가 되는 방식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는 빚진 자들의 호의를 사기 위해서 주인의 재물을 허비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바리새인들의 가장 우선되는 관심사를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빚진 자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재물을 아끼지 않았으며 불의한 자라는 오명을 감수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누가 채무자들의 안녕에 관심을 보이며, 누가 채무자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말입니까? 바리새인들의 눈으로 보면, 이 불의한 청지기는 불의할 뿐 아니라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하지만 이 불의한 청지기는 빚진 자들에 모든 것을 퍼부으며, 그들의 호의를 기대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관심사였으며, 사실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심사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최고의 관심사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은 모든 희생을 감내하시며, 심지어 자신의 아들을 희생하고 그를 죄인으로 만들기까지 (고린도후서 5:21) 하시면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충격적으로 불의한 허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명의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이렇게 불의한 허비를 무릅쓰셨습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유일한 관심은 누가복음 15:3-7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이 100마리의 양을 갖고 있는데 그 중 한 마리를 잃어버렸을 때, 그는 남은 99마리의 양들을 들판에 남겨두고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아 다녔습니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 그는 99마리의 다른 양들을 맹수들이 들끓는 벌판에 버려두었습니다. 하나님께는 한 명의 잃어버린 영혼그 외 다른 모든 것들을 합한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에서,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그 영혼이 아무리 작은 자일지라도, “불의한 허비를 정당화시킵니다. 심지어 그 허비가 매우 클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사를 섬기는 하나님의 청지기들입니다. 그 유일한 관심사란 한 명의 잃어버린 영혼에게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죄의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도덕성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경제적 부요함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한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시는데 있으며, 이를 위해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결코 다함이 없는 재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엄청난 보화를 준비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에 동참할 충성스러운 청지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사에 온전히 그리고 간절히 헌신하는 한, 우리는 이 재물을 허비할 권리를 가진 세상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이 재산을 가지고 하나님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주인의 소중한 재산을 쓸데 없게 만드는 불의한 청지기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삶을 이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사에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정한 부유함으로 보상하실 것입니다. 썩지 않는 영원한 부유함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집에 들어가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충성스러운 청지기들로 사용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