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민수기 13:1-14:11)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0. 1. 6. 11:45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민수기 13:1-14:11

 

우리가 오늘 공부할 말씀이 담긴 책을 “민수기”라고 부르며 영어로는 “Numbers”라고 합니다. 이 책을 이렇게 부르는 까닭은 이 책의 앞부분에 사람들의 숫자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 모세를 시켜서 이스라엘 자손의 수를 가족과 종족대로 세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수를 세라고 하실 때 모든 사람들을 다 세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이십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모든 자”를 세라고 하십니다 (민수기 1:3). 출애굽기 12:41절에서도 애굽을 빠져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여호와의 군대”라고 부릅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전쟁을 하기 위한 군인”으로 부르셨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뿐 아니라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 하고 격려하며 (디모데후서 2:3), 빌레몬서 1:2절에서는 “아킵보”라는 사람을 소개하면서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자 (fellow soldier)”라고 부릅니다. 믿는 자들은 근본적으로 “전쟁을 위해 소집된 군인”입니다. “군인의 삶”은 “일반인의 삶”과는 매우 다릅니다. 특히 군인은 “적을 대항하여 싸움을 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적”에 대한 분노가 없거나 싸움을 못하는 군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적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전쟁을 위해 소집된 군인”임을 깊이 자각하고, “싸움에 능한 자,이기는데 익숙한 자,” “탈취물을 나누는 기쁨을 아는 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인 민수기 13,14장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매우 뼈아픈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모세는 이스라엘 각 지파를 대표하는 12명을 가나안 땅에 보내어 그 땅을 탐지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이들 중 10명은 그 땅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한 것은 그 땅에서 강하게 생긴 거인들과 견고한 성들이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2명의 정탐꾼들 중 오직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가나안 땅의 거민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하며 사람들을 격려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원망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한탄하셨습니다 (14:11). 그리고 20세 이상의 사람들이 광야에서 다 소멸될 때까지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유리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목전에 두고도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신에 40년 동안 광야에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직 “군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 백성”에서 “하나님의 군대”으로 바뀌어가는 전환기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는 그 시작 부분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약한 모습이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군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지혜는 우리가 세상을 이기며 하나님의 축복을 쟁취하는 싸움을 하는데 있어서 소중한 자산이 될 것입니다.

 

군인으로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원수가 있으며 또 싸워야 할 싸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비어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13:29절 말씀에 따르면 가나안 땅의 남쪽 지방에는 아말렉 사람들이, 산지에는 헷, 여부스 및 아모리 사람들이, 그리고 해변과 요단강가에는 가나안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가나안 땅 어디에도 비어있는 곳은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크고 강했으며, 그들의 성읍은 견고한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을 얻기 위해서는 이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은 세상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정복 전쟁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영적 전쟁입니다. 왜냐하면 이 전쟁은 가나안 땅의 거인들을 이기는 육체의 싸움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워야 햘 원수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있는 거인들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이고 두렵게 하는 사단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원수를 “마귀”라고 하고 또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6:11, 12).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믿음의 싸움에서 이미 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대해서 악한 보고를 한 10명의 정탐꾼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13:31).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13:33). 그들은 사단 마귀가 준 두려움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적들은 장대한 거인들로 보이고 자신들은 메뚜기처럼 약하고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자, 자신들을 노예의 압제에서 이끌어낸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14:2),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해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14:3) 하며 비명을 질렀습니다. 정작 싸워야 할 원수는 사단이고, 또 자신들 속에 역사하는 불신과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믿음을 잃고 깊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피아 식별조차 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믿음이란 여러 가지 말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 믿음을 정의하자면, “믿음이란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고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다른 두 정탐꾼 갈렙과 여호수아의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들은 가나안 땅의 거인들에 대해서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니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들을 보고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두려울 것이 없는 용사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들 앞에 정복할 땅과 성들과 거인들이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였습니다. 마치 맹수가 사냥감을 발견한 듯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싸움을 이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하였습니다. 13:18-20절 말씀입니다. “그 땅의 어떠함을 탐지하라. 곧 그 땅 거민의 강약과 다소와 그들이 거하는 땅의 호불호와 거하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토지의 후박과 수목의 유무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하는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쟁 영웅인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전투에서의 승리는 오직 준비에 있다”고 말합니다. 전투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을 잘 알고 또 이를 기초로 모든 있을 수 있는 상황들에 대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거민들의 장대함을 보고 그만 두려움에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가나안 거민들 앞에서 “메뚜기”와 같다고 자조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또 말합니다. “지휘관의 첫째 요건은 냉정성을 갖는 것이다. 그래야만 어떠한 상황에서도 혼란에 휩싸이지 않고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 원수의 가장 큰 무기는 “두려움”입니다. 사단이 쏘는 두려움의 독화살을 맞으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눈앞이 캄캄해집니다. 이렇게 되면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사단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의 어떠함을 탐지하라”고 하실 때, 그 목적은 단지 그 땅의 어떠함을 보는 것뿐 아닙니다.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단히 원수 사단 앞에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로마의 가이사에게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 한가운데로 보내십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고 냉정하고 담대한 눈으로 “사단의 궤계”를 꿰뚫을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이렇게 훈련하십니다. 두려운 눈으로 보면 세상은 사나운 거인들로 가득한 정글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축복이 우리 눈 앞에 펼쳐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신자가 싸우는 믿음의 싸움이란 “두려움을 이기고 사단의 궤계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보고 쟁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을 이기기 위해서 기본적인 필승의 전략이 필요합니다.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그 전략은 “수적인 우세”였습니다. 곧 병력이 많은 쪽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실망스러운 “상식”입니다. 하지만 이 상식을 실전에 응용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군의 병력이 적군에 비해 항상 많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나폴레옹은 적군이 집결하기 전에 급습을 하거나, 길게 늘어서서 이동중인 적을 공격하거나, 적의 일부를 고립시키거나, 좁은 지형을 이용하여 전선(battle front)의 길이를 최소화하거나, 병력을 나누어 파상 공격을 함으로써 수적으로 많게 보이게 하는 방법들을 이용했습니다. 이런 전략들은 모두 “수적인 우세”라는 기본 전략으로부터 나온 응용 전략들입니다. 그러면 믿는 자들의 싸움에서의 기본 전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두려움에 빠져서 전쟁을 포기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 정탐꾼들 중 두 사람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옷을 찢으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이 말씀에 승리를 위한 명확한 지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리고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입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상황을 맞이하고 어떤 결정을 하든지 그들이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지휘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시며, 그 땅을 그들에게 주십니다. 사실은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유일한 전략입니다. 요한복음 8:29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싸움의 승패는 “수적인 우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영적 싸움의 모든 전략들은 이 기본 전략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 찾고 이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반드시 승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싸움을 싸우는데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나의 생명”입니다. 정탐꾼들의 “절망적인”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이 새도록 소리를 지르며 곡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이 땅에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렇게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들을 데리고는 결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영적 군인은 “자기 생명을 하나님께 맡긴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은 오직 “어떻게 이 싸움을 이길 것인가?”만 생각합니다. 나폴레옹은 휘하의 장군들이 회의를 지나치게 오래 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대개 오랜 회의 끝에 “최악의 방책”이 나오는데 그 최악의 방책이란 “가장 소심한 방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장 소심한 방책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지휘관을 바꾸고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군인이 “전쟁의 승리”보다 “목숨의 보전”을 앞세우면, 이렇게 소심한 방책들 곧 최악의 방책들 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게 됩니다. 싸움을 싸우는 군인은 늘 생명의 위험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군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은 이보다 더합니다. 예수님의 군사들은 생명의 위험이 아니라 죽음자체를 안고 삽니다. 고린도후서 4:10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군사들에게 주어진 생명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하여 죽으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나타나 우리를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10). 이 약속의 말씀을 믿는 그리스도의 군사는 심지어 죽음도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이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단 마귀가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죽도록” 충성할 때, 우리는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며,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며, 영원한 천국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한 해를 주셨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의 마음은 마치 미지의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습니다. 이 새로운 땅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약속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두려워할 만한 어려운 문제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가나안 땅의 거민들을 가리켜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어려운 도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의 기쁨과 탈취물을 나누는 기쁨을 주시기 위해 준비하신 입니다. 싸우는 군사들에게 이보다 더한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악한 원수들과의 영적 싸움을 감당하며, 하나님을 믿고 모든 일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써 이 싸움들을 이기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 각자가 이 한 해를 통해서 보다 강력한 하나님의 용사들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영적 전쟁을 위해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합니다.